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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Sep 30. 2016

9. 글쓰기 : 아Q정전과 카탈로니아 찬가

사람들이 내 글을 읽는 순간 작가는 내 글에 대해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대학에 가서 글을 쓴다. 처음 대학에 들어갔을 때 레포트를 쓸 때 막막했던 경험이 기억이 난다. 나는 한 번도 레포트를 써본 적이 없는데 갑자기 레포트라니... 그동안 찍기에 길들여져 있던 나에게는 큰 고민이었다. 그리하여 자유롭게 내 의견을 썼고 좋은 점수를 받아서 글쓰는 것은 즐거움이었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블로그를 열었었다. 사실, 문학 블로그를 운영하면 많은 사람들이 찾지는 않는다. 동네에 있는 슈퍼마켓과 같은 블로그였다. 하루에 적으면 30명에서 많으면 200명 정도가 오가는 블로그였다. 슈퍼마켓 블로그였고 댓글도 한 달에 한 번 달릴까 말까였다. 그래서였을까? 글을 쓸 때 내가 쓰고 싶은 만큼 쓰고 독자들에 대한 생각 없이 자유롭게 썼던 것 같다. 그러다가 친구의 추천으로 브런치로 넘어오게 되면서 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내 페이지를 구독하는 정기 구독자라는 개념이 생기게 되었다. 그와 더불어 나는 글을 쓸 뿐 브런치는 다음 페이지나 카카오 페이지 혹은 몇몇 독자들이 내 글을 공유를 해준다. 그래서 나는 내 글을 마켓팅을 할 필요가 없으며 글만 잘쓰면 되는 것이었다. 독자수가 늘어남에 따라 몇몇 글은 나도 모르게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당연히 내가 매우 매우 주관적으로 쓴 글이이기에 비판하는 댓글도 있었고 응원하는 글도 있었다. 나는 이 느낌을 비유하자면 일종에 동네 구멍가게 주인이 갑자기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는 느낌이랄까? 조회수와 좋은 댓글을 보면 혼자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관심이 많고 사람들이 많이 볼 수록 비판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었다. 나는 이것이 신선한 충격이었고 글쓰기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의 나는 내 멋대로 글을 써내려 가면 안되는 상황에 놓였다는 것이다.


내 멋대로 쓰지 않는다는 것은 나의 스타일을 버리고 대중들의 입맛에 맞는 글을 쓴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약간의 타협은 있겠지만 내 스타일을 버린다는 것은 곧 내 글에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독자수가 늘어나고 가끔 많은 사람들이 글을 접하게 되는 상황에 놓였다는 것은 글에 대해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글이라는 것은 내 머릿속에 있는 생각이나 신념 등을 글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글이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글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이다. 글을 통해서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요즘은 글을 쓸 때 부담이 크다. 예전에는 맥주 한 캔 먹고 글을 써내려 가면서 어거지로 글을 쓰고 '이건 예술이야' 라고 외쳐던 때는 편했다. 그러나 지금은 한 자 한 자 써내려가는 것이 피를 토하며 글을 쓰는 것 같다. 사실 나는 글쓰는 사람 중에 최하위이고 돌팔이지만 중국의 작가 루쉰이나 조지 오웰 같은 분들의 글을 읽으면 참 멋있다. 그들은 자신의 글로 세상을 바꾸려고 했다. 그들은 그들의 신념을 가지고 세상과 맞서 싸웠으면서 자신들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들은 글자 한 자 한 자를 써내려가면서 그 무게감을 이겨내면서 글을 썼다니 비장감이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의 아큐는 그렇게 무능하지 않다. 그는 영원히 만족해 할 것이다. 이건 어쩌면 중국의 정신문명이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하나의 중거일지도 모른다.

(p133 루쉰 소설 전집, 루쉰 지음 김시준 옮김, 을유문화사)


먼저 루쉰은 자신의 글로 세상을 바꾸려고 했던 사람이다. 그가 쓴 자신의 자서전인 <아침꽃 저녁에 줍다>에서 그는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를 잘 보여준다. 이 자서전이 자신의 삶을 쭉 나열하는 방식이 아닌 10가지 정도의 사건을 아무 연결성 없이 보여주는 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서전이지만 문학적 성격을 가진 자서전이다. 거기서 몇 가지 내용만 뽑아 보자면 그는 중국에서 나름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루쉰은 자신의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무당을 불러온다. 그러나 당연히 중국의 민간신앙이 어떻게 아버지를 살리겠는가? 그래서 아버지는 돌아가신다. 아마도 이것은 루쉰의 인생에서 트라우마로 남았던 것 같다. 그리하여 그는 중국인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병을 고치는 의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래서 그는 일본에 있는 의과 대학으로 유학을 간다. 그런데 여기서 루쉰은 또 한번 머리를 후려 맞는다. 그 당시 일본은 전쟁을 하고 있었는데 텔레비전에서 중국인들을 일본인들이 사형하는 장면이었다. 루쉰은 그 장면에서 기가막힌 모습을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일본인들이 중국인들을 사형시키는데 옆에 있는 중국인들이 사형 당하는 중국인들을 조롱하고 비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루쉰은 글쓰기를 마음 먹는다. 그는 중국을 고치려면 의학을 배워서 육체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고쳐야 한다고 결심을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글을 쓰고 글을 통해 사람들을 깨우려고 노력한다.


루쉰이 쓴 <아Q정전>은 그의 사상을 아주 잘 반영하고 있다. 아큐라는 인물은 중국에서 날품팔이를 하는 30대 남성이다. 그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고 사는데 그는 '정신승리법'이라고 하는 것으로 그들을 무시해 버린다. '정신승리법'의 골짜는 이것이다. 현실 속에서는 사회적 지위나 자신보다 강한 사람에게 저항을 하지 못하지만 그는 정신 속에서 내가 그들보다 더 어른스러우니까 봐준다라는 일종의 합리화이다. 가령, 나보다 학식이 많고 똑똑한 사람이 날 조롱한다고 가정하면 정신승리법은 당신이 못 생겼으니 차라리 당신처럼 못생기게 되는 것보다 잘생긴게 낫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며 살다, 아큐는 샤오디때문에 마을 내의 자신의 일을 모두 빼앗기고 만다. 그리하여, 아큐는 성내로 들어가 거인 나으리의 집에 가서 일을 하고 돈을 벌게 된다. 그 돈으로, 성 안의 중고품들을 사들고와 판다. 그것을 통해 마을 사람로부터 나름 우대를 받게 된다. 자신을 깔보던, 자오집 사람들에게도 나름 인정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런 영광은 다시 사라지고 마을 사람은 다시 그를 바보 취급해 버린다.  그리하여, 아큐는 '혁명'이라는 말을 사람들이 무서워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신도 혁명군이라고, 거짓 소문을 퍼트려, 모든 마을 사람들을 겁에 질리게 된다. 그러나, 혁명의 열기는 점점 시들시들해지고, 자오씨네 집이 털리고 만다. 그 범인으로 아큐가 잡히게 되고, 글을 모르던 아큐는 자신이 자오씨 집을 털었다는 거짓 자백을 하게되고, 성안 사람들이 보는데서 죽음을 맞이한다. 아큐가 죽는 것을 보면서 성안 사람들은 슬퍼하기는 커녕 왜 총살을 하였냐고 불만을 토로한다.


아큐 정전에서 정신승리법을 하는 사람들은 바로 중국의 대중을 비판한 것이다. 중국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땅도 크고,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부심이 컸었다. 그 중국의 자뻑은 중국내 사람들이 모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정신승리법은 자신과 어떤 사건이 터졌을 때 그것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 당시 일본이 처들어 왔을 때도 일본 쪽바리들 무식한 것들이 우리를 침략한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위대하니까 조금 저주다가 다시 일어날 수 있다라는 생각을 했었을 것이다. 루쉰은 이런 중국의 대중들을 정신차리게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아Q정전>을 쓰면서 그들의 사상을 고치려고 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아Q정전>의 아큐는 중국 사람들만을 넘어서 지금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우리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자기 합리화를 많이 하는가? 요즘에 많이 시들해졌지만 독도 문제가 있을 때 일본을 조롱할 줄만 알지 독도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지킬지는 모르고, 정치가 혐오스럽다고 더러워서 피한다고 투표를 안 한다는 것과 같은 것들이 정신승리다. 이렇게 우리의 모습에는 아큐의 모습이 거울을 비추면 보인다.


루쉰의 경우 대중들을 비판하고 그들을 고치려고 했다면 조지 오웰은 전체주의와 맞짱을 뜬 인물이다. 그의 글쓰기는 사회체제를 뛰어 넘어서 그 어떤 사회체제든, 전체주의의 속성을 가진다면 그것에 대해서 저항을 해야한다는 것이 그가 글을 쓰는 이유였다. 그가 쓴 <동물농장>에서 사회주의 체제가 이상적이지만 나폴레옹을 위시한 몇몇 돼지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사회주의는 독재체제를 옹호하는 체제로 전락되어 버린다. <1984>에서는 정권이 언론을 통제하면서 모두를 감시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오웰은 자신의 글쓰기로 끝없이 세상의 모든 전체주의를 고발해 왔다. 그래서인지 그의 글은 낭만적이기보다 매우 현실적이면서 딱딱해 보인다.



그가 쓴 <카탈로니아 찬가>는 스페인 내전을 참가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만들어 버렸다. 그가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이유는 자신이 글을 쓸 뿐아니라 자기 자신도 자신의 글에 책임을 지는 것처럼 전체주의와 싸움을 했던 것이다. 그는 사회주의 신봉자였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는 매우 이상적이었으니까 말이다. 그 당시 많은 지식인들은 사회주의가 최고의 정치체제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는 전쟁을 하면서 사회주의 체제에 대해서 회의를 느낀다. 사회주의 체제도 전체주의로 변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정권들도 그 사이에서 권력 암투가 있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권력을 가지기 위해서 더러운 짓을 하기 때문이다. 그는 회의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렇게 작품이 끝났다면 '카탈로니아 비극' 정도로 제목이 붙여졌을 텐데 그곳 가운데서 그는 희망을 바라보게 된다. 책의 첫 부분에서 오웰은 말은 통하지 않는 이탈리아 군인을 만나고 그에게 뭐라 말할 수 없는 동지애를 느끼게 된다. 그와 악수를 함으로 되게 좋아하는데 솔직히 처음에 보면 이 부분은 놓이기 쉽지만 아주 의미심장한 장면이다. 작가가 그 장면을 앞에다 배열한 것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책이 마지막에 갈 때 그의 동료가 잡혀가게 되는데 상대방은 오웰과 완전히 다른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오웰은 자신의 친구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그의 친구를 살리게 된다. 그때 오웰의 친구를 잡고 있던 간부와 오웰은 악수를 하게 되는데 그 악수는 바로 이데올로기는 다르고 국적도 다르기는 하지만 적어도 그들의 공통분모는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공통 분모를 통해서 오웰은 희망을 보았던 것이다. 소설의 맨 앞 부분에서 이탈리아 군인에게 끌렸던 이유도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 간의 악수이다. 그들은 인간이기 때문에 악수를 하고 화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오웰은 아마도, 언젠가는 그가 꿈꾸는 이상이 체제를 뛰어넘어 그 전체주의를 무너트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진심을 통한 화해로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 같다. 참 멋있는 장면이다.



이처럼, 조지 오웰이나 루쉰은 자신들이 겪은 삶을 통해서 신념을 가지게 되었고 그 신념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글을 썼었다. 이처럼 글쓰기라는 것은 목숨을 거는 것이다. 글쓰기에는 두 가지 면이 있다고 하는데 하나는 글을 통해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잠자는 사람들을 깨우는 역할이다. 글쓰기는 어떤 한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글은 권력을 위해 이용당할 수도 있다. 나도 이 글을 쓰면서 다시 깨닫지만 글을 쓰는 사람들은 글의 무게감을 느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글을 쓰고 많은 사람들이 글을 읽고 자신을 알아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나도 빠졌던 함정이지만 그 인기만큼 책임감을 느끼지는 않는 것 같다. 아무리 개인 블로그라도 그것을 사적이라고 방어막을 칠 필요는 없다. 많이 읽힌다는 것은 그때부터 작가는 자신의 글이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자리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들은 자신의 글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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