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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Jan 28. 2016

가깝지만 잘 알지 못하는 상상력

질베르트 뒤랑의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을 통해 상상력을 파헤치다 !

La persistencia de la memoria


상상력이란 무엇인가?


누구나 상상력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너무나 추상적이고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난해함에 부딛히게 될 것이다. 질베르트 뒤랑의 관점에서 상상력을 정의하자면 상상력이란, 객관성에 대한 주관성의 회복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상징적 존재이다. 즉, 나의 존재의 원리를 풀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객관이라는 원칙으로는 풀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상상력이 도입이 되면, 상상력을 중심으로 개별적인 주체성으로 하나로 모든 것을 묶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양의 사고를 기본으로 한 합리주의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서양의 합리주의는 이성을 중심으로 모든 세계를 바라보는 세상이다. 쉽게 말하면 이성의 능력에 따라 사람을 차별화하고 서열화시키는 것이다. <방드르디, 태평야의 끝>을 보면 서양인을 상징하는 로빈슨 쿠로스가 방드르디를 교육시키는 부분이 있다. 로빈슨은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방드르디를 미개하다고 치부를 하고 인간을 개발하고 미개하니 교육을 시켜 (서양의) 인간으로 만들자는 내용이다. 과거에는 신이 존재하는 세상이었다. 하지만, 르네쌍스 시대 이후 그 신의 자리를 인간과 인간의 이성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는 서구가 이룩한 사회로, 서양의 사회가 기준이 되며, 이성적이지 않고 이성적으로 사고하지 않는 사회를 미개한 사회로 계층화 시켜버렸다. 하지만, 이것은 '미개하다' 의 이분법으로 인해 다른 것을 제거시켜 버렸다는 문제를 발생시켰다. 이런 사고에서 바슐라르와 질베트르 뒤랑은 상상력을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상상력이라는 것, 신화라는 것은 모든 세계에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상력이라는 것이 보편적 인류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고로, 보편성을 찾기 위해서 주관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류학적 보편성이라고 이야기를 했으니,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에 대해 묻게 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 차이는 동물과 인간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아야 할 것이다. 합리주의의 관점에서 인간은 동물성을 제거해야 진정한 인간으로 보았다. 하지만, 인간은 동물성을 가질 수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상징을 강조하는 이유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제일 미성숙한 존재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인간은 동물로서 태어날 때, 동물보다 못하다. 동물들은 태어났을 때, 몇 시간 후면 걸을 수도 있고 홀로 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기들의 경우 그렇지 못하다. 하지만, 인간과 동물의 직접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 언어학의 기표와 기의를 가져와야 한다. 이를 욕망의 예로 알아보면 더 명쾌히 알 수 있을 것이라 본다. 가령, '먹는다'는  욕망이 있다면 욕망과 욕망의 표현이 일치하는 것이 바로 동물이다. 하지만, 인간은 욕망과 욕망의 표현이 각각 다르다. 이런 욕망의 표현, 기표의 차이가 인간을 다양하게 만든다. 이런 기표의 차이는 환경적인 요소가 많은 영향을 준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기표와 기의가 완전히 붙어있는 동물의 상태는 아니고, 적당하게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표와 기의의 그 사이에 상징이라는 것이 들어간다. 그 상징 속에 인간의 상상력이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제 인간에 대해 알게 되었으니, 인간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해서 알아볼 차례이다. 


이원론 : 두 항 사이에서 그 둘을 아우르거나 통일시킬 수 있는 어떤 상호관계도 발견할 수 없거나 아니면 발견해내려는 의지가 없는 경우


일원론 : 이질적인 것들이 일체감을 가지고 보다 큰 통일성 안에서 하나가 됨을 느끼는 것


다원적 인식 :  다양한것들 사이에서 동일한 모태를 보고 그 근본을 찾는것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이원론적 관점과 일원록적 관점이 있을 것이다. 네이버에서 일원론과 이원론에 대해 많은 오해를 가지고 글을 쓰는데, 그 오해는 이원론과 다원주의를 엮어서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이원론의 경우 쉽게 예를 들자면 빛과 어둠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빛이 완벽한 존재를 가지기 위해서는 어둠을 제거해야 한다. 즉, 어둠과 공존은 불가능하고 어둠을 몰아내야만 빛이 완전성을 가진다. 그에 비해, 일원론은 빛과 어둠이 있다면 빛과 어둠이 서로 공존이 가능하고 서로의 완성을 위해서 서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 따라, 이원론이 다원적 인식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원론이 다원론적 사고를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일원론과 이원론의 차이를 보았듯이 제일 중요한 것은 두 항 을 어떠한 관계로 보느냐가 정말 중요한 것이다. 이런, 이원론적 사고를 보여주는 것은 바로 데카르트이며, 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인간의 존재 자체가 이성 그 자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 비해, 파스칼의 팡세를 보면 그는 생각한다는 것이 저 위의 거대한 우주를 바라보니 내 자신이 비참해짐을 배우는 것이다. 즉, 꿈이 클수록 자신의 거대한 우주 안에서 인간이란 존재가 먼지와 같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 둘의 차이점은 데카르트의 경우 인간의 이성만 완전하다면 인간이 완전하지만 그에 비해, 파스칼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생각하는 갈대처럼 나약하니 더 큰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파스칼의 이런 생각은 안간이란 나약하지만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Chu Jian Ou - MusicScore


19세기 이후 실증주의가 세상에 판을 치면서 인간의 자만심은 하늘을 찌른다. '모든 것이 인간의 힘으로 가능하다'는 구호 아래 서양은 합리주의와 이분법으로 세상을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이때, 이런 세계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 바로 프로이트였다. 그는 범성주의와 오이디푸스 컴플랙스를 주창하며, 인간이라는 존재가 외부적으로 욕망에 대한 표현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변장한 욕망은 꿈으로 나오게 된다. 그는 정신분석학에서 성적 욕망을 리비도로 표현했는데, 인간이라는 존재가 사회에서 생활하기 위해서는 욕망을 감추는 리비도가 변장술을 터득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리비도가 변장술을 터득하기 이전에 상처를 받으면 리비도가 도망가게 되고, 이는 정신병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그의 주장에는 많은 비판할 점이 있다. 하지만, 그가 상상력에서 업적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내부에 있는 어둠(욕망)에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프로이트의 제자 융은 노장사상과 불교에 영향을 받으며, 프로이트의 학설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인간에게는 집단무의식이 존재하며 인간 내부에는 원형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원형이란, 인간이 가지는 공유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원형의 예로, 우리는 새라는 원형있다고 치면, 새에는 원형에 제일 가까운 참새를 생각할 것이고 계속 이야기하다 보면 까마귀, 타조, 팽귄까지 생각을 할 것이다. 원형이라는 것은 참새가 가지고 있는 전형들을 묶은 것이다. 새라는 원형에 중심에 놓는다고 가정을 한다면 까마귀는 참새보다 크고, 타조와 팽귄은 날 수가 없다. 하지만 새라는 원형에 몇 가지 요소를 공유하기 때문에 새의 범주에 들어간다. 이처럼 인간도 인간이라는 원형이 존재하고 그 안에 남자, 여자, 어린아이, 노인 등으로 나뉠 수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이라는 존재는 다양하다는 것이다. 융은 인간의 잠재의식을 아니마(여성성)과 아니무스(남성성)으로 나누었는데,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서로 제거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내부에 둘다 존재하며, 어떤 것이 더 잘 표출되냐에 따라 여성성과 남성성이 보인다. 가령, 교회 오빠의 경우는 아니마가 더 잘 표현된 예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융은 이와 더불어 페르소나(가면)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데, 이는 사회에서 용인되는 가면을 이야기한다. 페르소나의 반대되는 경우로 옴브르(ombe)는 활성화되지 못한 영역을 이야기한다.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서로 융합하면 그것은 인간의 개성을 발생시킨다. 프로이트의 경우, 그는 리비도가 변장술을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리비도가 변장술을 고치는 것이 초점이었다면, 융의 경우 정신병은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균형을 맞추는 상태이다.


바슐라르의 상상력


상상력의 문을 연 사람은 바로 바슐라르이다. 그는 원래 과학철학자로 데카르트까지 비판을 했던 사람이다. 그의 비판으로 데카르트는 객관적 진리가 있다는 믿음에서 시작을 했다. 하지만, 바슐라르는 객관적 진리가 있다는 객관성에도 오류가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인간의 어떤 부분이 오류가 있느냐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인간의 모든 오류를 파해치기 시작한다.  그의 저서 <불의 정신분석학>에서 그는 불이 인간의 오류를 제일 많이 만든다고 보았다. 이를 계기로 그는 그 오류가 상상력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고 인간의 오류를 만드는 상상력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는 이를 통해 단절과 감싸기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과학의 발전에서 과학이라는 것은 각 세기 마다 사상이 있지만 그 이전의 사상들과 단절점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단절 속에서 이전의 과학 사상들은 그 이후의 과학 사상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를 통해 인간의 주체를 생각하는 자아와 상상하는 자아로 나누고 이는 인간의 내부에 공존하는 것으로 보았다. 즉, 인간에게는 객관적인 면과 주관적인 면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즉, 그는 인간의 내부에 신화와 상상력이 존재하며 이런 관점에서 서양의 합리적인 사고 또한 인간의 하나의 특성이기 때문에 그것을 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이런 바슐라르의 사고는 앞에서 말한 일원론적인 사고이며 이는 다원주의적 사고로 볼 수 있다.



바슐라르의 제자 질베르트 뒤랑은 바슐라르의 이런 사상을 받아들이고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를 탄생시킨다.


영웅적 구조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인간의 동물성이다. 인간의 상상력은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는데서 시작을 하였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을 받아들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인간은 시가과 죽음을 상징화시켜 버렸다. 첫번째로 말의 이미지인데, 말이라는 것은  예측 불가능한 움직임과 소리 없이 사라지는 특성을 가지는 시간을 말로 변형한 것이다. 이런 질주하는 이미지는 황소, 염소, 맷돼지 등으로 변영되기도 한다. 이런 달리는 이미지에 찢음의 이미지로 또한 변형이 되는데 그것은 동물의 아가리를 통해 실현이 된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동물은 바로 늑대 이다. 많은 영화에서 늑대인간을 보시면 알겠지만, 늑대인간은 평소에 인간이지만 달을 보면 야수로 변신해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늑대인간의 예에서 늑대인간은 밤에 달을 보면서 변신을 합한다. 사람들은 밤이라는 이미지가 어두움과 부정적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이런 밤이 부정적 이미지를 보이는 것은 바로 빛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부정적 이미지들은 여성성과 연결이 되는데 그것은 바로 월경 즉 생리를 하기 때문이다. 생리라는 것은 다산의 상징이며, 다산이라는 것은 동물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월경의 피라는 것은 불순한 것이다. 월경과 연결이 되는 것은 바로 달이다. 달은 다양한 이야기에서 식인을 하며, 살인을 한다. 이런 달의 이미지는 마녀, 노파, 사이렌과 같이 팜므파탈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데 이것은 종합하면 이런 존재들은 남성들을 파괴하는 존재다.

인간이 이런 동물성을 지니게 된 것은 바로 추락의 이미지와 연결이 된다. 추락은 인간의 최초의 공포로 추락과 이미지를 같이하는 것은, 간음,질투, 분노, 우상숭배와 같은 것들이다.

이런 간음, 질투, 분노, 우상숭배를 하나로 추상화시키면 그것은 바로 죄로 이어진다. 인간의 죄는 바로 에덴동산에서 뱀의 꼬임에 넘어가 하와가 아담을 꼬셔 선악과를 먹게하고 인간은 신으로부터 죄를 받게 된다. 첫번째로, 에덴동산에서 인간은 추방된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의 추방은 영원성에서 유한성으로 추락한 것이다. 즉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두번째로, 남자는 노동을 하게 되고 여자는 출산을 하게 된다. 이런 여성의 출산의 고통은 바로 인간의 동물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이런 관점에서 인간은 자신의 동물성을 같이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제거해야할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이제 다음으로는 인간의 동물성을 제거하기 위한 빛의 속성을 보아야 할 것이다. 앞에서 인간에게 추락이 있다면 그것의 전제는 바로 수직구조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추락할 수도 있지만 상승을 할 수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수직성의 상징들을 보면, 첫번째로 산이 있고 그 산이라는 존재는 바로 남성성을 의미한다. 또한 날개도 상징의 욕구를 잘 보여준다.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떨어진 것을 추락이라고 하면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가 되고 유한한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면, 그 반대로 하늘이라는 존재는 절대화, 지배력, 상승과 권력, 머리에 대한 숭배를 잘 보여준다. 이런 것을 잘 보여준 것이 바로 플라톤의 철인 통치라고 생각이 된다. 플라톤은 정치체계를 세 구조로 나누었는데, 머리 부분은 철학자 가슴은 군인 그리고 마지막 하체 부분은 노동자들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철학자 즉 합리적 이성을 가진 존재가 지배하는 세상이 옳은 세상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성 진리와 같은 것은 비유적으로 빛과 함께 한다. 이런 빛은 하늘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늘에서 절대자가 사람들을 보고 있고, 절대자와 사람들 사이에는 거리라는 것이 생긴다. 즉, 절대자와 인간 사이를 이분법적으로 나눈 사고라고 보면 될 것이다. 이런 거리두기의 개념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의 단절을 의미한다. 즉, 어둠은 제거되어야 하고 소멸되어야 할 것으로 보여진다. 그래서 많은 신화에서 영웅들은 검을 가지고 있으며 검으로 괴물들을 제거해 버린다. 검으로 괴물 즉 동물성을 제거한다는 것이다. 즉 영웅적 구조는 이원론에 근간을 둔다.



신비적 구조와 유기적 사고


신비적 구조는 되돌아감과, 하강에 의해서 획득이 된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평온했던 시절, 즉 어머니의 자궁으로 들어가는 행위와 같은 것이다. 이런 하강은 이상향으로 가는 하나의 길이다. 

인간의 하강의 꿈은 태어난 곳으로의 귀환의 꿈인 동시에 일시적이고 유한한 인간 조건에 순응하고 적응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순응을 통해 공포를 이겨낸다. 또한 신비적 구조는 인간의 몸인 동물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사랑한다. 내면으로 하강한다는 것은 부드러운 것에 감싸인다는 것이다. 이런 내면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안식처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즉, 이는 영웅적 구조에서 먹혀서 죽는 것과는 극명한 반대를 보인다. 이는 요나 컴플랙스에서 요나가 물고기의 배로 들어가는데 이 물고기는 원초적 본능의 회귀이다. 물고기의 동물성은 다시 다산성으로 연결이 된다. 이는 또한 밤으로 이어진다. 신비적 구조에서 밤이라는 곳은 조용한 곳이며, 거룩한 곳이 되어 버린다. 궁극적으로 밤이라는 곳은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어머니의 품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런 밤에 대한 인식의 변화로 여성에 대한 상징이 바꾸게 된다.  이렇게 되면 죽음이라는 시간성은 긍정적으로 바뀌게 된다. 이는 대지로의 귀환이며 영원한 휴식이 되어 버린다. 신비적 구조라는 곳은 궁극적으로 내면성의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상상력이라는 것은 다양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은 상상력 (지극히 주관적인 것과 환경간의 상호작용) 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상상력이라는 것은 하나의 거대한 원리를 가지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상상력의 창조라는 것은 바로 대상과 내가 어떻게 만나 관계를 어떻게 만드느냐에 달린 것이다. 이것은 유기적 사고와 연관이 되어 있다. 유기적 사고란, 전체는 그 전체의 일부를 이루는 부분들 속에 있다는 사고이다. 유기적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더 큰 원리를 바라보는데서 시작이 되는 것이다.


인문학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최근에 시사 프로그램을 보면 한국 교육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한국의 교육의 문제는 끝없는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경쟁의 연속이다. 사회는 인간을 시험보는 인간으로 만들며, 답찍는 기계로 만든다. 대학 또한 지금은 취업 양성소로 전락한지 오래이다. 그렇다면, 대학의 진정한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생각하는 사람을 만든다는 것이다. 학원과 대학을 비교해 보면 학원은 답을 내는 법을 가르친다. 그에 비해, 대학은 어떤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고, 가끔은 답이 없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곳이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답이 있어야 하고 생각하기 보다는 답만 찍고 취업만 잘 하는 세상을 만들고 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인문학은 매우 중요하다. 모든 회사에서 인문학적 소양이 있는 사람을 찾는다고 하지만 그 뒤의 문제에는 붙여야 할 것이 있다. 돈을 벌 수 있는 인문학이다. 즉, 어떤 기술을 가지고 인문학적 소양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렇기 때문에, 지금 사회에서는 인문학을 단지 수단으로만 생각을 한다. 내가 대학에 와서 놀란 것은 대부분이 단어를 외우고, 교수님의 취향에 맞게 답을 써나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강의 중에도 대학에서 배울 만한 과목들도 있었다. 이런 대학에서 배울만한 과목들은 책을 읽고 토론을 하고, 학생 스스로가 어떤 문제에 사고할 수 있게 만드는 수업이었다. 나는 솔직히, 한국의 대학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학부 내내에는 책 100권을 읽는데 그런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든다. 책 100권을 읽는 것이 교양을 쌓는 수준이 아니라, 책을 혼자 이해하고 교수님들이 그 책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시며 이와 더불어 그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만드는 이상적 수업말이다. 지금이 대학은 그렇지 못하지만 이런 문제의식을 가진 학생들이 많아져서 바꾼다면, 취업양성소가 되어 버린 대학이 다시 지식의 창고로 변하지 않을까 생각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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