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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May 13. 2017

나도 매 번 예수의 얼굴을 밟습니다...

<침묵> 엔도 슈사쿠, <사일런스> 영화 리뷰

영화의 스포일러와 종교적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사일런스>라는 영화는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영화를 보면서 많이 먹먹했고 원작 소설을 읽으니 더 마음이 막막했다. 교회를 다니며 생각하는 것이 있다. 세상은 악인으로 가득차있고 오히려 선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다. 오히려 선한 사람들이 패배하는 것 같아 보일 때도 있다. 선한 사람들이 고통 받을 때,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은 한 번이라도 안 해본 신자가 있을까? 한 때,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우울증이 약간 왔을 때 하나님을 원망했을 때가 있었다. '내 주위 사람들은 하나님도 믿지 않고 잘 되는데 나는 열심히 믿는데 왜 이렇게 고통을 주냐'고 분노하며 기도했을 때도 있었다. 사실,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느끼는 하나님의 침묵이라는 것은 마치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무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런 답답한 사람들에게 <침묵>은 하나의 답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소설의 내용은 페레이라 신부가 배교를 했다는 사실을 듣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로드리고 신부와 가르페 그리고 마르타는 자신의 신앙을 성장시켜준 페레이라 신부가 일본에서 배교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일본으로 선교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마카오에서 마르타는 병에 걸려 일본행 선교를 포기하고 로드리고와 가르페는 일본인 기치지로를 만나 일본으로 몰래 들어간다. 기치지로는 찌질한 인물로 묘사되는데 성화를 밟기도 하고, 로드리고 신부를 팔아 넘기기도 한다. 그렇지만 기치지로는 계속 로드리고 신부를 배회하며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를 반복한다. 일본 영주에게 잡힌 로드리고 신부는 카톨릭을 등질 것은 계속 강요받으며 온갖 회유를 당한다. 마지막에 배교한 페레이라 신부를 만나게 하며 갈등을 한다. 마지막 회유로 로드리고 신부는 자신이 배교하지 않으면 사람을 죽이겠다는 영주의 협박에 굴복하여 성화를 밟고 배교를 한다. 그리고 일본인 이름을 갖고, 일본인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 <침묵>의 큰 줄거리다.



예수와 가롯 유다 그리고 베드로


사실 <침묵>이나 <사일런스>의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성경에 대한 지식이 조금은 있어야 한다. 우리가 아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명령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을 어기고 아담과 이브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된다. 여기서 아담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우리는 원죄를 가진 존재가 되었다. 비기독교인들이 보기에 이는 어이 없고 미친 소리 같지만 기독교의 핵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를 전제로 믿어야 한다. 성경의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죄를 씻기 위해서 제사를 드렸다. 어린 양의 피를 통해 정결한 의식을 죄를 지을 때마다 행해야만 했다. 하지만, 신약이 시작하는 예수님의 탄생 이후 이런 제사는 사라지게 되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자신이 받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의 원죄가 씻기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부활하여 하늘로 돌아가시고 성령을 우리에게 전해주셨다.


이와 더불어 <침묵>을 조금 더 잘 보려면 예수의 열 두 제다 중 가롯 유다와 베드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예수의 제자들은 모두 예수가 불러 주었다. 베드로는 어부였지만 어부 일을 그만두며 자신의 가족까지 버리고 예수를 따랐던 사람이다. 마치 기치지로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사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기 전까지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를 정치적 메시아로 생각했다. 로마의 지배를 받는 이스라엘 민족의 꿈은 바로 정치적 메시아가 등장해 로마를 무너트리고 자신들의 나라를 세우기를 원했다. 그러나 예수는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었다. 베드로는 호기로운 사람이다. 자신은 절대로 예수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한다. 하지만 예수는 베드로에서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베드로가 세 번 자신을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가 가롯 유다의 밀고 때문에 잡혀가게 될 때, 예수의 제자들 모두가 예수를 버리고 도망쳤다. 심지어 베드로는 예수님은 세 번 부인했다. 가롯 유다는 은화 30냥에 자신의 스승을 팔았던 것에 죄책감을 느껴 자살을 했다. 나중에 부활한 예수를 본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서 회개를 하고 교회의 반석이 되어 순교까지 하게 되었다. 예수를 배신했던 베드로와 가롯 유다의 두 행보가 다른 것이 참 아이러니다.



기치지로... 그는 베드로일까 아니면 가롯 유다일까


저는 배교자도, 그렇고말고요. 그렇지만 10년 전에 태어났다면 선량한 카톨릭 신도로서 천국에 갔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배교자로서 신도들에게 멸시받지 않아도 되었겠지요. 그러나 박해받을 때 태어났기 때문에...... 원망스럽습니다. 저는 원망스럽습니다. (침묵, 홍성사, .P.180)


이 세상에는 말입니다. 약한 자와 강한 자가 있습니다. 강한 자는 어떤 고통이라도 극복하고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만, 저같이 천성이 약한 자는 성화를 밟으라는 관리의 고문을 받으면...... (침묵, 홍성사, .P.293)


사실, 많은 사람들이 로드리고 신부의 갈등에 중심을 두지만 우리가 진짜로 중점을 두어야 할 인물은 바로 술주정뱅이 기치지로다. 로드리고 신부는 배신과 회개를 계속하는 기치지로를 보면서 '예수와 가롯 유다'의 관계를 생각한다. 기치지로는 정말 답 없는 인간이다. 신부를 밀고하고 팔아 넘기고 또 예수의 성화를 밟는 것, 이것은 마치 기독교인에게 성경책을 밟으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기치지로는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하지만 매 번 하나님을 등지는 모습을 보인다. 로드리고 신부는 기치지로를 계속 가롯 유다로 생각했다. 가롯 유다는 예수를 팔아 버리고 회개를 하지 않았다. 회개는 바로 하나님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자신이 나약하고 어리석은 존재라는 것을 솔직히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죽기 이전까지 자신의 죄를 자신이 지고 갔다. 예수가 가롯 유다를 자신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이용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이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예수는 가롯 유다를 사랑하셨다. 그를 제자로 불어 주었고, 회계 업무를 보개 했고, 향유(그 당시 향유를 깨는 것은 몇 백만원을 날리는 것과 같았음)를 깨서 예수님의 발을 씻기는 여인을 통해 가롯 유다의 욕심에 대해 꾸짖으셨고, 최후의 만찬에서 직접 유다에게 배신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수 자신을 판 잘못을 뉘우치며 유다가 돌아오길 바랬다. 예수는 가롯 유다를 만나고 유다가 죽기 전까지 그가 하나님께로 돌아오길 기다리셨다. 그러나, 유다는 그러하지 않았다. 


베드로는 예수를 부인했다고 하는데, 사실 베드로나 유다나 똑같다. 하지만 베드로가 달랐던 것은 유다처럼 죄를 지었지만 종국에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그 이후 예수의 복음을 전하러 전도 여행을 하고 마지막에 순교당했다. 엔도 슈사쿠가 밝히기에, 기치지로는 베드로를 모티브로한 인물이다. 그런데, 기치지로가 내 눈에 더 들어왔던 것은 기치지로라는 인물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처럼 행동한다.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나도 승리하고 싶고, 나도 많이 가지고 싶고, 나도 높이 올라가고 싶다. 언제나 내 마음에는 내 자신이라는 우상을 만들며, 예수의 얼굴을 외면한다. 한 조사에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구분하는 유일한 것은 담배를 피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외에 그리스도인들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 나를 포함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서 거룩해지고 죄를 짓지 않겠다고 기도드리지만 월요일부터 탐욕과 남을 비방하고 쉽게 분노한다. 기치지로의 개 같은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신을 믿는다고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편의에 따라 하나님의 얼굴을 밟는다. 하나님의 얼굴을 밟고 다시 회개하고 우리는 모두 기치지로다. 



로드리고 신부의 배교


신부는 발을 들었다. 발이 저린 듯한 무거운 통증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형식만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전 생이를 통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 온 것, 가장 맑고 깨끗하다고 믿었던 것, 인간의 이상과 꿈이 담긴 것을 밟는 것이었다. 이 발의 아픔, 그때, 밟아도 좋다고, 동판에 세겨진 그분은 신부에게 말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부가 성화에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멀리서 닭이 울었다. (침묵, 홍성사, .P.267)


로드리고 신부가 배교하는 모습을 보며 두 가지를 생각했다. 첫번째는 신부나 목사나 모두 인간일 뿐이라는 것...... 두번째는 십자가의 아름다움이다. 첫번째로 우리는 신부나 목사님에 대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그들은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심지어 '목사나 신부라도 죽음 앞에서 순교를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해본다. 당연히 순교를 했던 신부, 목사님도 계시지만, 내가 그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그 결정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처음에 로드리고 신부의 모습이 비겁해 보였다. 그런데,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나는 순교를 못할 것 같고, 나도 배교를 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엔도 슈사쿠는 신부들의 배교를 보여주면서 독자들을 충격으로 몰아 넣는다. 그런데, 이 맥락을 보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인간의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다윗 왕이 하나님의 말을 어겨 제사를 드리는 모습으로 끝나는 장면,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성경의 장면을 보여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무리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도 무너지기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비해 인간은 나약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 자신이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기치지로가 이야기 했듯이 바로 인간은 약한 존재다.


<침묵>이라는 소설에서 과연 하나님은 침묵하셨을까. 자신의 독생자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괴로워 하는데도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죄가 사라지게 되었다. 아버지가 아들이 눈물 흘리고 괴로워 하는 모습을 보며 침묵하는 것이 과연, 사이코패스여서 그럴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하나님은 듣고 계신다. 내가 시험에 떨어져도 옆에 계시고, 내가 아파도 옆에 계시고, 내가 슬퍼해도 옆에 계신다.  그러며 하나님은 인간의 아픔을 공감한다. 인간의 죄를 대신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는 그 아버지의 모습은 마치 손양원 목사님이 좌익 세력에게 두 아들을 잃고 아들을 살해한 사람을 용서하는 것과 비슷하다. 당연히 기독교 신앙이 어이없고 신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당연히 믿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만, 나는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한다. 가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모습, 절대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모습을 볼 때는 나는 생각한다. 신은 존재한다.



우리는 모두 로드리고 신부이고 기치지로다.


많은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면 로드리고 신부처럼 거룩한 삶을 영위하려고 하지만 기치지로처럼 우리는 예수를 등진다. 이것은 인간 본성의 문제로 인해 그럴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내가 의미있게 본 것은 기치지로가 마지막에 순교를 했다는 것이다. 언제나 배신하던 기치지로 그러나 그 잘못을 뉘우치며 용서해달라고 울부짖는 기치지로..... 배신하는 기치지로를 언제나 받아들여주고 사랑해주는 것이 기치지로를 바꾸게 만든 것이 아닐까......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해주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신의 본질은 사랑이다.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우리가 사랑할만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한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명령은 이웃을 넘어 정말 나를 배신하고 욕하는 사람까지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한다.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참 쉽지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미래가 궁금하다. 나는 기치지로처럼 정말 순교할 만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


아래는 목차입니다!!!!!!!!!


오늘 대통령이 탄핵되었다. 어쩌면 어제였나, 나는 모르겠다. 

서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며 
12 압구정동 :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는 중입니다 
22 강남대성학원 : 답을 잘 찍는 사람이야말로 승자다 
30 N타워 : 나는 죽지만… 너는 살아… 왜냐하면… 
38 신촌 : 아프니까 왜 청춘이냐 
46 강남역 : 아침에는 영어 학원으로 
54 경복궁 : 설현은 안중근 의사를 몰라서 눈물을 흘렸어 
61 대학로 : 김제동의 농담 
68 한국은행 : IMF 이후 한국에 등장한 근대적 인간들 
75 KBS 방송국 : 셀카 찍는 사람들의 고독 
83 광화문 교보문고 : 1년에 한권도 읽기 힘든 당신에게 

서울 속의 우리에 관하여 
94 강남역 : 무차별 살인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 
102 K-Star Road : 대중들은 아이돌을 고르느라 샤샤샤 
109 종로 3가 : 어느 개저씨의 죽음 
116 잠실 롯데월드 : 헬리콥터 맘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 
124 쉑쉑버거 강남역점 : 힐링사회의 그늘 
132 청담동 유흥업소들 : 강남패치와 희생양 
140 홍익대학교 : 홍대 앞에 나타난 거대한 일베 조각상 
147 서울시립미술관 : 이게 미술이냐 
153 선릉역 : 결국엔 무엇이 남을까 
162 광화문 광장 : 광화문 광장에서 희망을 보다 

서울을 넘어 대한민국을 바라보며 
174 서울대학교 : 대학은 학문하는 사람을 키우는 곳이다 
181 구룡마을 : 인생을 포기하게 만드는 나라 
188 삼성동 한전 부지 : 정부는 국민의 생명을 지킬 권리가 있다 
195 JTBC 방송국 : 직업으로서의 기자, 소명으로서의 기자 
202 여의도 국회 의사당 : 시인이 정치인이 되는 사회 
209 여의도 증권가 : 한국형 블랙프라이데이가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 
217 서초동 사랑의 교회 : 사랑의 그 무게 
225 서초동 대법원 : 나의 위선의 가면이 진실된 가면이 되길 
232 신림동 : 국민을 광인이라고 배제시키지 말라 
240 서울시청 앞 광장 : 나에겐…… 우리에겐 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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