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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Jun 02. 2017

우리는 분노한다 그래서 희생양을 만들어라!

<희생양 르네지라르>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가? (욕망의 삼각형)


우리는 명품백, 좋은 대학과 같은 것을 원할 때 내가 이들을 욕망하기 때문에 욕망한다고 보았다. 우리가 셱셱버거를 줄을 서면서 욕망하는 것은 내가 원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르네 지라르는 이것이 인간의 착각이라고 하고 지라르식으로 이야기하면 이는 '낭만적 거짓'이라고 지칭한다. 하지만 우리가 셱셱 버거를 먹으로 갈 때 줄을 서는 이유는 중개자 가령, 미디어, 뉴스 기사, 옆의 친구의 경험담 아니면 셱셱 버거집 앞에 줄을 선 사람들의 모습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그렇다. 지라르는 우리가 욕망하는 '대상'을 직접 욕망하기 보다는 그 사이의 중개자 때문에 욕망한다고 보았다. 우리가 셱셱버거를 원하는 것은 타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잘 생각해보면 우리는 뉴스나 친구, 블로그와 같이 햄버거를 모범적으로 욕망하는 사람이나 이를 실현한 사람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서울대학교를 가고 싶다고 하는 것을 잘 생각해보면 아이들이 서울대를 어떻게 알 것인가. 그러면서 모두 서울대학교에 간다고 외친다. 아이들의 중개자는 누구인가. 옆의 공부 잘하는 친구일 수도 있고, 서울대를 나와 성공한 사람일수도 있고, 부모의 권유일 수도 있다. 즉, 르네 지라르는 인간이 욕망하는 것이 사실은 중개자의 욕망을 모방한다고 보았다. 매우 설득력 있는 이론이다.


여기서 지라르는 매개자를 두 가지 케이스로 나누었다. 케이스를 나눈 기준은 바로 '거리'다. 내가 매개(자)와 거리에 있느냐에 따라 라이벌 관계가 되는지 아닌지를 측정하려고 한 것이다. 외적 매개는 동경의 대상이 될 뿐이다. 가령, 우리가 아인슈타인을 매개로 한다고 하면 우리는 아인슈타인에게 아무런 라이벌 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이미 고인이기 때문이다. 그의 업적을 동경할 뿐이다. 우리가 재벌을 매개로 한다면 한국에서 재벌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재벌과 같은 부를 축적할 수 없다. 라이벌 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치, 아인슈타인과 재벌은 나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문제는 내적 매개다. 내적 매개(자)는 나와 거리가 가깝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이 있다. 사촌은 나와 비슷한 또래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방점은 사촌이 땅을 산 것이 아니라 땅을 산 사촌이 미운 것이다. 재벌이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하지만 사촌이 산 땅은 내가 노력하면 나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내적 매개는 동시대에 살고, 내 주위에 있으며 그와 경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르네 지라르가 지적하는 것은 외적 매개일 때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지만 현대 사회는 내적 매개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고 보았다.


신자유주의를 살고 있는 우리는 홉스의 말처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에 돈을 값을 매겨 버렸다. 우리가 돈을 가지고 있다면 시장 안에서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욕망의 대상이 다양했지만 그것이 가격으로 획일화 되었다. 가령, 연필과 핸드폰 중에 무엇이 가치가 있을까? 우리는 이 둘의 가치를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시장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연필을 던져 버리고 핸드폰을 선택할 것이다. 왜냐하면 핸드폰이 훨씬 비싸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시대는 모든 매개는 돈과 돈을 가진 사람이 되었고 욕망하는 대상은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가격화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 갈등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기 때문에 내 라이벌이 아이폰이나 명품백을 들면 나도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다는 믿음에 따라 같은 것을 욕망한다. 현대인의 욕망은 같다. 모두가 좋은 대학에 가고 싶고, 비싼 밥을 먹고 싶어하고, 명품을 소비하고 싶고, 좋은 차를 몰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나의 친애하는 적이 먼저 소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를 불안하게 만든다. 재화라는 것은 한정 되어있기 때문에 누군가가 돈을 많이 가진다면 누군가는 돈을 많이 못 가진다. 당연히 같은 것을 욕망하는데 먼저 선점하는 사람이 왕이다. 그래서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 간의 갈등이 발생한다. 그러면서 사회는 불안해진다.



티투스 리비우스는, "쌍둥이의 의미(혹은 무의미), 모방적 경쟁, 거기서 나오는 희생 위기, 그 결과인 집단 살해" 등, 우리가 '기본적 신화의 드라마'라고 부를 수 있을 것들을 꼼꼼히 찾아내고 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바로 이런 것들을 모든 고대 작가들 그리고 이들을 모방하고 있는 고전 작가들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가령 티투스 리비우스와 코르네유, 혹은 에우리피데스와 라신 사이의 동일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2,3세기 동안 근시안적인 검열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지, 위대한 텍스트들을 오늘날의 스타일에 맞춘 새로운 '비판적 물레'에 넣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희생양, 민음사, p.154)


사람들은 자신을 책망하기보다는 그들에게 아무 강요도 하지 않은 사회 전체나, 유죄로 덮어씌우기가 손쉬워 보이는 타인들을 비난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때 용의자들은 어떤 특별한 유형의 죄악으로 비난받는다. (희생양, 민음사, p.29)


르네 지라르는 그의 '욕망 이론'을 내적 매개를 통해서 일어난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얼마나 타인의 욕망들을 복제하는가. 복제에는 원본이 없고 수많은 개인들이 서로의 욕망을 서로 욕망한다. 우리는 그렇게 짝패 혹은 쌍둥이 (double)이 된다. 짝패나 쌍둥이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대한민국에서 많은 사람이 좋은 대학을 욕망하고, 명품을 욕망하고, 돈을 많이 버는 것을 욕망한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모두가 같은 것을 욕망한다. 같은 것을 욕망할 때 우리 고유의 정체성은 사라지게 된다. 같은 욕망을 품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욕망하는 것을 가지지만 못 가진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사회는 서로 갈등 상태가 일어난다. 마치 홉스가 말했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가 되는 것이다. 사회가 불안해지고 무너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것을 막는 것은 바로 희생양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의 희생양을 만들어 사회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분노와 폭력성을 하나의 희생양에 쏟아 붙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회는 문제가 생기기 이전까지 평화롭게 된다. 이것이 바로 희생양 매커니즘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희생양이 되는가. 첫번째로 튀어야 한다. 인간은 보수적인 동물이라서 누군가가 튀면 그것을 참지 못한다. 특히 한국에서 회사나 군대에 들어가면 듣는 소리가 '너무 못하지도 말고 너무 잘하지도 말고 중간만 가라고 한다.' 이 말은 튀지 말고 다르지 말라는 것이다. 튀는 것은 소수가 되기 때문에 힘이 약할 수 밖에 없다. 특히 여론몰이를 당하면 바보가 되기 쉽다. 두번째로 보복이 불가능해야 한다. 만약에 희생양으로 지적된 사람이 보복할 힘이 있으면 그것은 문제가 된다. 그래서 희생양이 되는 사람들은 사회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약자들이다. 마지막으로 죄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짓고 산다. 우리가 사소한 잘못을 평소에서 하는데 그 누가 평생에 잘 못도 안 저지르고 살겠는가. 즉, 희생양으로 지정되는 사람은 소수이고 약자이다. 철저하게 사회적 갈등상태나 긴장 상태 혹은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과오로 쏟아 붙은 것이다.



가해자의 신화와 피해자의 성경


성서가 박해를 거부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성서가 동시에 박해의 원동력을 해체하고 있다는 것까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성서는 바로 인간 종교의 일반적인 것과 거기서 나온 문명을 해체하고 있다. 우리 주변에 떠돌고 있는 모든 상징적인 힘들 속에는 박해의 표현에서 나온 것들이 섞여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런 형태의 제국이 느슨해지면서 환상의 힘도 약해지고 있는데, 그것은 이런 환상의 밑바닥에 있는 희생양 매커니즘이 갈수록 더 잘 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희생양 매커니즘은 일단 한번 밝혀지고 나면 더이상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이제 희생양에게 더 이상 죄가 있지 않으며 제대로 알든 모르든 간에 성경이야말로 이 붕괴의 원인이다. (희생양, 민음사, p.169)


많은 신화는 박해자의 입장에서 서술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오이디푸스 신화를 통해서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모르고 죽이고, 어머니를 모르고 관계를 했다는 것을 죄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모르고 했기 때문에 죄가 될 수 없다. 지라르는 대부분의 신화가 민중의 목소리와 염원을 담은 것이기 때문에 박해자의 입장에서 서술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라르는 성경에 나온 예수만이 희생자의 입장을 보여주었다고 믿는다. 예수는 성경에 따르면 죄가 없는 유일한 존재이다. 절대로 십자가에 죽을 사람이 아니다. 지라르는 예수의 삶이 일부러 자신이 희생양이 되기 위해서 산 삶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자신을 희생자로 지목한다. 예수는 외롭다. 나귀를 타고 갈 때 환호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에게 야유를 보냈고,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도 예수를 버렸고, 마지막에 하나님 또한 예수님을 버렸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주고 다시 부활함으로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고, 희생양 매커니즘을 들어냈다고 한다. 그리하여 기독교적 가치가 세상을 바꾼다고 지라르는 생각했다. 


르네 지라르를 생각하며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과 희생양 매커니즘을 통해서 현대인을 분석한 것은 우리가 눈여겨 볼만한다. 그의 이론이 멋진 것은 현대를 잘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철학자는 독선적이다. 언제나 자신의 논리가 맞다고 하며 그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것이 철학자다. 생각을 해보면 어느 소방관이 한 아이를 살리려고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다고 할 때, 그것이 순전하게 타인과 닮고 싶어지고 싶은 욕망 하나만으로 생각하기는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이 희생양의 기준을 지라르가 지정한다는 것 자체가 웃기다. 그의 기준에 맞으면 희생양이 되고 아니면 희생양이 아니라는 것은 비판의 여지가 있다. 르네 지라르의 욕망 이론은 탁월하고 많은 것을 설명하지만 현대인을 바라보는 하나의 이념적 틀로 보는 것이지 이를 100% 적용된다고 믿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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