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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Jul 19. 2017

뉴라이트의 멘탈리티를 말하다

<대한민국 역사> 이영훈


건국절과 임시정부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


건국을 부정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1919년 중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됨으로써 이미 건국은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운동가들의 단체였지 영토, 국민, 주권을 요건으로 하는 국가는 아니었다. 그런 국가를 세우고자 피를 흘린 독립운동의 열사들이 세운 단체가 대한민국임시정부였다.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은 1948년 8월 15일 영토, 국민, 주권의 요건을 갖춘 대한민국의 건국으로 열매를 맺었다. (대한민국 역사, 기파랑, pp.143-144)


한민당의 지도부는 식민지기에 일본과 미국에 유학을 다녀오고 교수, 변호사, 의사, 언론인, 작가 등의 전문직에 종사하는 지식인이 중심개력을 이루었다. 유력한 지주와 자본가도 한민당을 지지한 세력이었다. 일제 하에서 한국인들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차별을 받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장차 도래할 민족의 독립에 대비하여 실업, 교육 언론, 학술의 방면에서 근대문명을이식하고 실천하고 전파하는 세력이 성장하였다. 그 결과 일제 말기가 되면 전체 인국의 근 10%가 근대 부분에 종사하게 되었다. 한민당은 이들 근대문명의 신흥세력을 정치적으로 대표하는 단체였다. 한민당은 중국과 미국에서 귀환한 임시정부와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세력과 연합하여 이후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중심세력으로 역할을 하였다. (대한민국 역사, 기파랑, pp.90-91)


대한민국의 건국은 온건하고 점진적인 사회개량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낡은 사회구조가 그대로 이어지고, 그 속에 성장한 계층이 그대로 지배적 지위를 누려서 신생 국가에 걸 맞는 혁명적 기풍은 없는 듯이 보였다. 그렇지만 바로 그 속에 장차 한국인의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풍요를 이끌어낼 문명의 잠재력이 듬뿍 담겨 있었다. (대한민국 역사, 기파랑, p.147)


그들(김구와 김규식)은 남한의 우익세력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그들은 한국 전체를 광산화하기 위한 북한의 정치공작에 놀아났으며, 그 이유로 남한의 정치에서 고립되어 갔다. (대한민국 역사, 기파랑, p.125)


김구와 김규식 일행의 북행을 지켜보면서 이승만은 "남조선에서 북행한 정치가들이 북조선의 김일성 씨와 자기 마음대로 협상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면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라고 딱하게  여겼다. (대한민국 역사, 기파랑, p.126)


김구의 정치이념에 내재한 모순도 노선 전환을 유인한 다른 한편의 요인이었다. 1947년 1월에 발표한 '나의 소원'이란 글에서 김구는 "나의 정치이념은 한 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라고 하였다. 그러한 입장에서 그는 공산주의를 철저하게 비판하였다. 동시에 그는 더없이 강렬한 민족주의자였다. (대한민국 역사, 기파랑, p.159)


건국의 주도세력은 이 같은 현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서 귀국할 당초부터 이 같은 모순을 직시하고 민족의 대동단결을 호소하였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하였다. 함께 뭉쳐서 공산주의와 투쟁할 시국에 친일파 문제로 민족이 분열새허는 곤란하였다. 그에 반해 공산주의자들에게 친일파 문제는 그들이 대한민국의 건국 노선을 비판할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소재였다. (대한민국 역사, 기파랑, p.173)


이처럼 한국의 권위주의체제는 신생 후진국 가운데서는 상대적으로 양호한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에 의한 초기의 권위주의체제는 보통선거의 확장을 통해 그 정통성을 확인하고 강화하는 특질을 보았다. 이러한 권위주의체제는 다른 나라에서 예가 드문 것으로 판단된다. 정치의 단절과 사회 경제의 연속이라는 해방과 독립의 독특한 유형이 그러한 정치체제의 특질을 낳았다. 1950년대의 한국정치에 대해서는 민주냐 독재냐의 이분법적 시각을 떠나 이 같은 비교정치의 시각에서 공정하게 접근하고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역사, 기파랑, p.218)


<대한민국 역사>를 왜 썼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 책에서 중요한 부분은 아마 건국절 부분일 것이다. 건국절이라는 부분은 당연히 역사학계 내에서 토론이 이루어져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저자가 건국절을 꺼내 들은 것은 어떤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책의 앞부분을 보며 저자의 생각은 대한민국이 매우매우 성공한 국가라는 것이다. 즉, 그 성공의 비결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발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경제 발전이 일제시대부터 있었다고 주장한다. '일제 하에서 한국인들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차별을 받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장차 도래할 민족의 독립에 대비하여 실업, 교육 언론, 학술의 방면에서 근대문명을이식하고 실천하고 전파하는 세력이 성장하였다.' 이 부분을 보면 친일 행위를 한 것을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인적 인프라를 구성했다고 쓴다. 그런데 저자는 이승만 대통령을 펑펑 띄우고 임시 정부와 김구 선생을 격하시켜 버린다. 이승만 대통령이 건국의 아버지가 되는 이유는 바로 친일 행위를 했던 반민족 행위자들을 받아주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을 띄우면서 이들이 사용하는 논리는 바로 반공이다. 아무리 친일을 했어도 이는 대한민국을 위한 것이었고 반공을 하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되는 것이다. 다시 건국절 이야기로 돌아가서 건국절의 핵심은 1945년까지를 독립운동이기로 나누고 그 다음 대한민국이 정부 수립을 하기 전까지를 건국준비기로 나누는 것이다. 이런 구분을 하면 임시정부나 김구 선생같은 독립군은 건국 준비기간에 아무 것도 안 한 존재가 된다. 즉, 건국의 왕좌를 이고 가는 것은 일본에 협력했고 반공을 취하는 세력만을 살리는 것이다. 즉, 건국절은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독립운동가들과 임시정부의 노고를 줄여버리는 것이다.



이승만이 유일하게 공개적으로 주창했던, 겉으로는 모두로부터의 비난을 받았던, 그렇지만 속마음에서는 모두가 전직부터 동의하고 있었던 그같은 선택이 미국정부와 남한의 우익진영에 의해 공식화하는 대에는 2년의 세월이 걸렸다. (대한민국 역사, 기파랑, p.115)


이승만을 설득하러 온 미 대통령의 특사는 이승만에게 압도되었다. (대한민국 역사, 기파랑, p.205)


그렇지만 이승만은 그의 재선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 다수의 국민이 자신을 지지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산출하는 방식으로 헌법을 개정하고자 하였다. 거기에는 국민에 의한 직선제가 국회에 의한 간선제보다 민주주의를 발전시킴에 도움이 된다는 그의 개인적 소신도 작용하였다. (대한민국 역사, 기파랑, p.225)


이승만은 자유를 근원적 가치로하는 독립국가의 성취와 번영을 추구하였다. 이 같은 그의 정치적 목적은 우선 확고부동한 반공주의로 표출되었다. (대한민국 역사, 기파랑, p.233)


그 점에서 이승만은 건국, 민주주의, 6.25전쟁, 재건, 민족통일의 정치 현실과 과제를 대외관계와의 관련에서 수미일관하게 강력하게 추구할 수 있는 당대의 유일한 정치적 지도력이었다. (대한민국 역사, 기파랑, p.235)


이승만의 시대는 공산주의세력과의 투쟁을 통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바탕을 둔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공산주의세력의 무력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방위하고,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굳건히 하고, 다음 세대의 한국경제가 고도성장을 이룩할 수 있는 토대로서 교육혁명을 이룩하고 민간공업을 육성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1950년대가 끝나면서 그 이승만의 시대도 슬슬 막을 내리고 있었다. (대한민국 역사, 기파랑, p.256)


퇴진이 명예스럽지 못하였지만 그가 남긴 역사적 유산은 거대하였다. 그가 없었더라면 대한민국이 세워지고 존속할 수 있었을까 의심할 수 있을 정도로 나라만들기의 초기 과정에 있어서 그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대한민국 역사, 기파랑, p.272)


책을 읽으면서 깨알 같은 재미가 있었다. 저자는 역사라는 것이 과학이라고 이야기 했는데, 당시 사람들이나 미국 특사의 마음을 독심술로 읽어 낼 수 있었다. 한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이 과학적 근거가 없는데 갑자기 저자는 독심술을 가졌는지 사람들의 마음을 잘 읽어낸다. 재밌다. 사실,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이 반공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 부수의 멘탈리티 중 하나는 바로 반공이다. 인간은 안전에 대한 욕구와 잘 살고 싶은 욕구가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안전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켰다. 하지만 개헌을 통해 자기 권력을 강화하고, 내각제를 거부하며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 모습, 반공을 통해 많은 사람을 살해한 것을 볼 때 그가 민주주의에 입각한 좋은 대통령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오히려 저자가 하려는 작업은 이승만 대통령을 순수하게 치켜 세우려는 것보다는 수단으로서 사용하는 감이 강하다.



박정희 대통령과 경제성장


5.16이 일어나자 대다수의 국민은 "올 것이 왔다"면서 그것을 암묵적으로 지지하였다. (대한민국 역사, 기파랑, p.302)


요컨대 5.16에서 출발한 박정희의 근대화혁명은 이승만의 커다란 건국 유업에 두 발을 딛고 있었다. 4.19와 5.16은 겉으로는 대립적이었으나 속에서는 연속적인 사건이었다. 자유민주주의의 국가체제가 이승만 건국대통령에 의해 세워졌다면, 4.19와 5.16은 그 토대 위에서 국가경제의 곶간을 채우는 역사적 과제를 추구하였다. 다시 말해 4.19와 5.16은 나라만들기의 제2단계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하는 연속하는 두 혁명에 다름 아니었더. (대한민국 역사, 기파랑, p.307)


다수의 국민은 박정희의 이 같은 꿈과 계획을 지지하였다. 그로 인해 그의 18년에 걸친 권위주의 통치는 한국인에게 역사적으로 축적되어 있는 성장의 잠재력을 최대로 동원하는 역설을 낳았다. 그의 집권기에 한국경제는 중진국으로 진입하는 기적적인 성과를 낳았으며, 한국인들은 그를 생에에 상전벽해의 변혁을 경험하였다. 그의 죽음과 더불어 그가 구상한 그랜드플랜은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가 타협과 조정을 통해 성취해야 할 역사의 과제로 남았다. (대한민국 역사, 기파랑, p.394)


그러한 역사적 진보가 가능하게 된 것은 장기에 걸친 경제성장의 효과로 시민적 교양의 중산층이 광점하게 성립하였기 때문이다. 1987년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학생 시위에 화이트칼라의 넥타이부대가 대거 참여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대한민국 역사, 기파랑, p.416)


저자는 경제성장을 말하는데 있어, 두 가지 동력을 말한다. 첫번째는 일제시대부터 존재했던 개량론자들의 존재와 두번째는 박정희 대통령의 압축적 근대화다. 첫번째로 일제 시대에 실력 양성론을 펼친 지식인들이 있었고 이들 중 다수가 친일 행위를 하였다.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역사의 발전이 이루어 졌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저자가 말하는 바는 무엇인지 안다. 그렇지만 저자는 모든 것이 소수 지식인에 따라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데는 의문이 남는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성장을 위해 권위주의적인 정부 모델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권위주의적 정부와 경제 발전이 꼭 함께 이루어 진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경제 성장이 급격하게 일어난 것은 10.26사태 이후이기 때문이다. 나는 산업화가 자랑스럽다. 그것이 꼭 박정희 대통령이 이뤄서가 아니다. 산업화를 주도한 것은 정부와 박정희 대통령이지만 그 가운데 수많은 시민들이 자신을 희생해서 산업화를 이룬 것이다. 산업화는 박정희 대통령과 시민이 함께 이룬 한국의 기적이다. 이것을 정부와 소수 개량주의자들에게 모든 공을 돌리는 것은 너무 얄팍한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본다.



뉴라이트와 국정화 교과서


그러한 위기의식에 이 책을 쓰게 된 데에는 두 가지 계기가 있었다. 몇 년 전부터 틈나는 대로 장병들의 정신교육에 참가해 왔는데, 장병들이 읽을 만한 대한민국의 역사책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일선 부대를 방문하여 진중문고를 관철할 기회도 있었는데, 온통 취미나 취업 관련 도서를 꽉 채워진 가운데 병사들의 애국심을 고취할 역사책은 찾기 힘들었다. (대한민국 역사, 기파랑, p.6)


그런데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면, 다시 말해 보는 관점에 따라 역사의 해석이 달라진다면, 역사를 두고 과학이라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역사는 과학이며 과학이지 않으면 안 된다. 누구나 함부로 제 하고 싶은 대로 대화를 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역사라고 할 수 없다. 이 점에 대해 깊이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대한민국 역사, 기파랑, p.20)


<대한민국 역사>를 읽을 때, 저자의 생각을 자세히 읽어 보았다. 도대체 역사의 해석이 모두 같아야 할까? 역사서를 쓸 때는 당연히 팩트를 근거로 저술을 해야한다. 하지만, 역사서라는 것은 인간이 쓰는 것이고 인간이 완전하게 객관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본 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인간이 신 같이 오류가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즉, 역사서를 쓸 때는 당연하게 개인의 주관이 들어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뉴라이트에 포함되는 저자의 역사 인식에 대해서 바꿀 생각은 없다. 하지만, 자신의 역사 인식이 곧 진리처럼 여겨지는 것은 문제다. 다수 학자들의 역사를 보는 관점이 다르다고 국가의 힘을 빌려 이를 학생들에게 주입하려는 것은 전체주의 국가적 사고다. 자유 사회의 기본은 세상을 보는 것, 역사를 보는 것, 인간을 보는 시각의 관점에 대해 헌법에 규정한 양심의 자유에 입가개 국가 권력을 동원해 공동체가 어떤 명분으로도 강제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하여 권력의 힘을 빌려 소수의 역사 인식을 대중에게 이식하려는 것은 민주주의국가에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저자는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책을 쓴다고 했는데, 역사 교육은 차하순 교수가 말했듯 역사를 통해 자기 자신을 깨다는 과정이다. 즉, 국민이기 이전에 인간에 대한 성찰, 내가 누구인지, 결정을 내릴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라고 나는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애국이라는 이름 하에 하나의 목표에 개인을 끼워 맞추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적 발상이 아니라 전체주의적 사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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