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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Jul 21. 2017

사랑을 사랑한 여자 엠마 보바리

<마담 보바리> 귀스타브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의 내용은 아침드라마 급이다. 센스 없고 재미 없는 의사 샤를 보바리와 결혼한 엠마 보바리, 엠마는 엄격한 시골 수도원 학교에서 연애 소설을 읽으며 사랑에 대한 욕망을 품는다. 하지만, 지금 결혼한 남자는 워커 홀릭이고 여행도 싫어하고 취미도 없는 남자다. 그러던 어느 날, 엠마는 사교계에 발을 들이고 권태스러운 생활에 분노한다. 그러하다, 젊은 미청년 레옹 뒤피를 만나 서로 썸을 타지만 레옹이 파리로 공부하러 가고 둘은 썸만 타다 끝난다. 그러나 바람둥이 로돌프와 눈이 맞고 로돌프와 연예를 하며 퇴폐적인 사랑을 배운다. 그러나, 로돌프는 엠마를 차버린다. 엠마는 점점 허영심이 커져 쇼퍼홀릭이 되어 가며 대출을 받으면서 과소비를 한다. 그러던 중, 파리에서 레옹이 다시 돌아오고 엠마는 레옹과의 사랑을 주도한다. 하지만 돈을 빌려준 뢰르는 빌린 돈을 갚으라고 독촉한다. 엠마는 맨붕을 하고 비소를 먹고 죽음을 맞이한다. 아내의 빚 때문에 샤를 보바리는 파산이 난다. 딸과 함께 살아가지만 샤를은 급사하고 보바리 부부의 딸 베르트는 방직 공장으로 가서 일을 하게 된다. 사실, 아침 드라마급 내용이긴 하지만, 아침 드라마와는 다르게 치밀한 구성을 가지고 있다.



엠마 보바리의 욕망과 권태 그리고 지루한 남편 샤를 보바리


어머니는 아이에게 잼만 먹여 기르려 했다. 반면에 아버지는 아이가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맨발로 뛰어놀게 했고 심지어 짐승새끼처럼 벌거벗고 다녀도 괜찮다까지 말했다. 어머니는 성향과는 반대로 유년기엔 아이를 사내답게 키워야 한다는 이상을 머릿속에 담고 있었으므로 그는 그 이상에 따라 자기 자식을 양육하려 했고 스파르타식으로 사정없이 양호한 체질로 만들고자 했다. (마담 보바리, 민음사, P.17)


그러나 그녀는 전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중략) 그녀는 무슨 일에서나 뭔가 개인적인 이득 같은 것을 얻어내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감정적 욕구를 얻어내지 않으면 성이 찾이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감정적 욕구를 당장에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나 다 무용한 것이라 하여 물리쳤다. 예술적이기 보다는 감상적인 기질로 풍경 감상이 아니라 뭉클한 감동을 찾아내는 편이기 때문이었다. (마담 보바리, 민음사, P.58)


결혼하기 전까지 그녀는 사랑을 느낀다고 여겼었다. 그러나 그 사랑에서 응당 생겨나야 할 행복이 찾아오지 않는 것을 보면 자신이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래서 엠마는 여러 가지 책들에서 볼 때는 그렇게도 아름다워 보였었던 희열이니 정열이니 도취니 하는 말들이 실제로 인생에서는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었다. (마담 보바리, 민음사, P.55)


반대로 남자란 모름지기 모르는 것이 없고, 여러 가지 재주에 능하고 정렬의 위력, 세련된 생활, 온갖 신비들로 인도해 주는 능력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 사내는 무엇 하나 가르쳐줄 것도 없고, 무엇 하나 아는 것도 없고 무엇 하나 바라는 것도 없었다. 그는 그녀가 행복하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녀는 너무나 흔들림 없는 이 평온과 태연한 둔감 그녀 자신이 그에게 안겨주고 있는 행복 그 자체에 대하여 그를 원망하고 있었다. (마담 보바리, 민음사, P.65)


소설의 첫 부분은 샤를 보바리에 대한 설명이다. 극성스러운 어머니 밑에서 공부만 한 모범생의 모습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만 할 줄 알고 여행이나 놀이는 싫어하는 남자다. 그에 비해 엠마는 전원 속에서 감각을 키우고 책을 통해 욕망을 배웠다. 엠마의 욕망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요즘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을 보면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고 싶어한다. 누군가가 여행을 가거나 물건을 사면 부러워지고 의시적이거나 혹은 무의식적으로 부러워한다. 엠마 시대의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은 바로 연애 소설이었다. 플로베르가 엠마에 대해 배경 설명을 열심히 한 것은 엠마라는 여인이 감각적이라는 것과 욕망을 갈구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즉, 엠마는 생각이나 이성 보다는 행동을 하고, 이론으로 무엇을 습득하는 것보다 물건을 직접 만지고 감각적으로 인지하는 인물이다. 엠마를 현대판으로 보면 조용히 책을 보는 것보다 여행 가는 것을 좋아하고 엑티비티를 좋아하는 인물이다. 이런 관점에서 엠마의 눈에 샤를 보바리는 너무 지루한 인물이었다. 엠마의 판타지를 이루어 줄 수 있는 남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엠마가 순진한 시기는 레옹 뒤피와 썸을 타다 이별을 고하는 부분까지다. 초창기에 레옹을 만나며 보바리는 레옹에게 끌렸다. 왜냐하면 샤를과는 완전 반대의 남자였기 때문이다. 보바리의 삶 속에서 샤를과의 삶은 권태였다. 보바리가 생각하는 권태는 인생 속에 의미가 없고 지루한 일상의 연속이다. 하지만, 엠마는 레옹과의 썸을 통해 사랑 그 자체야 말로 자신을 권태로부터 구원해주고 삶의 의미를 준다고 믿게 만들었다.


사랑을 변질시킨 로돌프 그리고 허영심을 부추기는 뢰르


그녀는 우연의 다른 짝맞춤으로 누군가 딴 남자를 만달 도리는 없을까 자문했다. 그리고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그 사건들, 달라졌을 그 생활, 알지 못하는 그 남편은 어떤 모습이었을까를 상상해 보려고 애썼다. 과연 어느 누구도 저 남자와는 닮지 않았다. 그는 미남이고 재기발랄하고 품위있고, 매력적인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옛날의 수도원 친구들이 결혼한 상대는 정녕 모두 그럴 것임에 틀림없다. (마담 보바리, 민음사, P.70)


그러나 그녀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그는 이렇게까지 순진한 여자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방탕함을 모르는 이 사랑은 그에게 있어서 새로운 그 무엇이었다. 그것을 그를 안이한 습관에서 벗어나게 했고 그의 자긍심과 관능을 동시에 자극했다. 그의 브르주아적인 양식으로 보면 경멸의 대상인 그녀의 열광도 로돌프 자신을 향한 것이기 때문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귀엽게 여겨졌다. 그래서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자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어졌고 그리하여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태도가 달라져 갔다. (마담 보바리, 민음사, P.247)


그는 일체의 부끄러움이란 거추장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를 마구 거칠게 다루었다. 그는 그녀를 나긋나긋하고 부패한 물건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것은 남에 대해서는 찬미가, 여자에 대해서는 애욕이 넘치는 일종의 어리석은 집착이었고 그녀를 마비시키는 것 같은 지극한 행복이었다. 이리하여 그녀의 영혼은 마ㅣ 말브와지 포도주 통 속에 빠진 클라랑스 공작처럼 이 되취에 깊숙이 빠져 시들어버린 채 헤어나지 못했다. 정사가 습관이 되자 그 결과 보바리 부인의 태도는 달라졌다. (마담 보바리, 민음사, P.127)


보바리의 두번째 남자는 바로 바람둥이 로돌프였다. 그는 보바리를 성적으로 끌었다. 로돌프를 만나며 엠마의 욕망은 탐욕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욕망은 중요한 것이다. 욕망이 있어야 살아갈 의미가 있는 것이다. 성공하고 싶은 욕망,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욕망,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 욕망이라는 단어가 한국어에서 부정적 느낌을 주지만 욕망은 가치중립적인 단어다. 엠마 보바리를 타락시키는 두 가지 욕망이 있는데 하나는 성적 욕망이고 다른 것은 돈에 대한 욕망이다. 엠마 보바리는 성적 욕구가 컸다. 그것을 실현시켜준 것은 로돌프였다. 로돌프와 숲속에 관계를 맺으며 엠마는 이성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사랑을 느낀다. 로돌프의 눈에 엠마는 순진한 여인이었다. 하지만 로돌프와 관계를 계속 가질수록 엠마의 성적 욕망은 계속 계속 커진다. 그동안 샤를르가 채워주지 못한 욕망, 권태를 무너트려주는 욕망을 통해 엠마는 살아있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계속 복용하면 독이 되듯, 엠마는 색욕에 빠진다. 이와 더불어 엠마는 혀영심이 있었다. 그것을 부추기는 것은 바로 고리대금업자 뢰르였다. 뢰르는 계속 엠마의 허영심을 자극하면서 좋은 물건을 소비하게 부추긴다. 순수했던 엠마는 점점 눈이 멀고 욕망만을 추구하는 탐욕스러운 인물로 변한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보바리


레옹은 어떤 방법으로 속마음을 고백할지 고민을 거듭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그토록 소심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사이에서 주저하면서 그는 남담과 욕정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마담 보바리, 민음사, P.148)


만날 때마다 레옹은 지난번 밀회 이후의 모든 행동을 낱낱이 보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녀는 시를, 그녀를 위한 시를, 그녀를 찬양하는 사랑의 시를 받고 싶다고 했다. 그는 첫줄을 쓰고 나면 아무리 해도 둘째 줄의 운을 맞출 수가 없었다. (중략) 그녀가 그의 정부라기보다는 그가 그녀의 정부가 되었다. 그녀의 정다운 말과 키스는 그의 혼을 쏙 빼놓은 것이었다. 너무나도 깊고 은밀한 나머지 물질 세계의 것이 아니라고 여겨질 정도인 이런 퇴폐적 기교를 그녀는 대체 어디서 배운 것일까? (마담 보바리, 민음사, P.402)


레옹 뒤피는 엠마에게 있어 순수한 첫사랑이었다. 하지만 다시 만난 레옹과의 관계에서 예전의 엠마는 존재하지 않았다. 엠마는 마치 하얀 종이같은 여자였다. 자연 속에서 살며, 사랑을 책으로 배운 여성이었다. 하지만, 로돌프를 만나고 그녀는 탐욕스럽게 변했다. 레옹과 엠마의 모습은 마치 로돌프와 엠마의 모습과도 같다. 이제 로돌프의 역할을 엠마가 하고 있고, 레옹은 엠마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욕망이라는 것은 상대를 모방한다. 엠마는 로돌프에게 사랑의 배신감을 느꼈지만 무의식적으로 엠마는 로돌프를 모방하고 있었고 또다른 로돌프가 되었던 것이다. 레옹과 퇴폐적인 사랑을 나누며 엠마 보바리는 거짓의 세계 속에 살아간다. 레옹과의 관계를 숨기기 위해 남편 샤를르에게 거짓말을 하며, 샤를르의 재산을 파산내며 자신과 모두를 파괴시키는 인물로 변질된다. 그동안 엠마는 욕망 없는 삶을 권태로 여기며 타성이 붙은 삶을 경멸했다. 하지만, 이제는 퇴폐적 사랑과 거짓, 허영심이 그녀의 삶을 덮어 버렸다. 그리하여 그녀는 파멸한다. 돈을 갚지 못해 비소를 먹고 자살을 택한다. 샤를르 보바리는 파산하고 죽는다. 베르트는 부모를 잃고 친척 집에 맞겨져 방직 공장에서 생활비를 번다. 엠마의 끝없는 욕망은 모두를 파괴시켰다.



엠마 보바리의 후예


엠마는 이제까지의 그 모든 배신과 비열했던 행동, 그리고 그렇게도 마음을 괴롭히던 무수한 탐욕들도 다 끝났구나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햇다. 이제 그녀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았다. 희미한 황혼이 그녀의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왔다. 지상에서 나는 모든 소리들 중에서 이제 엠마의 귀에 들리는 것은 오직 멀어져 가는 고향악의 마지막 메아리처럼 부드럽고 몽롱하게 이 가엾은 가슴이 간헐적으로 탄식하는 소리뿐이었다. (마담 보바리, 민음사, P.459)


그녀는 아들을 갖고 싶었다. 튼튼한 갈색 머리의 애였으면 했다. 이름은 조르주라고 지으리라. 이렇게 사내아이를 갖게 된다고 생각하니 마치 과거의 모든 무력감에 대하여 희망으로 앙갚음하는 느낌이었다. 남자로 태어나면 적어도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온갖 정념의 세계, 온갖 나라를 두루 경험할 수 있고 장애를 돌파하고 아무리 먼 행복이라 해도 붙잡을 수가 있다. 그러나 여자는 끊임없이 금지와 마주친다. 므기력한 동시에 유순한 여자는 육체적으로 약하고 법률의 속박에 묶여 있다. 여자의 의지는 모자에 달린 베일 같아서 끈에 매여 있으면서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펄럭거린다. 여자는 언제나 어떤 욕망에 이끌리지만 어떤 체면에 발복이 잡혀 있다. (마담 보바리, 민음사, P.132)


결국 엠마는, 비에사르 성관에서 후작 부인이 어느 젊은 여자를 베르트라고 부르던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곧 그 이름을 택하기로 했다. (마담 보바리, 민음사, P.133)


엠마 보바리의 성격을 가지고 후대 사람들이 보바림즘이라는 말을 만들었다. 보바리즘이란,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다르게 상상하는 기능이다. 엠마의 파멸은 자신의 욕망, 꿈, 이상을 지금의 나로 착각한 것이다. 엠마는 끝없는 충동과 욕구를 갈망하고 소유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의 욕망은 점점 커진다. 엠마 보바리의 욕망은 그렇게 끝났을까? 아니다. 보바리의 후예가 있다. 바로 베르트가 엠마의 욕망을 이어 받았다. 소설에서 주인공들의 성격을 묘사할 때 플로베르는 가족의 영향을 강조한다. 아마, 베르트 속에서 엠마는 살아 숨쉬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방직 공장에서 일하며 돈의 가치를 배울테고 지위에 대한 갈망을 할 것이다. 소설은 나오지 않지만 그녀는 다시 상류사회로 올라가려는 욕망을 가질 것이다. 마치, 엠마 보바리처럼 말이다. 엠마 보바리의 후예는 그의 딸 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렇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텔레비전을 보면서 우리는 사람들이 여행을 가고 행복해 하는 모습, 성공한 모습, 맛있는 것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부러워하며 시기하기도 한다.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모방한다.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계속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며 우리 마음 속의 욕망을 자극한다. 사회는 계속 욕망을 채워나가는 삶이 바람직한 삶이라고 귓속말을 한다. 우리는 욕망한다. 끝없는 욕망을 추구하는 모습, 현대인은 모두 엠마 보바리의 후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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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드디어 휴가 갑니다 ㅎㅎㅎ!!!! 모두 여름 휴가 잘 보내세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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