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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Aug 18. 2017

민주주의는 어떻게 왜곡되는가?

<포스트민주주의> 콜린 크라우치

정말 오랜만에 글을 올립니다. 일본하고 방콕을 다녀와서 그동안 포스팅이 늦었네요 ㅋㅋㅋㅋㅋ

사실 친구들과 간 방콕 여행을 여기다 올릴까 말까 생각중입니다. 당연히 친구들의 동의를 받아야 하겠지만요 ㅎㅎㅎ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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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정체성 : 민주성과 능률성 사이에서


포스트민주주의 모델 하에서도 선거는 분명 존재하고 정부를 교체할 수 있다. 그러나 선거의 공적 논쟁은 설득 기술에 능란한 전문가들로 구성된 경쟁적 선거 운동 본부에 의해 치밀하게 통제된 스펙터클일 뿐이며, 이런 선거 운동 본부에 의해 취사선택된 협소한 쟁점들만 고려에 넣는다. 시민 대중은 수동적이고, 조용하고 심지어 냉담한 역할을 할 뿐이며, 그저 그들에게 주어진 신호에 반응할 뿐이다. 선거 게임이라는 이 호화로운 구경거리의 수면 아래에서, 선출된 정부와 기업 이익을 압도적으로 대변하는 엘리트들 간의 상호 작용을 통해 진짜 정치가 만들어진다. (포스트민주주의, 미지북스, P.7)


오늘날 기업은, 정부가 기업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경제가 어려워질 것이며, 이는 곧 경제적 성공이라는 정부 고유의 핵심 관심사를 위태롭게 만들 것이라고 위협한다. 둘째, 기업은 로비 자금으로 엄청난 돈을 쓸 수 있다. 이는 그들이 처음부터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전의 로비가 성공한 덕택에 기업 이윤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포스트민주주의, 미지북스, P.29)


포스트민주주의에 대한 개념을 먼저 잡고 가야겠다. 콜린 크라우치가 말하는 포스트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완전히 끝났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 앞에서 민주주의는 살아 숨쉬고 존재한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움직이는 주체가 어디로 갔느냐에 대한 질문에 따라 대의민주주의와 포스트민주주의가 나뉜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민주주의 하에서 주인은 바로 시민이라고 배운다. 하지만 크라우치가 지적하는 것은 현대의 민주주의에서 시민은 주권을 잃고 정치쇼를 보는 관람객으로 격하되었고 대기업과 언론 그리고 정치인의 삼각모델이 민주주의사회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제일 위에 있는 것은 바로 대기업들이다. <포스트민주주의>를 읽을 때, 두 가지 부분을 생각하고 읽으면 좋을 것이다. 첫번째는, 시민들에게 가는 신호가 어떻게 왜곡이 되는가. 두번째는 정치와 경영 사이에 놓인 정부의 딜레마를 따라 읽어야 한다. 근본적으로 포스트민주주의가 도래한 것은 정치와 경영 사이에 놓인 정부의 정체성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책에서 다루지 않았지만 정부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정부는 행정을 하는 곳이다. 행정은 '공공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관리적 활동'이다. 즉, 공공가치라는 '민주성'과 '관리적'이라는 능률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즉, 정부는 정치학과 경영학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형국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70년대까지 민주성과 능률성 사이의 경쟁은 계속 되었다.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시대가 도래하고 정부의 방침은 신공공관리 (New Public Management)로 바뀐다. 대부분의 나라가 NPM을 선택했다. 신공공관리의 핵심은 성과, 고객 그리고 경쟁이었다. 정부가 행정을 하면서 능률성과 효율성에 초점을 둔 것이다. 공공기관이 나태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성과제와 경쟁을 도입했다. 신공공관리 하에서 시민은 더이상 시민이 아니라 서비스 소비자로서의 어감이 강하게 작용하게 된 것이다. 나는 크라우치의 책의 전제에 신공공관리가 깔려 있다고 본다. 정부는 자신의 무능함을 해결하기 위해 시장적 요소를 투입한 것이다. 정부의 이런 시도는 아마 긍정적인 의도였지만 도리어 이런 시도는 대기업들이 정부에 간섭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기업들은 정부 산업과 민영화, 민간위탁을 위해 로비를 한다. 정부는 자신의 나태함을 제거하기 위해서 기업들의 힘을 빌린다. 기업들이 정부 행정에 조금씩 개입하게 되면서 포스트민주주의는 시작된다.



어떻게 시민들의 신호는 왜곡되는가?


오늘날 포스트민주주의의 원인이 되는 가장 강력한 힘은 경제적 세계화다. 대기업은 빈번하게 개별 국가의 통치 능력을 넘어서까지 성장한다. (포스트민주주의, 미지북스, P.47)


콜린 클라울치는 <포스트민주주의>에서 그 징후들을 이렇게 밝힌다. 첫번째로 정책의 심도있는 내용보다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여론만을 조작해서 보여준다. 현대사회의 특성 중 언론은 사실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뉴스를 보며 '이런 세상에 살고 있구나'를 깨닫는다. 언론은 객관성을 유지한다고 하지만 자신들이 보여주고 싶은 사실만을 보여준다. 즉 모든 사실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수백명이 시위를 하더라도 그 시위를 취재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는 일이 되어 버린다. 두번째는 정부의 크기가 작아진다. 복지국가에서 정부는 컸지만 이제 정부의 크기는 작아지고 시장의 크기가 커진다. 세번째로 정책이 상업화된다. 정책이 곧 광고처럼 변한다는 것이다. 정책이 쉬어지는 이유는 대중들이 복잡한 것을 싫어하고 간단하고 감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 선호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미지 정치다. 정책이나 도덕성 보다는 한 개인에 따라 투표를 한다는 것이다. 터미네이터 배우가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된 것은 그가 단지 유명인사였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포스트민주주의는 시민들의 신호를 왜곡시킨다. 이는 왜곡시키는 주체들의 문제도 있지만 이와 더불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고 감각적인 것만을 선호하는 소극적 시민들이 많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신호를 왜곡하는 기업들은 어떻게 정부를 차지하는가?


정부는 유령 기업의 유연성과 외견상의 효율성을 부러워하면서 경솔하다 싶을 정도로 무작정 그 운영을 모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중략) 이 변화를 달성하기 위해 공공사업은 민영화되거나 민간 위탁 되거나, 공공부문 내에서 민간 기업처럼 운영된다. (포스트민주주의, 미지북스, PP.67-78)


민주주의 이전 시대에, 경제적 사회적 삶을 지배했던 사회 엘리트는 정치적 영향력 및 공공의 삶에서 중요한 위치도 독점했다. 민주주의가 등장하면서 엘리트들은 최소한 정치적 영향력과 공직만큼은 비엘리트 집단과 나눠가져야만 했다. 그러나 오늘날, 정부가 지식과 전문성을 점점 더 기업 경영진과 지도층에 의존하게 되고, 정당이 그들로부터 자금의 많은 부분을 충당하게 되면서 새로운 지배 계급, 정치와 경제 모두 장악한 계급이 구축된 사회로 우리는 꾸준히 나아가고 있다. (포스트민주주의, 미지북스, P.85)


현대 사회에서 대부분의 정부들은 민주성과 능률성 사이의 정체성 속에서 능률성과 효율성을 선택했다. 그동안 정부가 정부일 수 있는 정체성을 버리고 정부와 사기업의 경계가 무너져 버렸다. 정부는 자신의 이제 시민들을 고객으로 볼 뿐이다. 정부는 고객들에게 서비스와 상품을 제공하는 기업으로 전락해 버렸다. 정부의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실시한 민간 위탁과 면영화는 단기적으로 정부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었을테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정부는 대기업의 영향력에 놓이게 된다. 기업인들은 정부의 사업을 하기 때문에 정부 인사들, 정치인들과 연결고리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기업은 정치인에게 후원을 해준다. 이렇게 될 때 기업인들과 정치인들의 결탁을 어쩔수 없는 일이다. 서구에서 복지국가 시대를 지나 우리가 직면하는 문제는 민주주의는 겉으로만 남아있고 민주주의를 표방한 왕조국가로 갈 수 있는 위험이 포스트민주주의 속에 내포가 되있는 것이다.


크라우치는 서구사회는 고전적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복지국가를 지나 이제 포스트민주주의 시대로 왔다고 진단한다. 서양의 국가들은 적어도 절차적 민주주의의 틀을 완성시키고 평등성과 민주성의 원칙을 중시하는 복지국가로 이상을 펼쳤다. 그러나 비대해진 정부의 비효율성과 정부실패를 통해 현대의 서구 사회는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체택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서양의 민주주의와 궤가 다르다. 나는 대한민국이 고전적 민주주의를 형성이 작년 촛불 집회를 통해서 완벽하지는 않지만 틀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대한민국은 정부가 산업을 주도하고 매우 강한 위치에 서서 대기업들을 지배했지만 1990년도 이후 정부와 대기업의 위상은 비슷해졌다. 대한민국에서 대기업과 정부의 결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지금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의 위치를 생각해보면 우리는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과정 중에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대기업과 정치인들 사이의 결탁을 목격하고 있는 실정이다. 즉, 우리는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있는 과정과 동시에 크라우치가 지적하는 포스트민주주의적 요소가 동시에 혼재하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위해 많은 것이 필요하겠지만 그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을 깨어있는 시민일 것이다. 시민과 고객은 다른 것이다. 고객은 기업이 제공하는 상품을 소비하고 자신의 권리가 침해될 때 분노한다. 하지만 시민은 그렇지 않다. 시민은 적극적이다. 시민은 투표하고 참여하고 연대하는 존재다. 시민의 개념을 가진 사람의 비율이 많아질 때 민주주의는 포스트민주주의로부터 벗어날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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