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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Oct 03. 2017

인간의 조건

존재하지 않는 기사 <이탈로 칼비노>

<존재하지 않는 기사>는 2011년에 책을 사서 읽으려고 하다 포기했던 책이다. 이 책을 읽기 포기했던 이유는 재미도 없었고, 작가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상한 판타지 소설을 쓰나 싶었다. 그런데 6년 정도가 흐르고 나서, <존재하지 않는 기사>는 참 잘 쓴 책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존재하지 않는 기사>를 통해 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더 나아가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줄거리를 빠르게 요약하면, 아질울포는 십자군 전쟁 중에 참여하고 있다. 아질울포는 신체가 없고 갑옷에 정신만 깃든 아주 스펙터클한 존재다. 그의 정신을 온전히 보증하는 것은, 겁탈당하려던 소프로니아 공주를 지켜준 것을 공적으로 인정받아 기사가 되었다. 즉, 소프로니아가 처녀라는 것이 바로 아질울포의 정신과 의지를 보증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전쟁 중 토리스먼드라는 사내가 등장해 자신이 소프로니아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 아질울포는 자신의 정체성의 문제에 직면하고 소프로니아를 찾으로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할 때, 존재는 하지만 생각이 없는 구르둘루와 젊은 기사 랭보 그리고 여기사 브르다만테가 함께한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와 존재하는 구르둘루


존재하는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힘에 의해 눈을 감고 스스로의 의식을 놓아 버리고 시간의 진공 속으로 잠겨 들었다가 얼마 후 잠들기 전과 똑같이 깨어나서 삶의 끈들을 다시 엮어 나가는 건지 아질울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 민음사, P.16)


"뭐라 말할 수 없는 미친 녀석(구르둘루)이지요. 존재하기는 하지만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일 뿐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 민음사, P.37)


<존재하지 않는 기사>는 짧지만 어렵다. 작가는 쉽게 이야기를 썼지만 내용 안의 구성이 복잡하다. 먼저, 아질울포와 구르둘루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한다. 앞에서 <존재하지 않는 기사>는 인간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고 하였다. 첫번째 작업으로 아질울포와 구르둘루를 분석하는데 먼저 밝히지만 이들은 기준선이다. 먼저, 아질울포는 갑옷에 정신이 깃든 아주 오묘한 존재다. 그는 신체가 없기 때문에 신체가 있는 사람들에게 대해 시기심을 느끼고 부러워한다. 책을 읽으면 느끼겠지만 우리는 아질울포에게 감정선을 이입한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아질울포는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명제를 소설화한 존재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존재를 계속 의심하다 아무 것도 믿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종국의 그는 자신을 의심하는 자아 즉 정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데카르트가 사용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계속 사유를 하고 있을 때다. 그러니까 데카르트가 상정한 인간은 24시간 동안  언제나 합리적이고 이성적 사고를 하고 있어야 한다. 계속 생각을 하며 아질울포는 자신의 존재 즉 주체를 인정받는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오류도 발생시키고 제한된 인식능력 때문에 외부에서 보증이 필요했다. 데카르트는 이를 신에게서 보증을 받았고 아질울포는 소프로니아 공주의 처녀성이 이를 보증해주는 것이다. 만약, 그녀가 겁탈 당하기 이전 처녀가 아니었다면 아질울포는 자신을 보증해주는 객관적 요소가 없기 때문에 존재할 가치가 사라진다. 아질울포는 데카르트 이후 근대인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아질울포와 반대로 하인 구르둘루는 생각은 없는데 신체는 존재하는 인간이다. 구르둘루는 중세 암흑기의 인간상이다.  우리가 소설을 읽으며 구르둘루에게 감정이입이 힘들었던 것은 우리는 이미 모두 주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주체라는 개념은 길게 잡아야 17세기 부터 나타난 개념이다. 특히, 중세에는 구르둘루같은 사람들이 전체였다. 왜냐하면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언제나 신이 모든 것을 예비하고 행하고 교회만 가고 자신의 일에 만족하며 살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언제나 이성적 합리성을 따니는 보이지 않는 기사와 육체는 존재하지만 주체성이 없는 구르둘루 사이에 존재하는 존재다.



인간은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가


지금까지 랭보는 오로지 아르갈리프를 죽여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전투 규율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고 어떤 규율이 있는지조차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게 새로워 보였고 지금 자기 혼자만 흥분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 민음사, P.53)


보이지 않는 기사와 보이는 바보 하인 사이에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인물들은 바로 젊은 기사 랭보와 토리스먼드다. 랭보는 귀납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아간다면 토리스먼드는 연역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아가려고 한다. 랭보는 거대한 인생관이 없다. 십자군 전쟁에 자신의 아버지의 원수를 죽이기 위해 참전하고, 브르다만테를 사랑해서 구애하며 자신의 앞에 놓인 상황에만 집중하는 실존주의적 인물이다. 실존주의적 인물은 자신이 어떤 목표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오로지 자신이 지금 하는 일들이 계속 모이고 모여서 종국에 자신의 실존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랭보에게는 인생의 거대한 큰 목표는 없고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계속 해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에 비해 토리스먼드는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찾으러 다니는 인물이다. 자신이 어떤 존재이고 누구로부터 나왔는지에 대한 고민이다. 그는 랭보와 달리 인생의 목표가 존재한다. 그는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존재하고 그 이유를 찾아 그 뜻을 찾아 떠나는 것이 토리스먼드의 삶이다. 현대인은 자신의 삶을 규정할 때, 랭보 같은 삶을 사는 사람도 존재하고 토리스먼드처럼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랭보 같은 사람은 하루 하루를 자신이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간다. 하루 하루의 일들을 모으고 또 모아서 죽을 때까지 축적해서 자신이 누군지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에 비해, 토리스먼드는 자신의 목적이 뚜렸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목적을 계속 탐구해 낸다. 


인간의 조건


"그(구르둘루)도 배우겠지요...... 우리도 우리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존재한다는 것도 배울 수 있는 거랍니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 민음사, P.170)


오, 미래여, 과거 이야기에서 격정적으로 내 손을 잡은 현재에서 떠나기 위해 난 지금 네 말안장 위에 올라탔다. 아직 세워지지 않은 도시 탑 위의 깃대에 어떤 새로운 깃발들이 나르 향해 꽂힐까? 내가 사랑했던 성과 정원에서는 어떤 폐허의 연기가 피어오를까? 네가 준비한 예상할 수 없는 황금 시대는 어떤 것일까...... 길들지 않은 너, 비싼 값을 치른 보석 같은 예감, 정복해야 할 나의 왕국, 미래여..... (존재하지 않는 기사, 민음사, P.173)


작가는 보이지 않는 기사와 생각 없는 하인을 통해 인간의 기준을 설정했다. 그리고 두 젊은 청년을 보이며 삶의 방향성에 대해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소프로니아와 브라다만테를 통해 보여준다. 소프로니아는 매우 중세적 여성이었다. 브라다만테 또한 보이지 않는 기사에게 사랑에 빠진다. 이는 중세적 여성성을 보여주는데 중세 시대 여성들은 신을 제일 많이 사랑해야 한다고 주입받는다. 하지만, 이런 중세적 사고를 가진 여성들이 소설 끝에는 주체를 가지고 선택하는 삶을 살아간다. 소프로니아는 중세 사람들을 교육시키고 민주주의를 연상시키는 발언을 한다. 또한 수녀가 된 브라다만테는 수녀원을 박차고 나가서 랭보에게 사랑을 느끼고, 자신의 삶에 대해 선택을 하며 미래로 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는 삶을 살며, 존재를 하기도 하고 존재 안하기도 한다. 열심히 생각하며 살지만 멍때리는 시간도 많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 기사와 생각이 없는 구르둘루 사이를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다. 이런 기준선 상에 놓인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성에 따라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인간의 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존재하지 않는 기사>에 나온 여성들처럼 선택하는 삶이다. 근대화 이후 인간이 주체 개념을 가지고 태어난 것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현대에서 수많은 구르둘루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주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에 끌려 다니고 고민과 생각을 그만 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근대의 인간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수없이 많은 고민과 자신을 알아가는 것부터가 인간이 되는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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