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 선언 <칼 맑스>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하나의 유령이 유렵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구유럽의 모든 세력들, 교황과 차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의 급진파와 독일의 경찰 밀정이 이 유령을 쫓아내기 위해 신성한 동맹을 맺었다. (공산당선언, 팽귄북스, p.227)
부르주아지는 의사, 법률가, 성직자, 시인, 학자들을 자신이 지불하는 임금노동자로 바꾸었다. (공산당선언, 팽귄북스, p.231)
맑스는 <공산당 선언>을 통해 자본주의의 괴물성을 경계한다. 맑스는 자본주의를 고치거나 변화시키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지 않고 자본주의라는 괴물을 무너트리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맑스는 자본주의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는가. 맑스는 구조주의적 관점을 통해 사회를 바라본다. 맑스는 사회구조를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로 나누었다. 하부구조는 바로 돈으로 대표되는 경제의 영역이다. 상부구조는 국가, 법, 문화, 교육, 종교, 문화, 이데올로기와 같은 것으로 규정했다. 맑스가 보기에 자본주의의의 중심은 바로 하부구조였다. 모든 세상이 돈으로 지배된다. 또한 맑스가 규정한 상부구조는 경제를 정당화시키는 일을 행한다. 가령, 맑스의 관점에서 교육은 사회화를 시키는 기관이다. 사회화를 한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 잘 적응된 일꾼을 키워나가는 것이다. 맑스의 눈으로 교육을 해석한다면 교육은 자본주의 사회의 명맥을 유지하게 만드는 노동력을 제공하며, 교육은 자본주의 체제를 각각의 개인에게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럼 법에 대해서도 알아볼까. 대한민국에서 사용하는 단어 중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있다. 법은 돈 있는 사람에게 관대하고 돈 없는 사람에게 관대하지 않다는 것이다. 즉, 맑스의 눈에 법은 경제의 시녀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이런 상부구조는 각각의 개인들이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에 대해 직접적으로 대면하지 못하게 만든다. 오히려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는 사회의 문제를 개인에게로 환원시켜 버린다. 자본주의의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바로 누구나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고 승리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다. 지금의 사례를 생각해보면 2017년 지금 대한민국 청년들은 취업하기 쉽지가 않다. 많은 사람이 좋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 토익 시험을 보고, 스펙을 쌓고, 학점을 잘 받으려고 하며, 인적성 준비를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서류나 시험에서 떨어지면 자신의 능력부족이라고 자책을 한다. 사실, 취업 능력의 일부는 능력 문제일 수 있지만 거시적으로 보았을 때, 대한민국은 일자리 자체가 없다. 베이비 부머시대가 이미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는 형국이다. 고로, 청년 취업난은 구조적 문제일 가능성이 많다. 그렇지만, 이런 사회구조적 문제를 바라보는 청년은 그리 많지 않다.
계급투쟁의 역사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공산당선언, 팽귄북스, p.228)
부르주아지는 사람의 인격적 가치를 교환가치로 해소시켰으며, 특허를 통해 얻은 취소될 수 없는 무수한 자유 대신에 단 하나의 파렴치한 자유, 상거래의 자유를 세웠다. 한마디로 브르주아지는 종교적, 정치적 환상에 의해 가려진 착취를 벌거벗고 후안무치하며 직접적이고 잔인한 착취로 대체되었다. (공산당선언, 팽귄북스, p.231)
우리는 앞에서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무대를 보았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무대에서 어떤 플레이어들이 뛰어 놀고 있는가? 맑스는 인간의 모든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로 보았다. 즉,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갈등의 도살장으로 본 것이다. 이런,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갈등은 역사적으로 계속 진행되왔던 것이다. 먼저, 원시공산사회에서는 모두가 평등했다. 하지만, 잉여생산물이 생겨나고 소유하는 사람과 소유하지 못하는 사람이 등장하게 된다. 다음 단계는 노예제도로 자유인과 노예들의 갈등이었다. 그 다음 단계는 봉건사회로 영주와 농도로 갈등은 변화되었다. 그리고 근대의 계급투쟁은 바로 브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으로 보았다. 근대의 브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갈등은 기존의 계급갈등과 다른 양상을 보인다. 맑스는 리카도르의 노동가치론을 극단으로 밀어 붙인다. 리카르도는 지주가 아무런 생산적 기여도 하지 않으며 노동자의 노동력과 돈을 착취한다고 보았다. 맑스는 리카르도의 노동가치론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잉여가치론을 세운다. 잉여가치론의 플레이어는 노동자, 지주에 자본가를 더한 것이다. 즉, 자본가는 지주에게 땅을 임대하고 사업을 한다. 자본가는 노동자들을 착취하며 노동자들이 겨우 입에 풀칠할 만한 임금을 줄 뿐이다. 나머지는 자본가가 가지고 자본가는 그 중의 일부를 지주에게 준다. 맑스의 눈에 브르주아는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약자인 노동자들을 착취한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중세와 근대 초반까지만 해도 땅을 가진, 지주가 지배계급이 되었다.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지배계급이 되면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 즉, 그동안 토지가 누리던 지위를 자본이 우위에 서게 된 것이다. 맑스는 자본가라는 지배계급이 인류 최대의 끝판왕 지배계급으로 보았다.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부르주아지는 세계시장을 착취함으로써 모든 나라에서 생산과 소비에 범세계적인 성격을 부여했다. (공산당선언, 팽귄북스, p.232)
브루주아지는 농촌을 도시의 지배에 복속시켰다. 브르주아지는 거대한 도시를 창조했고, 농촌 인구에 비해 도시 인구를 크게 증가시켰으며, 그리하여 인구의 상당 부분을 농촌 생활의 우매함에서 구해 냈다. (공산당선언, 팽귄북스, p.233)
그러나 브르주아지는 자신에게 죽음을 가져올 무기를 버렸을 뿐만 아니라 이 무기를 휘두를 사람들, 곧 현대 노동계급, 프롤레타리아도 탄생시켰다. (공산당선언, 팽귄북스, p.236)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공산당선언, 팽귄북스, p.272)
맑스는 자본주의를 거대한 전지구적 문제로 보았다. 자본주의는 어떤 나라에서든 획일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리하여 한 두명의 자본가를 뚜들겨 잡는다고, 자본주의의 착취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마치, 2017년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어도 기존의 부조리한 사회시스템이 바뀌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맑스는 자본주의를 괴며시킬 수 있는 힘은 바로 도시의 노동자라고 생각했다. 도시의 발전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 근대 도시의 발전과 자본주의는 궤를 같이한다. 도시라는 공간은 수많은 노동자를 착취하는 공간이다. 도시에서 노동자들은 힘든 삶을 살아간다. 그렇지만 자본주의가 만든 도시는 아이러니하게도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함양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카페나 술집, 당구장 같은 곳에서 노동자들은 서로 만나고 대화를 하며 자신의 삶을 나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삶이 착취당한다는 것을 깨닫고 서로가 하나의 편이 된다. 노동자들은 고된 노동을 하고 오늘도 같이 술먹고 내일도 술먹고, 계속 같이 술을 먹으면 유대감이 생기고 종국에는 사회적 연대를 할 수 있었다고 믿었다. 노동자들은 가진 것이 없다. 그러나 맑스의 눈에 전세계의 모든 노동자들이 비슷한 모양세로 착취를 당하기 때문에 전세계의 프롤레타리아가 연대를 한다면 자본주의를 도시에서 무너트릴 수 있다고 믿었다. 사실, 현대의 눈으로 보면 맑스의 이론은 틀린 점이 많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는 절대 연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가 맑스의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의 정상처럼 보이는 것들이 수없이 많은 모순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안목을 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