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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Nov 24. 2017

태어날때부터 보수와 진보가 나뉜다고?

<바른 마음> 조너선 하이트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우리는 자신과 대화가 통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고로, 우리는 ‘말 잘통하는 사람’이 자신의 친구가 되고 말이 통하지 않으면 그냥 아는 사람이나, 잊혀질 인연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 드는 생각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과연 서로의 의견을 들으며 정확하게 이해를 하는지에 대한 의문점이 든다. 짜장면이나 전구라는 단어를 들으면 의사소통의 문제는 없다. 정확하게 말이 대상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추상적인 개념, 가령, 인생에 대해 말을 하면 어떻게 될까. 어떤 이는 인생이란 태어날 때부터 소명이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어떤 이는 세상에 떨어진 존재로 우리는 어떤 소명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재밌는 점은 우리가 인생을 각자의 방식으로 정의해도 어떻게 의사소통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보수와 진보에 대해서도 이런 일을 직면하고 있지 않을까. 보수라는 개념에 대해 어떤 이는 서양의 보수를 생각할 것이고 또 어떤이는 대한민국의 이념적 보수를 생각할 것이다. 진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는 과학의 발전을 진보라 생각할 것이고, 또 어떤 이는 사람들을 진보를 계몽주의로 생각할 것이고 또 어떤 이는 자본주의의 전복을 진보로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든다. 서로가 보수와 진보에 대한 개념이 다른데 이를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있을까. <바른 마음>을 쓴 조너선 하이트는 인간의 보수와 진보를 도덕적 직관에서 찾으려고 노력한다. 


서로 다른 도덕적 기준과 여섯개의 도덕적 가치


우리 모두 기본적으로 도덕 가치를 가지고 태어난다. 가령, 기차가 철로를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따라, 철로에 인부 열 명이 철로를 손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기차가 달려오는지를 모른다. 그런데 기차가 달려오고 있고, 그 기차가 멈추지 않으면 앞의 사람들은 죽게되는 것을 한 사람이 보고 있었다. 옆에 뚱뚱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무거워서 뚱뚱한 남자를 떨어트리면 기차를 멈출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 당신이 기차가 달려오는 것을 보고 있다면 뚱뚱한 사람을 떨어트릴 것인가? 이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뚱뚱한 사람을 철로로 떨어트리면 안 된다고 했다. 나중에 이와 비슷한 질문을 세상과 멀리 단절된 원주민들에게 질문했으나 모든 원주민들도 남자를 희생시키면 안 된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이로서 무엇을 알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적어도 도덕심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뚱뚱한 남자를 밀면 안 되는 이유는 바로 그 사람을 수단으로써 사용하기 때문이었다. 즉, 우리는 모두 도덕적 가치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 같다. 모두가 도덕심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그 도덕이 사람마다 발현되는 방식은 조금 다른 것 같다. 


하이트는 도덕을 여섯 개의 기준으로 나눈다. 배려, 공정, 자유, 충성심, 권위, 고귀함이다. 배려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타인을 돌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정은 정의로운 질서와 분배를 의미하며, 자유는 개인적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다면 개인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마음, 충성은 개인보다는 집단을 중시하는 마음, 고귀함은 더러워 지거나 타락하지 않는 마음, 권위는 윗사람에게 순응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이트는 이를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를 설명하는데 사용한다. 진보주의자는 배려, 공정, 자유에 중심을 두며 세상을 바라본다. 그에 비해, 보수주의자는 여섯 가지의 도덕을 모두 사용한다. 하지만, 선택의 기로에 서있을 때는 충성심, 권위, 고귀함을 상위의 가치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이츠가 진보와 보수를 마음에서 찾는 것은 우리에게 서로 물어 뜯는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 간의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기반을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면 그 사람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설명가능할까?


사실, 어떤 이론이라도 사회현상을 설명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닐지라도 나름의 부분을 설명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하이츠의 이론 또한 많은 케이스를 설명하지만 대한민국 같은 케이스는 설명을 그의 학설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은 도덕심에 따라 보수와 진보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환경적 요소가 컸기 때문이다. 사실, 진보주의자의 경우 하이트의 이론을 맞아 떨어질 수 있지만 보수는 그렇지 않다. 대한민국 대부분의 보수주의자들의 멘탈리티는 특수하다. 대한민국 보수의 멘탈리티는 이승만 정부 때 반공사상과 박정희 정부 시절의 경제성장이 한국적 보수의 멘탈리티를 떠받드는 기둥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안보도 중요하고 경제성장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대한민국 보수의 멘탈리티는 두 사상이 완전히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현대의 텔레비전에서 보이는 보수는 안보관이 극단적인 이분법으로 변질되었고, 경제성장의 가치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탐욕으로 변질되었다. 지금 현대의 보수정당들이 무너지는 것은 그들이 상식 밖의 일을 자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생산체계로 바라본 민주주의가 설명이 될까?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일종의 정보체계와 같았다. 많은 정치학자들이 논하는 민주주의는 경제학의 완전경쟁 시장과 같은 모델이다. 최하층부의 개인들(편형되어있지 않다고 가정)이 정보 생산체계를 만들고 그 정보들이 모여 각각의 그룹을 형성한다. 각각의 그룹은 자신들의 의견을 가지고 서로 경쟁한다. 서로 경쟁하는 사이에서 각각의 다른 정보체계는 최적균형점에서 민주주의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이런 민주주의 모델이 현대 사회를 설명할 수 있을까. 지금 민주주의가 겪고 있는 문제는 경제와 민주주의가 서로 궤를 같이 못한다는 것이다. 20세기 정치를 공부하려면 경제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정치와 경제는 바늘과 실 같은 존재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점점 커져서 세계화가 되었고 민주주의는 국가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경제와 정치가 딱 맞아 떨어지지 않게 되었다. 그로인해 과거보다 현대에는 수많은 복잡하고 '사악한' 문제들이 나타났다. 과거에는 세상이 현대보다 복잡하지 않았기 때문에 간단한 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했고 한 개인이 편향되지 않았다는 가정 또한 현실에 맞지는 않는다. 이런 점에서 <바른 마음>은 기존의 민주주의 이론이 가지고 있던 문제점을 나름 해결하려 했던 흔적이 보인다.


마지막은, 페이스북을 보고 느끼는 점이 있다. 2010년도에 페이스북을 시작했을 때는 외국 친구들의 피드로 가득찼지만 2013년에서 2015년 경에는 웃긴 자료와 광고가 넘쳐났다. 요즘의 페이스북 트렌드는 자칭 전문가가 너무 많다. 당연히 많이 배우신 분들이고, 창업하신 분들도 많고 똑똑하신 분들이 많다. 나도 예전에 같은 우를 범했지만 페이스북 전문가들의 말은 권위가 들어있다. 마치, 내 말이 진리라는 것, 마치 내가 답을 알고 있다는 것 말이다. 그들이 어떤 말을 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페이스북 전문가의 근처에는 그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전문가에 대해 비판을 하면 그 사람을 편드는 사람들은 비판자를 미친놈으로 여기고 파괴해야할 대상으로 바라본다. 태극기 집회에 나가셨던 분들도 나름의 신념과 도덕적 관념을 가지고 나간 것이다. 민주주의의 거대한 위협은 무엇일까. 바로 비슷한 사람끼리 모여서 상대방을 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각각의 집단이 서로를 이해하지 않고 이분법적으로 적으로 만드는 집단은 광기에 빠져든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ㅂ아야 할 것은 아무리 선한 의지로 뭉친 집단이라도 자신이 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집단은 상대방을 배척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답이니까 너는 틀린거니까! 이런 이분법적 사고는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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