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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Dec 22. 2017

사당동 25년 빈곤의 기록

<사당동 더하기25> 조 은


<사당동 더히기 25>는 두 가지 점에서 의미가 있는 책이다. 첫번째로는 질적 연구에 대한 연구자의 고민이며 두번째는 질적 연구를 통해 바라본 대한민국의 빈곤문제다. 이 책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장면이라면 금순 할머니의 집안은 사당동 원주민이었다가 임대 아파트로 이사간 가구다. 금순 할머니의 아들과 손자, 손녀는 고스톱이나 복권을 정기적으로 소비한다. 이 장면은 대한민국의 빈곤층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수학적으로 계산을 해보았을 때, 복권을 매일 한 장씩 사고 이를 무한급수로 계산하면 0에 수렴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즉, 복권을 계속 사다보면 어떻게 되든 당첨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는 대한민국 빈곤층의 암울한 현실을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사회에서 빈곤층으로 살게 되면 큰 돈을 버는 것, 계층의 변화를 이루는 것은 상대적으로 다른 계층에 비해 쉽지는 않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판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복권과 같은 '운'이다. 즉, 어떤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이들이 빈곤의 연쇄를 끊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개인의 노력으로 바꿀 수 있다면 그들의 개인적인 노력의 문제이지만, 이들이 빈곤의 굴레를 넘어서지 못하고 자식세대에게 빈곤을 물려주는 것은 바로 구조적 문제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연구자, 인간과 학자 사이에서...


연구 단계마다 성격은 다르지만 연구자의 입장은 자주 상반되는 윤리와 기대를 드러냈다. 연구자의 '중립성'은 연구의 시작 단계에서부터 지금까지도 계속 숙제다. 프로젝트가 시작될 때 이미 예상된 문제였다. 주민들 속에서 연구를 수행하는데 주민들의 이해관계와 무관한 입장에서 연구자가 지키는 '중립성'은 문제적일 수 밖에 없었다. (사당동 더하기 25, 또하나의문화, p.73)


<사당동 더하기 35>에서 독창적인 점이 있다면 바로 질적 연구를 하는 연구자의 고뇌가 책에 잘 묘사되었다는 것이다. 논문을 쓸 때, 연구자들이 명심해야하는 철칙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객관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학자와 대학원생들은 양적 연구를 선호하는 편이다. 특히, 통계의 기법을 사용하는데, 그 이유는 수치로 모든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숫자를 통해 보여주는 연구 결과에 대해 우리는 ‘객관성’을 보장한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많은 연구자들은 개량화된 변수들을 가지고 연구를 하며, 가설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들로 설명을 하려고 노력한다. 당연히 분석을 통한 변수들은 종속변수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통계 프로그램을 돌린 변수들이 사회 현상을 온전히 보여줄 수 있는가. 그것은 명확하게 아니라는 것이다. 가령,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할 때, 우리는 외적인 요소와 내적인 요소로 ‘나’를 설명할 수 있다. ‘나’는 몇 살이고, 키는 몇이며,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이며, 어디에 거주하며, 자동차는 몇 대인가를 통해 ‘나’를 설명하는 것은 외적인 요소로 나를 규정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나’는 어떤 일을 할 때 행복하며, 성격은 어떻고, 어떤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대한 생각은 내적인 요소로 자신을 설명하는 것이다. 전자적 방법이 양적 연구라면, 후자적 방법은 내적 연구다. 당연히, ‘나’를 설명하는데 두 가지 방법 중 어느 것이 우위라고 판단하는 것은 바보같은 생각이다. 둘 다 중요하다. 하지만, 그동안의 학계의 풍토에서는 양적 연구에만 너무 집중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해본다.


<사당동 더하기 25>는 질적 연구 중 특히 참여관찰법을 통해 사당동 사람들의 빈곤의 문제에 대해 연구한다. 하지만, 질적 연구의 딜레마는 바로 연구자의 중립성이다. 왜냐하면 중립성을 가지고 있어야 ‘객관성’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은 교수는 책에서 수많은 질적 연구의 딜레마의 고충을 이야기한다. 사례가 많지만 이를 관통하는 것은, 연구자의 충돌하는 두 가지의 정체성 때문이다. 첫번째는 실험장을 바라보는 냉철한 연구자이며 두번째는 연구자이기에 앞서 연구자 또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참여 관찰이라는 것은 연구자가 직접 연구 실험장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는 당연한 결과이지만 개인의 주관성이 들어갈 수 밖에 없다. 개인의 주관성이란, 한 개인이 살아왔던 삶의 배경, 현재의 계급과 사회적 위치, 인간의 욕망(가령, 돈을 벌고 싶은 충동)을 포함한다. 사실, 고등학교 때 배웠던 <사회문화>에서 참여관찰자는 객관성을 꼭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지향해야 하는 가치고 이상이지 이를 완벽하게 현실에서 이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조은 교수는 객관성과 주관성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했다. 나는 이 책에서 재밌다고 생각하는 것이 영상물을 제작하는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사실주의 작가들의 문학이 생각이 났다. 사실주의 문학은 세상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는데 그것이 과연 문학적으로 가치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답으로 사실주의 작가들은 모두 주머니에 거울의 파편을 들고다닌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세상을 거울의 각도, 높이, 방향에 따라 각각 달리 조명해준다. 즉, 아무리 객관적인 사실을 보여준다고 해도 그것은 개인의 주관성이 일정 정도로 반영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즉, 연구자가 완벽한 객관성을 가지고 연구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연구자는 객관성과 주관성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곡예사와 같다. 인간으로서 느끼는 감정과 학자로서의 이성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사실을 철저하게 분석하면서 사실이 보여주지 않는 것을 읽어내는 것이 학자이며 나는 이를 학자의 '곤'이라고 생각한다.



왜 빈곤은 되물림 되는가.


이 연구를 정리하면서 나는 가난한 사람들의 빈곤을 설명하는 ‘문화적 요인’이 아니라 그러한 문화를 가져오는 구조에 주목하게 되었다. 빈곤 문화가 있는 것이 아니라 빈곤이 있을 뿐이며 가난을 설명하는 데 가난 그 자체만큼 설명력을 가진 변수는 없다. ‘가난의 구조적 조건’이 있을 뿐이다. (사당동 더하기 25, 또하나의문화, p.304)


특히 이농한 대부분의 산동네 주민들이 생활양식은 ‘도시 속의 농촌적’ 생활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높은 교육열, 부지런함, 개별화가 덜 된 가족주의가 주요 문화였다. 이들은 형제자매가 많은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서 서울에 올라와 열심히 일했고 가족에 헌신적이었다. 그러나 임금이 너무 낮았거나 경기가 불안정해서 가정을 지키거나 가족을 건사할 수가 없었다. 철거 재개발, IMF, 금융 위기 등 구조적 충격이 왔을 때 이를 완화할 ‘완층 지대’도 없었다. 이들은 철거 재개발 정책이라는 자본주의적 공간의 재편에 바로 영향을 받았고 88올림픽 때는 일자리가 줄어 직격탄을 맞았으며 IMF 때는 경기가 둔화되면서 바로 실적으로 이어졌고 금융 위기가 닥쳤을 때는 카드깡으로 빌린 돈을 갚기 위해 주민 등록증을 빌려 주고 대포차나 대포 통장을 만드는 일에 가담하는 범법자과 되어 갔다. (사당동 더하기 25, 또하나의문화, p.312)


사당동의 탄생은 자못 복잡하다. 6.25 전쟁 이후, 많은 사람들이 남한으로 내려오게 된다. 당연히 서울에는 많은 도시 빈민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때 국가에서는 이 빈민들을 한 곳으로 몰아버리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리하여 도시 빈민들을 사당동에 넣어버렸다. 사당동 주민들은 서로 방을 만들며 그곳은 달동네가 되었다. 하지만, 사당동에는 기반시설이 부족하였다. 그러나 1965년에서 73년 사이에, 버스, 도로, 초등학교, 파출소가 만들어지고 서울이 점점 확장함에 따라 사당동에 지하철 역과 버스역이 생기며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사당동에는 시골에서 맨몸으로 온 사람들, 사업에 망한 사람들과 같이 어려운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다.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 이곳은 재개발 지역이 되고 사당동 원주민들을 사당동을 떠나게 되었다.


조은 교수는 사당동의 가난은 구조적 문제라고 결론을 짓는다.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발생했을 때, 사당동 사람들은 사회 문제의 여파를 견딜만한 힘이 없었다. 대한민국의 발전과정을 보면 이승만 정부는 안보국가였고, 박정희 정부부터 전두환 정부까지는 발전국가였다. 그 이후,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그리고 노무현 정부까지가 민주국가의 틀을 마련했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 때, 건설 토목 국가와 신자유주의 국가를 표방하며 사회복지 정책에 대한 의식은 사라지게 되었다. 이명박 정부의 경우, 작은 정부와 감세정책을 통해 정부의 재정이 부족하게 되었다. 즉, 사회복지정책에 사용해야할 재원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사회복지 정책의 부재는 대한민국 내의 사회적 약자들을 지켜주는 일을 국가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당동 주민들이 겪는 문제는 바로 사회적, 경제적으로 큰 여파가 몰려올 때,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사회적 안정망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사회 안정망이라는 것은 한 개인이 경쟁이나 사회의 문제를 통해 손해를 보았을 때, 다시 게임에 참여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를 보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정책은 빈곤층을 포함해, 학생, 창업자와 같이 한 번 실패를 하면 다시 일어서는 것이 쉽지가 않다. 나는 국가의 존재의미에 대한 생각해본다. 국가의 존재 이유는 적어도 한 개인이 풍족한 삶을 영위하게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고 이 권리를 지키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이렇게 지적했다면 조은 교수는 미시적 원인 또한 지적한다.


이들의 가난은 세계화나 금융 자본주의, 도시 공간의 자본주의적 재편 같은 구조적 요인과 동떨어진 듯하지만 실재로 이들의 삶은 구조적 충격 속에서 그들이 살아 내는 방식, 곧 삶의 약식이 빈곤 문화라고 이름 붙여진다. 그리고 그러한 빈곤 문화의 핵심에 그들의 성과 사랑과 결혼의 방식이 있다. (중략) ‘성적 문란’이나 가출, 이혼, 동거와 출사 등이 ‘가족의 위기’로 읽히고 빈곤을 재생산하는 빈곤 문화의 핵심 요소로 주목된다. (사당동 더하기 25, 또하나의문화, pp.313-314)


미시적 문제는 바로 가정의 문제다. 처음에 ‘성과 사랑과 결혼의 방식’이 재생산되는 빈곤의 문제라고 지적했는데, 사실 이 말을 처음들으면 이해하기가 어렵다. 조은 교수가 발견한 것은 사당동 사람들의 경우, 미디어의 사랑 이야기를 보며, 사랑에 대한 판타지에 빠진다는 것이다. 빈곤의 문제는 자신의 결정이 아니었지만, 적어도 사랑은 자신의 결정으로 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사당동 빈민들의 사례를 보면 온전한 가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온전한 가정이라는 것은 소득이 일정하며, 부모는 헌신적이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당동 사람들은 이혼을 하거나, 부모 중 한 사람이 중독자거나, 바람이 나서 도망가거나, 사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조은 교수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안정적인 가정이 빈곤의 연쇄를 끊을 수 있는 열쇠라고 생각한다고 나는 해석했다. 안정된 가정이라는 것은 가계 소득이 일정하다는 것이다. 한 가족 내에서 한 아이가 성장하며 필요한 것은 교육, 부모로부터 배우는 가정교육, 안정감, 사랑과 같은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안정된 가정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돈 즉 소득이 있어야 한다. 슬픈 현실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다는 것은 곧 밥을 먹지 못하는 곳이며 이는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빈곤의 연쇄를 끊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가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 말이 내포하는 것은 바로 한 아이가 적어도 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사회의 양극화가 점점 심각해지지만, 그래도, 계층을 뛰어넘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자식을 교육시키는 것이다. 


나는 책을 읽으며 빈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러면서 롤스의 정의론이 생각났다. 금순 할머니네와 사당동 사람들이 빈곤하게 된 것은 그들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개인의 능력 부족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연'의 일치였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6.25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금순 할머니는 힘들게 살았을까. 롤스식으로 이야기하면 우리는 모두 무지의 장막 속에서 원초적 평등 상태에 있었다. 금순 할머니는 빈곤의 공을 뽑은 것일 뿐이다. 우리는 빈곤한 사람을 바라보며 빈곤한 사람들의 행태와 겉모습에 대해 손가락질을 한다. 마치 그들이 빈곤이 그들의 결함으로 인한 것으로 치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빈곤은 구조적인 문제다. 마지막으로 니버의 말이 떠오른다. 개인에게 필요한 덕목은 이타성이다. 그리고 국가가 가져야할 덕목은 바로 정의다. 이 정의를 실현시키는 것은 바로 약자를 돕는 정부의 정책일 것이다. 정의로운 국가는 한 개인이 한 국가 내에서 숨쉴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나는 그것이 국가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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