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모더니티> 데이비드 하비
나는 이런 근대성 개념을 신화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철저한 단절이라는 개념이 가지는 힘은 설득력이 강하고 광범위하게 적용되지만, 장황적으로는 그런 힘이 발생하지도 않았고 발생할 수도 없다는 증거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파리, 모더니티, 생각의 나무, p.8)
미쉘푸코나 그의 스승이었던 가스통 바슐라르는 역사를 바라보며, 역사를 단절과 감싸기의 역사로 보았다. 즉, 17세기의 인간과 18세기의 인간은 완전히 다른 존재로서 본 것이다. 하지만 데이비드 하비는 이런 근대성에 대한 설명에 동의하지 않는다. 푸코의 경우, 에페스테메 (시대정신)을 통해 역사를 분절했고 단절시켜 보았다. 그러나, 데이비드 하비의 경우, 근대성을 바라볼 때 수많은 하부구조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근대성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근대성을 이야기하며 근대적 자아에 대해 과시를 하지만 하비는 모더니티의 환상을 깨고 그 안의 수많은 권력관계에 대해 파해친다. 즉, <파리, 모더니티>라는 책을 이해할 때는 프랑스 파리라는 거대한 무대 위에서 세 명의 배우가 등장한다. 첫번째는 제국과 오스망, 두번째는 브르주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동자들이다. 이 세 집단이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변화에 따라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는 것이 <파리, 모더니티>를 읽는 즐거움일 것이다.
근조환경의 발달과 자본주의
1848년에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적나라하게 드러나버린 자본과 노동력의 잉여는 건조환경에 대한 대규모 장기 투자 계획을 통해 흡수될 예정이었는데 이는 공간관계의 개선에 촛점을 맞춘 계획이었다. 제국이 선언된 지 1년이 못 되어 1000명 이상이 튈르리 궁의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었고, 미처 등록되지도 않은 수천 명이 철로 공장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1851년만 해도 한산하던 광산과 제련소는 증가하는 수요를 따라잡기 위해 전력 가동하고 있었다. 아마 자본주의 최초의 대 위기였을 사건이 자본과 노동력 과잉을 수송과 교통 시스템의 재편 작업에 장기적으로 채용함으로써 극복된 것으로 보였다. (파리, 모더니티, 생각의 나무, p.161)
데이비드 하비는 도시가 어떻게 자본주의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데 관심이 있었다. 그는 자본주의 재생산의 핵심은 바로 건조환경으로 보았다. 건조환경이란, 도로, 터널, 지하철, 사무실, 공장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과거 맑스가 브르주아의 부를 재생산하는 것이 공장으로 보았다면, 데이비드 하비는 도시 전체 즉 건조환경의 각각의 요소들이 부품이 되어 하나의 거대한 공장처럼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거대한 공장은 자본주의 체제를 확대 재생산하는데 기여를 하게 된다. 신맑스주의자들과는 다르게 데이비드 하비는 원조 맑스파의 느낌이 강하다. 맑스가 상부구조는 하부구조를 유지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것처럼, 프랑스의 수도 파리가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가 되는 과정 속에서, 정부, 금융, 부동산과 같은 상부구조들이 하부구조인 경제를 유지시키는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제2재정이 등장하고, 그 앞에는 오스망이 파리를 대대적으로 개조한다. 1848년 파리가 직면한 문제는 바로 자본과 노동력의 잉여가 등장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오스망은 파리 내부에서 대규모 공공사업을 진행한다. 도로, 하수도, 공원, 기념울, 상징적 공간, 학교, 교회, 관공서 건물, 주택, 호텔과 같은 건설 현장에 수많은 노동자들을 고용한 것이다. 이렇게 파리의 변화는 시작되었다. 오스망은 기존의 규제로부터 상품과 노동력의 흐름을 풀어주고 자본의 순환을 원했다. 그렇기 위해서는 국가에 돈이 필요했다.
국가가 돈을 빌릴 수 있는 원천을 만든 것은 바로 페레르 형제였다. 페레를 형제는 크레디 모빌리에라는 은행을 설립했다. 크레디 모빌레에는 투자은행이었다. 크레디 모빌리에는 금융 중개기관의 역할을 했다. 이들은 일반 대중에게 주식을 공모하여 소액 투자자들의 돈을 모으고 조성한 자금으로 철도나 도로에 투자를 했다. 투자의 수익금의 일부를 주주들에게 배당금 형식으로 나눠주었다. 또한 재정이 부족한 정부에게 신용시스템의 도입으로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었다. 즉, 한편으로 크레디 모빌리에는 금융의 민주화를 이루었으며 동시에 정부의 든든한 돈줄이 된 것이다. 사실 하비도 밝히고 있지만 금융산업의 발달은 도시의 자본주의화를 가속화시켰다. 이와 더불어 부동산 시장도 자본주의화의 다른 기둥을 차지하게 된다. 근조환경(교통, 시장,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당연히 토지비는 올라가게 된다. 토지비가 올라가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땅을 싼 값에 구입했던 매입자들이 갑자기 오른 땅 값에 대박을 치게 되고 파리의 부동산 시장은 투기 시장으로 변모한다. 토지비가 올라가게 되면 당연히 건물의 가치도 올라가게 된다. 그리하여 건물주들은 사람들에게 높은 임대료를 요구한다. 그리하여, 도시의 노동자와 기업가들의 대부분의 부는 임대료로 빨려들어가게 된다. 높아진 임대료 지불능력을 상실한 노동자들과 공장들은 도시 밖으로 이탈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파리의 도심부는 행정, 금융어브 상업, 관광 산업, 서비스 산업이 차지하게 되고 브르주아들과 지주들이 파리를 점령하게 되었다. 파리의 세금을 내는 쪽은 부르주아들과 지주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는 그들의 권익을 더 챙겨주고 지켜주려고 노력했다. 여기서 하비가 지적하는 것은 은행, 부동산 시장, 국가과 같은 상부구조들이 능동적으로 하부구조(경제)를 재생산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도시의 주인이 된 브르주아와 착취당하는 노동자들
기술의 재규정, 즉 생산 과정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노동의 사회적 분화가 진행되면서 생산이 기계와 공장제 생산으로 넘어가는 현상도 일어났다. 일부 산업에서는 수공업 기술이 배제되고 세분화된 분업 체제에서 요구되는 전문화된 기술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파리, 모더니티, 생각의 나무, p.254)
유럽인이자 아주 자본주의적인 합리적 시공간 개념과 개인적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고대, 비인간적인 아름다움, 무한한 거리와 마주한 것이다. 그리하여 미슐레와 생시몽주의자들은 오리엔트를 철도와 운하와 상업으로 관통시키고, 비합리적 오리엔트를 우월한 계몽주의적 합리성의 이름으로 정복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파리, 모더니티, 생각의 나무, p.387)
오스망과 제2재정은 중앙집권적인 강력한 국가를 만들려고 파리 개조에 착공했지만 그들이 원하는 권력은 오히려 자본가 계급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이는 노동자들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원래 파리에는 수공업자들이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소규모 작업장과 고급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도제 시스템을 통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생산과 판매가 하나인 상태로 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근대화가 진행됨에 따라 큰 변화를 일으킨 것은 바로 '분업'이었다. 기존의 수공업자가 칼을 만들면 홀로 칼의 모든 제작 과정을 관장했다면 파리의 근대화 과정 속에서 9개의 기술이 합해져야 하나의 칼이 완성되는 일이 벌어졌다. 기존의 수동업자들은 구체적 노동을 했다면 근대화가 되며 이는 추상적 노동으로 대체되었다. 이제는 노동자들이 고급 기술이 아니라 단순 노동만 할 수 있으면 노동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노동의 분업과 세분화는 파리라는 도시가 국제 도시가 되었기 때문이다. 파리는 이제 국제적인 경쟁을 시작한다. 국제 시장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값이 싸고 대량생산이 되어야 했다. 또한 이때, 수많은 이주민들이 파리로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은 아무 기술이 없어도 거대한 기계의 소모품이 될 수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당연히 임금은 낮아졌고 수많은 노동자들과 가족들은 사회 근교로 밀려나게 되었다. 파리의 집값과 임대료를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도시 내부에는 독신자와 노령층의 비율이 점점 늘어갈 뿐이었다. 대신, 돈을 버는 것은 자본가들이었다. 노동이 추상적으로 될 수록 파리 내의 양극화는 점점 커졌다. 자본가 계급은 자신들의 연합을 만들어 노동자들을 착취했다. 노동자들을 착취하면 효율성이 올라가고 더 많은 부를 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 사이의 갈등은 점점 커져갔다.
파리의 양극화를 잘 보여주는 것은 바로 만국박람회와 같은 스펙터클이었다. 가령, 만국박람회를 열어서 새로운 기술을 선보이며 화려한 쇼를 하자 수많은 외국인들이 그곳으로 몰려 들었다. 우리가 여행을 할 때 유명한 관광지에는 꼭 상품을 파는 곳이 존재한다. 파리에서 이런 상품을 파는 곳은 바로 백화점과 카페였다. 백화점과 카페는 외국인들과 돈 많은 자본가 계급이 찾아오고 구매력을 과시하는 곳이었다. 특히, 백화점은 노동계급을 배제하는 공간이었다. 백화점을 보더라도 이는 계급이 공간화된 것이다. 사실, 만국박람회와 같은 스펙터클은 정치적 목적으로 만들었지만 이 또한 소비와 자본 아래로 귀속되어 버린다. 파리의 변화는 원래 정치권력의 강화로 이루었지만 자본주의가 팽창하면서 자본주의가 모든 것을 잡아 삼킨 것이다. 하부구조의 변화 즉 도시의 변화는 사람들의 의식체계에도 변화를 일으킨다. 바로, 합리성과 효율성의 개념이 이제는 사회 전체의 절대적 가치로 점하게 된 것이다. 데이비드 하비가 지적하는 모더니티의 본질은 바로 한 사회에서 절대적 가치를 획득한 합리성과 효율성의 폭력성이다. 이런 사고는 서구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가게 되고 실증주의와 제국주의로 발전된다.
코뮌과 사회주의 정부
여성을 위한 시립 작업장 운영, 생산자와 소비자 협동조합의 장려, 빵집의 야근 중지, 임대료 지불과 채무 징수의 유예 (중략) 노동부의 창설과, 비종교적인 무상 초급 교육과 직업교육을 지향하는 강력한 조처들은 사회에 대한 괸심의 깊이를 입증했다. (파리, 모더니티, 생각의 나무, p.437)
파리코뮌은 자본주의의 폭력으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이 모인 단체였다. 파리코뮌은 지도층의 정치적 갈등과 정부군과 코뮌군의 전투중 두 집단 모두 잔혹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파리코뮌은 우리에게 시사점을 준다. 먼저, 그들의 개혁에 대한 선언은 파리에서 착취당하는 약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또한, 제2재정과 브르주아에 비해 파리코뮌은 상대적으로 민주적 노선을 취하려고 했다. 제2재정과 브르주아는 강한 힘을 지닌 국가를 원하고 파리를 그렇게 개조했다. 하지만, 그 개조의 반대급부로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민주의식의 싹이 나타났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하지만, 파리 코뮌이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공장의 교외화 때문이었다. 만약 공장이 도시에 있었다면 수많은 노동자들이 술집에서 썰을 풀면서 착취당한 이야기를 하며 프롤레타리아라는 계급을 형성하기에 좋은 환경이었지만, 시골로 간 공장은 노동자들이 연대 의식을 품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또한, 미숙련 이주노동자들이 계급의식이나 문제의식이 부족한 것 또한 한 몫을 했다. 그리하여 코뮌은 망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보면 데이비드 하비는 신맑스주의자지만, 맑스의 후계자 같은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