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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Dec 05. 2017

인간의 언어는 오해를 낳을 수 밖에 없다.

<오해> 알베르트 카뮈


마리아 : 그렇다면 왜, 나 돌아왔어요 하고 미리 말하지 않았어요? 남들은 백이면 백이 다 그렇게 하는 일인데 당연히 그렇게 따라해야 하는 것 아녜요. 상대방이 자시를 알아보기를 바란다면 자기 이름을 대는 것이 상식이죠. 자기가 아닌 것처럼 시치미를 떼면 결국은 모든 게 다 뒤틀려버리는 거에요. 낯모르는 사람 신분으로 나타난 집에서 어떻게 낯모르는 사람 대접을 안 받겠어요. 안 돼요, 안 되고말고요. 이건 아무래도 건전한 방법이 못 돼요. <칼리굴라. 오해 p168>


알베르트 카뮈의 <오해>의 줄거리를 간단히 소개하면 이렇다. 한 마을에 어머니와 딸 마르타는 여관을 운영하고 있다. 여관 일 때문에 지루함을 느낀 그들은 돈을 왕창 벌어서 바다로 떠나고 싶어한다. 하지만, 여관의 수입으로는 도저히 바다로 떠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모녀는 돈 많은 여행객을 죽이고 그 돈으로 바다로 갈 계획을 세운다. 마르타에게는 남자 형제가 있었는데 25년 전에 체코로 떠나 부자가 된 얀이 부인과 자식을 대리고 마을로 돌아온다. 얀은 모녀에게 깜짝 쇼를 보여주기 위해서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여관에 머물게 된다. 어머니와 마르타는 얀이 자신의 가족인지 모르는 상황이다. 마르타와 어머니는 얀에게 맥주에 수면제를 타서 얀을 잠들게 하고 얀을 강물에 빠트린다. 며칠이 지나고 오지 않는 남편을 걱정하던 마리아는 여관으로 가서 어제 며칠전에 머물던 손님이 모녀의 가족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그러자, 어머니는 목을 매달아 죽고, 마르타는 잠시 생각을 하고 강물로 뛰어 들어 자살하며 극은 끝난다.


도시 현대인의 눈 : 흐릿함에 대하여


마르타 : 설령 아들이 이 집에 들어선다 하더라도 다른 손님이 받는 대접을 받겠지요. 즉 친절한 무관심이죠. 우리 집에서 묵은 손님들은 모두 그것으로 만족했어요. 방값을 치르고 열쇠를 받았을 뿐 자기 자신의 속마음 같은 것은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그래 주면 우리 일이 간단해지죠. <칼리굴라. 오해 p185>


도시에 사는 현대인의 눈은 언제나 산만하다. 요즘 우리의 눈을 잘 보여주는 것은 스마트폰의 보급이다. 우리는 스마트폰을 보면서 심지어는 이어폰을 귀에 꼽고 길을 걷는다. 길을 걸으며 수많은 인파 속에서 요지로지 잘 피해서 다니는 모습은 신기할 따름이다. 즉, 현대인의 눈에는 한 사물이 정확하게 초점이 맞춰지지 않는다. 현대인의 시각에서 모든 물체는 뿌옇게 보인다. 마치 우리가 인공 눈물을 눈에다 뿌리고 곧바로 외부를 보면 정확한 초점이 보이지 않고 모든 사물이 형태로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 흐릿하게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마르타와 어머니이 만약 얀을 제대로 보려고 노력했다면 한 가족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모녀는 얀을 정확히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근대인의 비극의 시작점은 모두가 서로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도시에서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스쳐지나간다. 불교에서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지만, 그 말이 무색할 정도로 우리는 모두에게 무관심하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동차를 타고 가로수를 지나가는 것처럼 사람들을 바라본다. 근대인의 비극은 도시에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모두에게 무관심하는데서부터 시작한다. 마치, 마르타가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모두에게 무관심한 것처럼 말이다.



언어의 부조리 : 우리는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까


언어는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이며, 어쩌면 언어 자체가 인간의 존재 의미를 가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언어는 언어 자체의 한계성 때문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소통의 문제가 생긴다. 1990년대 초에 수단 내전에 일어났을 때 일이다. 한 젊은 사진가가 수단의 전쟁 상황을 보여주고 싶어 독수리와 죽어가는 아이의 사진을 찍었다. 뉴욕 타임즈는 이를 전면에 실었다. 그러하자, 수많은 미국인들이 사진가와 뉴욕 타임즈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왜 아이가 죽어가는데 아이를 구하지 않고 사진을 찍느냐는 비난이었다. 그리고 젊은 사진가는 1년 후에 자살을 한다. 누가 잘못했는가. 잘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전말은 이러했다. 사진가는 수단 내전의 참상을 보여주기 위해 외부로 멀리 나갔고 죽어가는 아이와 독수리를 발견했다. 사진을 찍고 아이를 구하려고 했지만 그 당시 수단에서는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지인과의 접촉을 정부 당국에서 막고 있었다. 그렇게 사진가는 고민하다 아이를 살리지 못했다. 그렇다면, 비난하는 시민들이 문제였을까. 시민들은 자신들의 도덕적 직관을 통해 당연스럽게 비난을 한 것이다. 왜냐하면 수단 내전 상태에 대해서 정보를 얻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비극은 사진가와 시민들 간의 의사소통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오해>의 경우도 그렇다. 얀은 진실을 밝히지 않고 오해를 살 만한 일을 했다. 어머니와 마르타의 오해는 여행자가 얼마나 돈을 가지고 여행하겠는가. 그 돈을 가지고 바다로 가겠다는 욕망도 모두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인간의 오해의 기저에는 상대방에 대한 관심이 없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바쁘며 모두 다른 배경에서 살아왔다. 우리도 그렇지 아니한가. 예를 들어 나는 좋은 의미로 한 말이 상대방에게 모욕적으로 들리거나 분게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남을 잘 알지도 못하는데 뒷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사실, 인간의 소통 문제는 인간의 본원적 부조리를 보여준다. 의사소통은 100% 전달 될 수 없다. 우리는 살아온 배경이 다르며, 성격도 다르고, 교육수준도 다르며, 해석의 능력 차이가 있다. 즉, 의사소통이라는 것은 언어의 한계 때문에 오해를 살 수 밖에 없고, 이런 오해는 인간 자체의 부조리를 보여준다. 즉, 인간은 인간 내부의 언어적 한계 때문에 소통을 할 수 없으며,  소통에 대한 오해 때문에 부조리는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오해는 바로 우연적 요소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부조리는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알 수 없는 형벌이다.



내 죽음이 강물을 바다로 만든다.


그러니 죽고 싶으면 죽으라지. 사랑해주지도 않는 그런 사람! 나를 가두어 놓고 사방의 문, 모두 다 닫혀버리라지! 당연한 분노로 몸부림치도록 나를 이대로 버려둬요,  어머니! 나는, 죽기 전에 하늘을 쳐다보며 하느님께 애원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저 먼 나라에서라면 도망도 칠 수 있고, 해방될 수도 있고, 서로 껴안고 몸을 부벼댈 수도 있고, 파도 속을 뒹굴 수도 있는 거야. 바다가 지켜주는 그 고장에서는 신들도 가까이 오지 못하지. 그러나 이곳에서는 사방을 둘러 보아도 눈길은 벽에만 부딪히니 땅을 치고 하늘 쳐바보며 애원의 시선을 던질 수 있을 뿐이야! 아! 하느님밖에 쳐바돌 곳이 없는 이 세상이 미워! 그렇지만 나는, 불공평한 처사에 신음하지만, 아무도 내 권리를 인정해주지 않지만, 나는 무릎 꿇지 않을 거야. 천만에, 이 세상 천지에서 설 곳을 잃고 내 어머니에게도 버림받고 스스로 저지른 죄만 가극한 가운데 홀로 남았으니, 나는 결코 화해하지 않은 채 이 세상을 떠날거야.  <칼라큘라, 오해, 책세상, pp.229-230>


<오해>의 비극에서 모두 우연적 요소에 의해 이루어졌다. 마르타가 바다에 가기 위해서 정확한 돈과 액수를 계산했다면 이상한 계획을 짜지도 않았을 것이다. 얀이 자신의 신분을 속이지 않았다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나 마르타가 신분을 숨긴 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려고 노력했다면 비극은 일어나지 않고 해피앤딩으로 끝났을 것이다. 마르타 가족이 직면한 부조리는 인간 존재의 부조리이며 소통을 해도 오해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 때문이었다. 어머니와 얀의 죽음을 본 마르타는 잠시 생각을 한다. 그녀는 그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었고, 부조리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단 한번의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것은 바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바다로 가지는 못했지만 강물로 뛰어 들어 자신의 죽음을 선택한다. 마르타의 죽음은 인간 부조리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녀가 선택할 사항은 없어지만 그녀는 죽음 앞에서 오로지 그녀의 실존을 완성했다. 그녀는 인간 부조리에 대해서 죽음으로 저항을 했고 자신의 목숨으로 그 대가를 치른 것이다. 그녀는 바다라는 이상향으로 가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죽음을 선택한 곳 바로 강물이 그녀의 이상향이 되었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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