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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Feb 07. 2016

나는 누구? 여기는 어디?

루이스 캐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알  수 없는 동화이다. 여기서 내가 원더랜드를 해맸던 것은 그 안의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동화는 차라리 생각을 안 하면서 읽는 것이 더 편할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그 의미가 매일매일 바뀌는 동화이다.


1. 미친 모자장수의 수수께끼 "왜 까마귀와 책상이 닮았지'


"까마귀와 책상이 왜 닮았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아 인터넷을 모두 검색해보았지만 문학적인 답에 만족시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루이스 캐럴도 처음에 이것을 썼을 때 답을 생각해 놓지 않았다고 한다. 나의 생각으로 이 질문의 답은 '답은 없다'일 것이다.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우리가 만나는 현상 하나하나에 설명을 하려고 한다. 아마 우리가 이 답에 설명을 하려고 할 때, 루이스 캐럴은 미소를 지을 것이다. 어린이의 관점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그냥 받아드릴 테지만 어른이 된 사람들은 이 문제에서 길을 잃어 이 문제에 대해 집중하게 되고 큰 그림을 보지 못하는 상황에 빠질지도 모른다. 우리가 원더랜드에 대해 생각할 때 제일 먼저 전제로 깔아야 하는 것은 원더랜드가 무의미의 세상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는 동화를 읽을 때 당연히 설명하려고 노력은 해야 하지만 한켠으로는 그냥 아무 근거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시각이 필요한 것이다.  미친 모자장수는 광인이다. 그의 말을 처음들었을 때 우리는 광인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광인의 언어가 오히려 진지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쐐기 벌레의 충고 '너는 누구냐'


앨리스는 토끼를 따라 원더랜드에 갈 때 추락을  한다. 그러하면서 앨리스의 크기가  거대해졌다가 개미처럼 작아지기도 한다. 쐐기 벌레가 앨리스에게 한 말을 생각해보자 "한쪽은 너를 크게 만들고, 다른 한쪽은 너를 작게 만들지" 이처럼 원더랜드는 자의식이 흔들리게 만드는 세계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질문은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와 같은가?' 라는 질문이다. 이것은 실존적 질문이다. 까뮈의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세상에 무관한 사람이며 누군가를 죽일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그날의 태양이 너무나 강하여 뫼르소는 짜증이 났고 그 짜증이 아랍인을 총을로 쏘게 만드는 방아쇠가 되었다. 즉, 인간이라는 존재는 아무리 합리적 사고를 한다고 해도 순간의 감정에 따라 자신의 모습이 바뀌기 마련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공작부인이다. 자신의 남자아기 때문에 짜증나 있지만 나중에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앨리스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그녀의 모습은 인간이 누구나 상황에 흔들린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인간의 합리적인 모습이 이상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며 오히려 인간이라는 존재가 비합리적인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앨리스는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고군분투한다. 이것이 바로 앨리스가 거대한 무의미의 세계 원더랜드와 싸워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녀의 정체성을 흔들리게 하는 원더랜드는 혼돈과 광기의 세상이다.


3. 채셔의 미소 "여기 있는 것들은 모두 미쳤거든 나도 미쳤어, 너도 미쳤고..."


채셔 고양이의 이런 대답은 우리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과연 광기라는 것은 규정가능한가?'이다. 우리는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있는가? 우리는 꿈속에서 깨기 위해 머리에 총알을  박거나 심연으로 몸을  던지곤한다. 즉, 꿈에서는 우리가 광기에 휩쌓인 일을 한다. 지금 우리가 숨쉬는 이 세상이 꿈이 아니라는 보장이 없다. 내가 느끼는 현실이 과연 진짜 현실인가? 우리는 이 답에 대해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우리는 세상이 발전하고 의학이 발전하면서 광인들을 병원이라는 곳에 강금시켜 버렸다. 이것은 인간의 합리성에 따라 인간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왔다. 하지만 보통 사람과 광인을 나누는 기준이 인간의 합리성에 따라 나눠 놓았다고 하지만 구분 기준이 된 이성이나 합리성을 우리가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인간이 합리적 존재라고 이야기하며 언제나 바뀌지 않는 인간의 이성이 있다고 하지만 인간의 실존적 상황에서 합리성은 언제나 불완전한 것이다. 우리는 꿈과 현실을 정확히 구분하지도 못하면서 꿈이라는 것을, 비합리적인 것을 그냥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4. 원더랜드의 통치자 하트의 여왕 "목을 처라 (off with his head)"


하트여왕은 원더랜드의 통치자이다. 그녀의 분노는 의미없는 분노이다. 이 분노는 원더랜드의 모든 주민들에게 가하는 분노이다. 그녀의 명령 "그의 목을 처라'는 주민들의 위협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처형을을 당하는 사람은 없다. 원더랜드의 사는 사람들은 이런 의미없는 명령에 두려움을 느낀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모두가 처형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겁을 먹는 것... 무의미에 대한 두려움이다. 원더랜드의 통치자 하트 여왕의 모습은 앨리스의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앨리스는 원더랜드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려 하지만 이와 더불어 자신의 모습이 흔들리는 것을 표현된 것이 바로 하트의 여왕이다. 앨리스와 하트 여왕의 갈등은 의미있는 존재와 의미 없는 존재의 전투이다.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당연히 존재가 하니까 존재하지 않는 것도 존재하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앨리스는 하트 여왕의 무의미에 대해 분노를 하며 소리친다. '바보 같은 소리, 말도 안돼! 처형이 먼저라니!' 즉, 앨리스라는 인물은 혼돈의 원더랜드에서 유일하게 실재하는 존재가 원더랜드의 권위를 찾아가는 여행이다. 그녀가 하트의 여왕의 무의미한 명령에 대해 분노하면서 현실세계로 돌아온 것은 그녀가 자신의 정체성을 지켰고 찾은 것을 의미한다. 



5. LonderLand


원더랜드는 무의미와 혼돈이 뒤범벅 되어있는 세계이다. 이제 앨리스는 런던으로 돌아왔다. 우리도 그녀를 따라 세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원더랜드와 런던이 하나로 겹쳐보이기 시작한다. 두 세계가 하나로 겹쳐지면서 이제 세상과 원더랜드는 LonderLand가 되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잃어가는 세상은 비단 원더랜드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 숨쉬는 이 세상도 우리 자신을 잊게 만들어 버린다. 앨리스가 원더랜드로 갈 때, 토끼굴을 따라 추락하는 모습은 우리가 나이들 들어간다는 것이며 우리의 삶이 지나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의 추락은 처음에는 공포를 유발하며 내 자신이 사라져 간다는 공포감을 느끼게 만든다. 하지만 계속 떨어지고 시간이 흐르다 보면 우리는 그것이 하나의 일상이 되고 정체성이 사라져 간다는 것에 큰 고민을 하지 않는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으며 누군가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고민할 것이며 또 누군가는 '내가 누구였더라' 질문을 던지며 잃어버린 자신을 찾으려고 마음 먹을 것이다. 채셔 고양이가 말했듯이 "그러면 어느 길을 가든 문제없어'는 우리가 여행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게 하는 원더랜드 같은 이 세상에서 이 동화를 읽으며 아이들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찾아야 할 것이며 어른들은 잃어버린 자신을 찾으러가는 여행을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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