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투 40년> 이극로
최근, <말모이>라는 영화가 나왔다. 조선어 학회에 관한 내용이라고 들었다. 영화는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영화에 나온 인물들이 모두 가상의 인물로 영화를 구성한 것이었다. 예전에 한국 근현대사를 열공하던 시절에 조선어학회에 등장하는 이름은 바로 최현배였다. 지금도 조선어학회라고 하면, 반자동적으로 최현배의 이름이 떠오르는 것은 암기학습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던 중, <건축왕, 경성을 건설하다>를 읽으며,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조선어 학회의 인물을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고루 이극로 선생이었다. <말모이>의 영화에서 윤계상이 연기한 인물의 영감을 준 실재 인물이 이극로 선생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궁금증에 조선어학회를 구굴창에 치자 연관 검색어에 바로 최현배가 뜨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너무 궁금해서 이극로 선생에 대해 찾아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극로 선생이 대한민국 역사 속에 이름을 감춘 이유가 있었다. 바로, 이극로 선생이 월북을 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고위직까지 올라간 것을 감안한다면, 대한민국 정부의 관점에서 이극로 선생의 자취를 지울 필요는 있어 보인다. 개인적으로 이극로 선생이 어떤 이유던, 월북을 한 것에 대해서는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다만, 그가 월북하기 이전에 사전 작업을 하고, 조선민족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추장과 <우리말 큰사전>
니로서는 그때 압록강 항로에서 얻은 느낌이 중대한 것을 이제 다시 인식하게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그때에 느낌이 내가 조선어 연구에 관심하게 된 첫 출발점이오 또 조선어 정리로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과 표준어 사정과 조선어 대사전 편찬 등의 일에 전력을 받치게 된 동기다. 이 항행 중에 하루는 일행이 평북 창성 땅인 압록강변 한 농촌에 들어가서 아침밥을 사서 먹는데 조선 사람의 밥상에는 떠날 수 없는 고추장이 밥상에 없었다. 일행 중의 한 사람이 고추장을 청하였으나, 고추장이란 말을 몰라서 그것을 가지고 오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가지로 형용을 하였더니, 마지막에는 "옳소, 댕가지장 말씀이오?" 하더니 고추장을 가지고 나온다. '사투리로 말미암아 일상생활에 많이 쓰이는 고추라는 말을 서로 통하지 못하니 얼마나 답답한 일일까......' (고투 사십년, 아라, P.35-36)
이극로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학구열이 높았던 것 같다. 집은 가난한데, 글을 배우기 위해서 노력하는 이극로의 모습을 보며 생각을 많이하게 된다. 농사일을 하며, 글을 공부하며, 청소년 시기에는 마산에 있는 학교로 진학해 상투를 자르고, 서구 문물에 관심을 가졌다. 상투를 자르고 집으로 갔을 때, 이극로의 집은 이극로의 모습을 보고 개탄을 한다. 집안의 반대에도 이극로는 단발을 하고 다닌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극로라는 인물은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은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러다, 그는 서간도로 넘어가게 된다. 서간도에서 고추장에 대한 일화가 있는데, 고추장을 달라고 하는데, 고추장이라는 표준어가 없어서 같은 민족임에도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이 젊은 이극로에게는 큰 상심으로 남았던 것 같다. 그의 멘탈리티를 조금 읽어보면, 나라가 힘을 가지고 적과 싸우려고 하면 명확한 소통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서로 사용하는 언어가 통일이 되어 있지 않으면, 오해가 생기고 함께 연대를 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 사건이 있고 나서, 이극로는 서간도에서 유명한 독립군들과 함께하며, 한글을 가르치기도 하며, 상해에 있는 대학에서도 공부를 한다. 상해에 있는 대학에서 이극로는 의과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나, 취미를 붙이지 못한다.
외국에서의 충격, 표현의 자유에 대하여!
그대 나라말은 어째서 이다지 철자법이 통일 못됐는가? 사전이 없다니 참말인가! (고투 사십년, 아라, P.148)
나는 중학으로부터 대학까지 10년 동안 독일 교육을 받는 중에 독일 정신을 알게 되었으니, 그것은 근로, 조직, 과학, 무사 이 4대 정신이다. (고투 사십년, 아라, P.88)
내가 영국에서 깊이 느낀 것은 영국의 언론 자유다. 일요일에나 기타 공휴일에 보면 큰 거리에나 공원에 마치 야시장 노천 가게를 죽 벌려 놓듯이 곳곳에 각 정당이나 각 종교 단체가 기타 사회단체가 각각 노천 연대를 차리고 자기의 주의를 선전하는 것은 물론이요, 영국 식민지 백성들이 와서 자기의 독립 연설을 하는 연대까지 나타난다. 그리하면, 오고가는 사람들은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제 마음에 맞는 대로 들어서 사상을 계발하며 사회정세와 국세정세를 통찰하게 된다. 그 결과는 영국 사람이 모든 일에 억제의 태도로 나가게 하고 맹목적 태도를 없에게 된다. (고투 사십년, 아라, P.102)
이극로는 30세에 베를린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그곳에서 서양의 문물과 통계기법 등을 배우기도 하며, 프랑스에서는 조선어 음성학에 대한 연구도 하게 된다. 유럽에서 교육을 받으며 이극로는 많은 생각을 했다. 첫번째는 독일에서 조선어 강의를 하는데, 유럽 친구들이 조선어는 왜 철자법이 통일 되지 않았냐고 묻게 된다. 고추장 사건이나, 유럽 친구들의 이런 질문은 이극로의 상심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조선어가 하나로 통일 되어 있지 않은 것 말이다. 또한, 영국 대학에서 1년 청강을 하며, 영국을 돌아본 것 같은데, 그곳에서 이극로는 언론의 자유에 대해서 생각한다. 사람들이 공적 공간에서 자신의 사상과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유가 그 당시 조선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극로는 자유롭게 말을 하며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자율성을 가지고 국민이 아닌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가지게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언론의 자유의 전제는 바로 통일된 맞춤법과 표준어다. 아무리, 자신의 의견을 필역하더라도 나머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말을 한다면, 함께 힘을 합할 수도 없고, 연대할 수도 없다. 젊은 이극로의 생각 속에는 조선의 자유를 위해서는 조선어를 통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준 것이다.
언어는 한 국가의 국력이다.
그러나 한 국민 안락에 빠지면 그 국가가 미약하거나 멸망하기 쉽다. (중략) 대 자연의 위력과 싸우고 사는 인고단련하는 어떠한 역경에도 살아 갈 수 있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제 조선 민족은 고구려의 무강을 가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는 생각이 났다. (고투 사십년, 아라, P.128)
나는 이 언어 문제가 곧 민족문제의 중심이 되는 까닭에 당시 일본 통치하의 조선 민족은 이 언어의 멸망이 곧 따라 올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어문운동이 일어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다는 것을 여러 동지들에게 말하였다. 이것으로서 민족의식을 넣어주며 민족혁명의 기초를 삼고자 함이다. 그리하여, 먼저 조선 어문을 학술적으로 천명하려면 난마와 같은 불통일의 철자를 통일시키며, 방언적으로만 되어 있는 말을 표준어를 사정하며, 외국어 고유명사와 외래어의 불통일은 그 표기법을 통일시지 아니 하고는 사전도 편찬할 수 없기 때문에, 경제적 기초를 세우기 위하여 조선어 사전편찬회를 조직하였다. (고투 사십년, 아라, P.185)
내가 조선 땅이 돌아선 날부터 국어 운동에 심려을 바치게 되므로 나의 가정생활이란 너무도 등한하였다. 조선어학회의 경제적 기초가 서지 아니한 것만큼 나의 가정뿐만 아니라 편찬실 동인들의 가정은 다 굶는 때가 가다금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고투 사십년, 아라, P.187)
이극로는 부산에 입항해, 곧바로 조선어 사전을 만들기로 마음 먹는다. 그는 조선인으로서 세상의 풍파 속에서도 견디고, 강한 민족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한 민족이 되는 것은 바로 언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언어에는 그 나라의 정신과 사고가 들어있다. 예전에 4개 국어를 하는 분이 있었는데, 어떤 복잡한 일이 있으면, 각각의 언어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언어 자체가 생각하는 방법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어로 생각해서 답이 안 나오던 것이 영어나 프랑스어로 생각을 하면 말끔하게 답이 나온다는게 그 분의 주장이었다. 1949년대 일본이 조선어 말살 정책을 시작한 것은 조선인 또한 일본인처럼 행동하고 생각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이극로는 조선의 해방, 자유를 위해 우리말을 지켰다. 조선어학회를 운영하면서 경제적으로 쉽지는 않은 것 같다. 그래도, <건축왕, 경성을 건설하다>의 주인공 정세권이 경제적 지원을 해주고, 많은 민중이 이극로와 조선어학회를 응원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사전의 원고를 빼았겼지만, 극적으로 서울역 부근의 창고에서 사전의 원고를 찾게 되어, 사전을 편찬하게 되었다. 이극로의 자서전을 읽다보면, 어려운 일을 참 많이 겪는 것을 볼 수 있다. 지금 우리는 한국어를 사용하면서, 나름의 표현의 자유를 가지고 의사전달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편하게 말할 수 있는 한국어가 있기까지 한 학자의 고민과 많은 조선 민중의 노력과 핏값이 지불되었는지를 곰곰하게 생각해 본다. 마지막으로 <말모이>에 대해서 아쉬운 점은, 1940년대 사전 편찬에만 그 이야기가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마 그 부분이 극적이고 조선 민중들의 노력을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이겠지만, 한 학자의 고뇌와 왜 사전을 편찬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 부분을 조금 더 다루었다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정세권에 대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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