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김경민>
당시 경성에 3명의 왕이 있다고 했어요. 유통왕(박흥식), 광산왕(최창학), 그리고 건축왕(정세권) 우리 아버지가 건축왕이라고 불리었어요.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이마, P.55)
익선동을 가본다. 많은 커플들이 서로 손을 잡고 다니며, 사진을 찍어주며 웃고 있다. 맛집들도 많이 있고, 예쁜 한옥의 자태가 사람들을 매혹시킨다. 외국인 관광객들도 익선동을 찾는다. 한옥과 좁은 골목들 사이로 하늘이 참 아름답다. 우리는 익선동을 갈 때, 한옥을 바라보며, 데이트를 하고, 맛집을 다니고, 골목길에서 사진을 찍는다. 그런데, 이런 익선동을 누가 만들었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는 바로, 정세권이다. 정세권은 대한민국 최초의 디벨로퍼다. 디벨로퍼란,토지를 매입해 건물을 개발하고 매도 또는 임대해 자본을 축적하는 사업가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7차 교육과정 세대로 국사와 한국근현대사를 심도 있게 공부한 사람이다. 그런데, 정세권이라는 이름 석자를 들어본 적은 없다. 그 만큼, 정세권이라는 인물은 역사에서 잊혀져 버린 존재다. 그런데, 정세권이 한 일을 한 번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경성, 소비도시에서 산업도시로의 전환
1920년대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이 토지를 점유하는데에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조선인들이 경성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지만 일본인들이 토지를 더 많이 소유하고 있었으며, 좋은 장소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1910년대는 일본이 조선인의 목을 조이고 있던 시기였다. 경찰들이 조선인을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시기였다. 그러나, 3.1운동이 일어나고 일본은 통치방식을 바꾸기 시작했다. 폭력으로 조선인들을 무릎 꿇게 할 수 없으니, 유화정책을 펼치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일본은 그동안 일본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회사를 차릴 수 있던 회사령을 철폐해 버리고, 신고제로 제도를 바꿨다. 그리하여, 경성에는 일본 기업과 조선의 기업이 늘어나게 된다. 사업체가 증가하자, 자연스럽게 노동력이 경성으로 유입된다. 즉, 그동안의 경성은 소비만을 하는 도시였지만, 1920년부터는 공장과 같은 시설이 들어오게 되어 상품을 생산하는 곳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산업도시로 바뀌자, 조선인들도 경성으로 모였지만, 1910년부터 일본인들도 경성으로 몰려 들었다. 도시가 산업도시로 바뀌게 되면 도시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 중에서 제일 큰 문제는 바로, 주거문제다. 인구가 많아지니, 주거의 수요는 늘어나며 집값은 폭등하게 되고 주거의 질은 나빠지게 된다. 일본총독부는 일본인을 위해 조선의 국공유지를 강탈하고 그곳에 일본의 행정시설을 건설한다. 그러니, 많은 일본인들이 행정시설 근처로 이주를 하게 된다. 일본인이 경성 중심부로 몰려든다는 것은 조선인들의 거주지를 일본인들이 야금야금 차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에 따라, 건축왕이 나타난다. 건양사라는 회사를 만들어, 조선인들의 주거지를 위한 주택사업을 시작한다.
건축왕, 새로운 한옥을 만들다. (북촌의 탄생)
조선계 근대적 디벨로퍼들이 조선인을 위해 집단적으로 공급한 한옥은 기존의 한옥과 전혀 다른 행태였다. 이 한옥들은 과거와 달리 아주 작은 규모였고, 한 채씩 지어진 것이 아니라 대단지로 개발되었다. 우리가 현재 삼청동, 가회동, 익선동에서 볼 수 있는 근대적 한옥집단지구가 탄생한 것이다.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이마, P.47)
위생시설인 화장실이 도시형 한옥의 내부로 들어오고, 부엌이 입식구조로 바뀌었다. 압축적인 공간 활용을 위해 외부공간이었던 대청마루는 외부 덧문을 추가해 내부 공간인 거실로 바꾸었다. 수납공간이 적다는 전통한옥의 문제는 도시형 한옥의 바깥처마까지 방의 벽면을 확장함으로써 추가 공간을 확보해 해결하고자 했다.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이마, P.53)
당시 한옥은 거대했다. 가령, 한옥의 크기가 100평이라고 한 다면, 그곳에는 한 가족 밖에 살 수 없었다. 그런데, 정세권은 발상의 전환을 한다. 100평의 토지를 5등분으로 하여 20평대의 한옥을 만든다. 그렇게 되면, 도시문제였던 도시문제는 해결이 되고 디벨로퍼 입장에서도 이윤을 효율적으로 낼 수 있다. 또한, 기존의 한옥이 멋을 많이 부렸다면 정세권의 한옥을 효율성을 추구했다. 사실, 지금 우리가 익선동에서 보이는 한옥은 전통 한옥은 아니고 개량형 한옥이다. 정세권은 한옥을 건설하며, 매매와 임대를 하며, 조선인 자본가가 되었다. 부동산 디벨로퍼가 돈을 버는 방법은 두 가지다. 토지를 싸게 사서 건설해 비싸게 판매함으로 얻는 자본수입과 부동산 매입 혹은 건설 후 다른 사람에게 임대를 주고 임대료를 받는 임대수입이 존재한다. 정세권은 초창기에는 자본수입을 중심으로 자본을 축적했다면, 나중에는 임대수입을 중심으로 하였다. 즉, 두 전략을 도시에 사용한 것이다. 정세권은 건설을 하고, 지역을 활성화시키는 역할도 하였다. 여기까지 보면, 정세권은 단지 자본만을 축적한 사업가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그의 자본을 자신만을 위해 사용한 것이 아니라 민족을 위해 사용했다.
건축왕, 민족운동에 참여하다.
1920년대 정세권은 급속히 부를 축적하며 대자본가로 성장하면서도 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가 참여한 민족운동 관련 조직 가운데 공식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은 조선물산장려회를 비롯해 양사원, 신가회, 조선어학회 등이 있다.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이마, P.119)
여러 난관 속에서 1939년 봄에 어휘 수집이 대강 마무리되고, 1942년 가을에는 어휘 카드의 초벌풀이 달기가 대체로 마무리되어, 사전체제로의 원고 편성이 상당 부분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조판된 것까지 합쳐서 약 6000쪽에 달할 정도로 대단한 작압량이었다. [큰 사전] 완성을 목전에 둔 1942년 가을, 10월 1일 발생한 조선어 학회 사건을 빌미로 일제는 학회를 해산시킨다. 그리고 일제는 조선어학회 33인을 비롯해 정세권 등 도움을 준 인물들까지 모두 연행해 수감했고, 사전 원고 및 관계 서류 일체를 압수했다. (중략) 1945년 9월 8일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다. 서울역 운송부 창고 속에서 사전 원고가 발견된 것이다.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피고인 자격으로 불복 상고를 하고 이에 증빙자료들이 함흥법원에서 서울고등법원으로 이송되던 중에 서울역 운송 창고에 방치되어 있던 것이다.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이마, P.177-178)
내가 한국 근현대사를 배울 때, 1920년대에 물산장려회와 조만식 선생의 이름만 나온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책에 따르면 조선물산장려회를 네 시기로 구분한다고 한다. 1923-24년에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함께 주도하던 시기, 1925년에서 29년 사이에는 민족주의 계열 명망가가 주도하면서 일분 상공업자들이 가세하던 시기, 1929에서 32년 사이에는 상공업자들이 사업을 적극적으로 주도한 부흥기이며 마지막은 1933년부터 37의 쇄락기다. 29년 이전까지 조선물산장려회는 임대료도 지불못하는 불쌍한 조직이었다. 안재홍은 물산장려회의 문제를 고민하며, 상공업자들을 끌어들이게 된다. 정세권은 29년에 자신의 자본을 들여 물산장려회를 지원하게 된다. 안재홍과 정세권은 물산장려 운동에서 실용적 노선을 취했지만 그 반대에는 이상적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존재했다. 실용주의 노선과 이상주의 노선이 격돌하고 조선물산장려회는 분열하게 된다. 정세권은 물산장려회에 대한 지원을 끊는다. 이후, 정세권은 고루 이극로와 인연을 맺는다. 이극로는 한국어 사전을 편찬하기로 마음 먹는다. 이때 조선어학회를 지원한 것 또한 정세권이었다. 정세권의 지원 속에 사전편찬 산업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1942년 이후, 일본은 조선어학회와 정세권을 잡아가서 고문하게 된다. 이후, 일제에 의해 정세권은 회사와 자본을 거의 대부분 잃게 된다.
대한민국 디벨로퍼의 아버지, 정세권 (공공성을 생각했던 디벨로퍼)
정세권의 일대기를 바라보며, 디벨로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디벨로퍼는 사익을 추구하며, 자본을 축적한다. 이것은 비단,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것이다. 그렇지만, 무리한 사익추구로 인해, 도시는 아름다움을 읾게 되었다. 개성 없는 건물들, 인간의 사익을 끝없이 밀어붙인 고시원 등등을 보면, 도시계획 분야에는 정부의 개입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정세권이라는 인물은 재밌는 인물이다. 조선 최초의 디벨로퍼로서, 돈을 많이 벌게 되고, 그 돈을 자신을 위해서만 쓴 것이 아니라, 민족 운동을 위해 사용했다는 것은 정세권이 사회의 공익을 생각했다는 것이다. 공익과 사익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참 아름다운 것 같다. 현대의 디벨로퍼나 개발 분야를 떠나서, 우리가 잃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회에 대한 공공의 이익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모두가 공익을 추구하라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많으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가진 사람들, 권력을 가진 사람들,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 자칭 리더라는 사람들이 공공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대중은 이런 사람들에 대해 분노한다. 자신들은 공익을 추구하지 않으면서도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공익성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수준은 바로 리더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수준이라고 하였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일제강점기 때보다는 경제적으로 발전했지만, 리더들의 수준은 역으로 떨어지지 않았나 생각을 해본다.
이극로 선생에 대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