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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Apr 06. 2018

혼돈과 진리가 공존하는 도서관

바벨의 도서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바벨의 도서관 (혼돈과 진리의 만남)


‘도서관’의 모든 사람들처럼 나는 젊은 시절 여행을 했다. 나는 한 권의 책, 아마도 편람 중의 편람일 책을 찾아 떠돌아다녔다. <픽션들, 민음사, P.98>


<바벨의 도서관>은 참 제목이 아름답다. 사실, 제목을 짓는 것은 글을 다 쓰고 나서다. 그렇기 때문에 제목을 잘 분석해보면 모호한 책의 내용도 조금은 잘 보이지 않을까 생각을 한다. ‘바벨’은 성경에 나오는 바벨탑이다. 인간들은 하나님에게 더 다가가고 싶어서 하늘로 끝없이 이어지는 탑을 건설했다. 그 당시 인간의 언어는 모두 같았다. 하지만, 신과 맞먹으려는 인간의 자만심에 하나님은 분노를 하고 바벨탑을 부숴버리고 인간의 언어를 모두 다르게 만들어 버린다. 그리하여, 그동안 소통이 잘 되었던 인간들은 언어가 달라졌기에 소통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것은 마치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상황가 오버랩이 된다. 모든 것이 완전한 세상에서 인간은 불완전한 세상으로 분리된다. 즉, 인간이란 존재가 혼돈 혹은 무질서의 세계로 떨어지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벨은 혼돈 혹은 무질서한 세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에 비해 도서관하면 우리에게 떠어로는 생각은 진리의 보배다. 우리는 통념상으로 오래된 책들이 모여 있는 도서관을 진리가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바벨의 도서관>이라는 단어는 매우 이율배반적이다. 너무 멋져 보이는 제목을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바꾸면 ‘혼돈 혹은 무질서의 진리’ 정도 되겠다. 우리의 통념상 진리는 명쾌하고 완전해야 한다. 그 안에 무질서나 혼돈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진리가 혼돈이라는 말은 어귀가 맞지 않는다. 보르헤스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절대적 신의 진리나 이성론자들이 말하는 하나의 명쾌한 진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도서관 속에 수많은 책들의 저자들처럼 각각의 책들이 모여서 진리를 만든다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생각했던 주체성을 우리는 찾을 수 있을까.


사실 오른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곳에서 우리의 언어는 방언이 되고, 구십 층쯤 위에서 우리의 언어는 이해 불가능하게 된다.  <픽션들, 민음사, P.101>


자신의 ‘변론서’를 찾던 사람들은 누군가 자기의 변론서를 찾거나, 아니면 그 변론서의 엉터리 판본을 찾을 확률이 ‘영’에 가깝다는 것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픽션들, 민음사, P.104>


그렇다면 <바벨의 도서관>의 의미를 알아봤다면 도대체 이 도서관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던 세상이며,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기도 하며, 우리가 죽고 계속 존재할 세상이기도 하다. 우리는 세상이 언제나 합리적이고 예측 가능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특히, 데카르트가 살았던 시기부터 19세기의 실증주의 시기까지 이성의 승리를 외쳤고, 이성으로 설명 불가능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현대 도시를 살아가는 우리의 입장에서 데카르트가 주장하는 이성의 승리나 중세 시대의 기독교적 논리는 멍청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그 당시의 세상을 현대인의 눈으로 평가하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해 보인다. 왜냐하면, 중세 기독교 시대나 데카르트가 살던 시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보다 단조롭고 복잡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 현대 사회는 자본주의 혹은 시장경제의 도래로 인해 복잡하며, 정보의 홍수로 어떤 정보가 좋은지도 분간하기 힘든 시기다. 즉, 그동안 이성으로 많은 것을 해결할 수 있었다면 지금은 이성의 힘 혹은 과학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세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르헤스의 통찰을 미래를 예측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세상이 점점 복잡해질 수록, 마치 도서관이 점점 확장되가며 새로운 책들이 나타날수록 인간의 이성이나 유일신적인 진리는 퇴물이 될 것이라는 것을 예견한 것이다. 보르헤스가 보기에 세상은 수없이 많은 우연적 요소로 구성되며 하나의 편람책 즉 진리나 ‘변론서’ 즉 주체성(자신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목적)을 발견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이성과 합리성의 폭력성을 넘어!


방법론적 글쓰기는 내게 현재 인류의 상황에서 한눈을 팔게 한다. <픽션들, 민음사, P.108>


보르헤스는 <바벨의 도서관>에서 글쓰기를 중시하며 그의 소설을 마친다. 그렇다면 보르헤스가 말한 글쓰기란 무엇인가.  이는 말 그대로 글쓰기 자체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이를 비유적으로 생각하면 각자의 삶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모두는 각각의 책이다. 지금 우리가 숨을 쉬면 행하는 행위 하나 하나가 우리라는 인생의 책에 기록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바벨의 도서관에 꼳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몇 세기 동안 우리는 이성과 합리성이라는 기준을 통해 검열을 받아왔다. 감정적인 사람의 경우, 이성적이지 못하다는 핀잔을 들으며 자신의 감정적인 면모를 고치려고 하는 이성의 잣대가 얼마나 폭력이었던가...... 보르헤스는 겉으로는 이성과 합리성이 절대화된 것에 대한 비판을 넘어 한 가치가 독단성을 가지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이런 사례는 우리 역사 속에서 다양하게 찾아 볼 수 있다. 히틀러는 그가 독일의 지도자가 되었을 때, '이제부터 공익은 사익은 우선한다. 내가 언제 죽을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안다. 국가는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고 여기 모든 사람을 넘어 살아 남고 독일 민족을 형성해 나갈 것이다. 나는 당의 한 조각이고 당은 나의 한 조각이고 당이 지도자고 당이 인민이다.'라는 말을 했다. 그가 말하는 공익은 바로 나치가 생각하는 공익이었고 나치가 생각하는 공익에 위배되는 것은 배제되었고 인류 최대의 비극을 낳았다. 대한민국에서도 박근혜 정부는 국정화 교과서를 추진하면서 박근혜 대통령과 뉴라이트가 생각하는 역사적 인식을 국민들에게 주입하려 했었다. 이처럼, 하나의 가치 혹은 한 개인이 옳다고 믿는 신념이 한 사회에 독재화된 가치의 지위를 가질 때 수많은 폭력을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지금 우리 사회를 보아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답이 곧 진리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에 대해 자신의 답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지각하고 다른 사람의 삶과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보르헤스가 지어 놓은 <바벨의 도서관>은 각자 다양한 생각과 삶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 모든 것이 합쳐져서 하나의 거대한 도서관을 형성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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