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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Mar 31. 2018

2018년 대한민국은 개헌을 할 수 있을까.

계몽주의 2.0 (감정의 정치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조지프 히스



집합행동과 반성하는 이성


이 책에서 나는 좌파와 우파 사이에 근본적인 비대칭이 존재하며 오늘날 같은 환경에서는 이 차이가 전면에 드러난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진보적인 사회 변화는 그 속성상 매우 복잡하고 달성하기가 어려우며 사람들 사이의 타협과 신뢰와 집합행동(collective action)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가슴’만으로 달성할 수 없고 ‘머리’가 아주 많이 관여해야 한다. (계몽주의 2.0, 이마, p.26)


우리의 평화로운 세계를 위협하는 것은 핵이다. 수많은 나라들이 핵무기를 개발하며 한 나라가 핵무기 발사 버튼을 누르는 순간 지구는 멸망하게 된다. 우리의 평화를 지키는 방법은 무엇인가. 아주 간단하다. 모든 나라가 이타적인 마음을 가지고 핵무기를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해체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렇게 쉬운 답을 알고 있는 우리지만 그 누구도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국가는 이타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국가가 이타적이라면 우리의 세금을 지금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에 돈을 퍼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국가는 전혀 이타적이지 않다. 오히려 자신의 국가를 부강하고 강하게 하려는 것이 국가의 일이기도 하다. 아주 극적인 타협으로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국가들이 핵무기를 폐기하자는데 타협을 했다고 하자. 그때 트럼프 같은 정상은 미국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 모두가 핵무기를 폐기할 때, 핵무기를 남겨놓고 개발한다면 미국은 최고의 이득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런 계산을 때리고 있는 것은 모든 국가가 그렇다는 것이다. 즉, 모든 국가들은 이런 '사아한 문제'에 대해 답을 알고 있지만 모두가 각자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간단한 문제를 풀지 못한다. 여기서 조지프 히스는 집합행동(collective action)의 개념을 보여준다. 그는 사회와 전세계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자의 이익 혹은 욕구를 억제하고 협력하는 실천의 행위를 집합행동이라고 한다. 

이런 집합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이성의 힘이 필요하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이성'은 데카르트 이후 현대의 실증주의 시대까지 이어져 온 이성과는 다른 개념이다. 그는 데카르트부터 현대 실증주의까지 이어져 온 '이성'을 계몽주의 1.0이라고 명명한다. 과거의 이성의 힘은 그 자체로 신과 같은 지위를 차지했었다. 인간은 이성을 발견하고 이성의 힘으로 모든 것을 생각할 수 있고, 예측하며, 계산하며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이성에 대한 믿음은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아주 근래의 일례로는 경제학을 들 수 있다. 우리가 경제학 개론서를 펼치면 두 가지 가정이 나온다.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기적이다.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기적이라는 말은 아담 스미스 이후 2007년 이전까지 경제학도들이 자신의 이론을 펼치는데 근간이 된 두 기둥이었다. 하지만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게 되었고 많은 경제학자들이 기존의 경제학 교과서를 폐기해야 하지 않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인간은 이기적일지 몰라도 언제나 합리적인 존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이성, 계몽주의 1.0의 이성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고 이는 오히려 인간의 자만심일 뿐이었다. 조지프 히스가 말하는 이성은 생각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성찰하는 이성을 그의 논지에 중심으로 쓰고 있다.


보수정치와 진보정치


진화는 작은 조정들을 통해 점진적으로 작동하고, 각자의 조정은 기존의 상태에 약간의 개선을 더한다. 그런데 집합행동상의 문제에서는 ‘작은 조정’이 그 조정을 행하는 사람에게 해가 된다. 따라서 문제를 해결하려면 모두가 동시에 움직이는 ‘큰 조정’이 필요하고 그러려면 이성이 중심 역할을 해야한다. (계몽주의 2.0, 이마, p.199)


조지프 히스는 보수정치와 진보정치를 나누는 기준이 기존의 방식과 다르다. 조지프 히스는 진보 정치는 집합행동이며 보수 정치는 기존의 균형 상태를 유지하는 쪽으로 설명한다. 사실 그가 말을 어렵게 해서 그렇지 내가 봤을 때, 그가 가져온 집합행동과 균형 상태(자기조정능력)은 경제학에서 가져온 개념이다. 아담 스미스 이후 시카고 학파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시장의 자정 능력에 초점을 두었다. 정부의 개입은 최소한으로 하고 시장을 맹신하며 시장을 가만히 놔두면 시장은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 손이 균형을 찾아 줄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에 비해 집합행동은 기존의 균형 상태를 움직이려고 한다. 시장에서 제일 아름다운 균형을 최적 균형 상태라고 한다. 그에 비해 균형을 수요와 공급이 만나는 어떤 지점에 모이기 때문에 좌편향 되어 있을 수도 있고 우 편향 되어 있을 수도 있다. 즉, 균형이긴 하지만 최적 균형은 아니라는 것이다. 진보는 기울어진 균형을 조금 더 최적 균형으로 옮기려고 하는 움직임이다. 

사실 경제학 용어를 써서 어려운데 풀어서 얘기하면 아주 간단하다. 보수는 기존의 전통의 산물을 중시한다. 인류 최고의 요리사가 있다고 하자. 그들은 매뉴얼을 보지도 않고 최상의 요리를 만들어 낸다. 그에 비해 나같은 음식을 잘 만들지 못하는 사람들은 책의 매뉴얼을 보고 시간을 측정하고 매뉴얼에 따라 음식을 만든다.

같은 음식을 내놓는다고 할 때, 모든 사람은 내가 만든 음식보다 인류 최고의 요리사의 음식에 칭찬을 할 것이다. 내가 가령, 그에게 '어떻게 음식을 만들었어요'라고 묻는다면 그는 어쩌면 설명을 못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수많은 실전 경험을 통해 쌓아 올린 직관이 있기 때문이다. 보수정치도 이와 같이 매우 직관적이다. 그들은 지금까지 인류가 시행착오를 겪으며 균형점에 이른 사회, 전통, 개념 등에 정통하다. 많은 부모들이 비슷한 가정환경의 집과 결혼하라는 말은 매우 직관적인 이야기다. 그들에게 '왜' 그러냐고 질문을 하면 속시원한 대답을 하기 보다는 오히려 경험에 따랐다고 대답을 할 것이다. 어쩌면 어떤 이들은 보수주의자들이 구시대적이라고 조소를 날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보수주의자가 믿는 것은 하찮은 경험이 아니다. 그들이 믿는 것은 인류가 사회를 이루고 살면서 시행착오를 겪은 경험들을 믿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보수주의자들을 바보 멍청이라고 웃어 넘길 수는 없다. 보수주의자들을 체스에 비유하면 체스 게임을 통해 말들이 움직여서 지금 정지해 있는 지금 상태를 균형상태로 보고 이를 보존하자는 입장이다.

그에 비해, 진보주의자들은 지금의 체스판을 뒤엎고 새로운 판을 짜는 사람들이다. 판을 짜기 위해서는 바로 반성하는 이성이 필요한 것이다. 진보주의자들은 수많은 개개인들의 행동을 하나의 방향으로 움직이게 판을 짜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핵무기 문제나 기후변화 문제에 대해 집합행동을 끌어내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진보주의자들은 반성적 이성을 가지고 목표를 설정하여 수많은 욕구를 가진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야 한다. 조지프 히스는 이를 진보정치라고 본다. 하지만 집합행동을 할 수 있게 만드는 판을 짜는 것은 쉽지가 않다. 우리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소비에트 연방과 수많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판을 짰지만 지금은 역사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지금의 EU는 삐그덕 거리고 있다. 실재적으로 현재의 균형상태에 놓인 것을 진보주의자들이 깨부수고 더 좋은 균형으로 가는 것은 많은 고민과 에너지를 소비하게 된다. 그러히만 집합행동을 통해 세상은 진보하기도 했다. 중세의 왕정이 무너지며 민주국가로 이행하기도 했고, 미국에서는 흑인노예들이 주권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동안 죄악시 되었던 노동조합이 인저받는 것을 보면 불가능해 보이는 집합행동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집합행동의 판을 짜는 것은 현재의 시각으로 불가능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집합행동을 통해 진보의 길을 걸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2018년 대한민국은 헌법을 개헌할 수 있을까.


슬로 폴리틱스는 개인의 노력만으로 성공할 수 없다. 슬로 폴리틱스로의 전환은 이러한 거처에 헌신하는 수많은 지지자들이 국제적인 운동을 일궈 가며 노력해야만 가능하다. (계몽주의 2.0, 이마, p.441)


문재인 대통령이 개헌안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4년 연임제, 국회 비례성 강화, 지방 분권 강화 등을 골짜로 하고 있다. 사실 민주적 원칙에 따르면 이번 개헌은 어쩌면 물 건너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유한국당이 개헌에 대해 반대표를 덜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87년 헌법의 경우, 우리는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부터 박근혜 대통령까지 제대로 살아남은 대통령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고질적 문제 때문에 헌법의 개헌은 필수적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 문제는 모두가 답을 알고 있는 문제다. 그러나 실천을 어떻게 할 것이냐가 바로 개헌 문제의 핵심인 것이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에 있는 정치인들이 판을 잘 짜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문재인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스탠스는 두 가지다. 수많은 여당 정치인들이 반성적인 이성을 탑재하고 수많은 시민들에게 호소하며 그들을 계몽시키는 방법이다. 그리하여 자유한국당도 개헌을 할 수 밖에 없는 정국을 만드는 방법이다. 다른 방법은 민주주의는 민주적 절차에 따라야 하지만 동시에 굴러가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민주적 절차를 어기더라도 초법적인 권한으로 정체되어 있는 비극의 한국 민주주의를 굴리는 방법이다. 개헌을 한다고 놀랍고 신비한 세상이 도래할지는 모른다. 어쩌면 실패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번 개헌 정국에서 개헌은 문재인 정부를 대한민국 역사에서 최고의 아름다운 정부로 만들 수도 있고 아니면 폭삭 망하게 만들 수 있다. 이번 개헌 정국은 매우 매우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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