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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Jan 31. 2018

자본주의는 공간을 어떻게 생산하는가

공간의 생산 <앙리 르페브르>


구체적 공간과 추상공간


앙리 르페브르가 현대의 공간을 통해 보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끼? 그의 눈에 보였던 것은 현대 사회의 문제 즉 자본의의 모순이였다. 앙리 르페브르가 포착한 자본주의의 모순은 권력관계였다. 현대의 국가는 자본주의에 기본을 두고 모든 것을 추상화시키고 획일화시킨다. 모든 상품은 고유성을 잃고 가격이라는 하나의 가치로 측정된다. 자본주의는 인간까지 획일화시킨다. 효율성에 따라 주민등록을 부여해서 우리는 숫자 코드화된다. 국가는 행정처리를 잘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이는 오히려 인간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거대한 리바이어던은 효율적인 통제를 위해 자신을 중심에 두고 다양한 가치들을 하나의 가치로 통일시켜 중심을 이루게 한다. 앙리 르페브르는 이런 거대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가진 국가의 발전과정이 공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믿는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인류학적 공간이 역사의 과정을 거치며, 구체적 공간이 추상적 공간화되는데서 문제를 제기한다.


그렇다면, 구체적 공간과 추상적 공간은 무엇인가. 앙리 르페브르는 공간을 두 가지 개념으로 나눠 버린다. 첫번째는 공간 재현이며, 두번째는 재현 공간이다. 공간 재현은 지도, 설계도와 같이 모든 것을 이미지와 기호를 통한 정보성을 가지고 있다. 공간 재현에는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전제로 깔고 있다. 공간 재현은 자본주의의 핵심이다. 그에 비해, 재현 공간은 신화, 이미지, 상상력과 같은 것을 내포하는 공간을 의미한다. 공간 재현은 체험을 바탕으로 한다. 몇 개월 전에 일본의 대나무 숲을 방문했었다. 관광객들은 드문드문 있었지만 그곳에서 대나무가 소곤소곤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자연을 느꼈었다. 즉, 체험이라는 것은 인간의 오감을 통해, 세상과 단절되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이런 대나무의 소리를 듣고 싶다고 대나무 한 대를 뚝 잘라서 박물관으로 가지고 와서 전시를 한다면 우리는 그 대나무를 통해 일본의 대나무 숲의 자연을 체험할 수 있을까? 공간의 속성은 원래는 체험적이며 신화와 이미지가 숨어 있는 곳이다. 일본의 대나무 숲에서 내가 체험한 것은 이런 거대한 자연 속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에 대한 의식이었다. 즉, 재현 공간은 장소에서 자신의 자의식을 깨닫게 되는 곳이다.



공간 재현과 재현 공간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어떻게 구체적 공간이 추상적 공간으로 변화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앙리 르페브르는 공간 재현과 재현 공간의 이중주를 역사적으로 탐색하려고 한다. 고대 그리스는 '단일성'의 원리에 따라 살아가는 곳이었다. 이들은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으로 만드는 재능이 있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자연을 통해 만들었다. 신전을 만들 때도 신화의 신들을 생각하며 이를 돌과 건축으로 완성킨 것이다. 즉, 고대 그리스인들에 도시에는 정신과 사물이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었다. 고대 그리스는 사물과 정신이 연결되있는 것은 이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사물 안에 이미 언어가 내제되어 있기 때문에 사물을 '인식'할 필요가 없었다. 이는 존재로 의미를 파악해야할 뿐이다. 지금 우리가 쓰는 언어는 기표와 기의에 따라 둘이 따로 놀고 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에서는 기표와 기의가 하나를 이루었다. 그에 비해 로마는 고대 그리스와 다른 길을 걸었다. 로마를 지배하는 사고는 바로 이성과 합리성이었다. 이성과 합리성을 통해서 권력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로마는 보고 싶었다. 높은 곳에서 모든 것을 이성의 빛으로 밝히고 싶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어둠, 여성성, 상상력과 같은 것은 하등한 것으로 규정하고 이를 이성의 이름으로 제단하기 시작한다. 어둠은 빛으로 밝혀야 하고, 여성성은 남성성에 지배를 받아야 하며, 상상력은 이성의 지배를 받아야만 했다. 고대 로마인들은 이성고 합리성의 힘으로 모든 것을 분석하고 싶어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유기체적 요소를 분리시키기 시작한다. 이때, 기표와 기의도 나뉘게 된다. 왜냐하면 인식한다는 것은 기표와 기의를 나누어 분석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인식은 곧 대상을 분절시키는 것이다. 이런 로마인들의 사고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사고와 반대되며 시공간을 모두 분절시킨다. 그 기저에 깔린 것은 바로 합리성으로 무장한 권력의 힘이었다.


하지만, 로마의 시대는 끝이 난다. 이제는 중세 시대가 열린다. 중세는 비록, 고대 그리스와는 다르지만, 죽음을 의례화시킨다. 그리하여 재현 공간이 다시 살아난다. 그러나, 중세 기독교 세계에서 재현 공간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스콜라 철학이 대두되면서 신앙과 이성의 합일이 이루어지게 된다. 즉, 그동안의 믿음의 영역으로 여겨진 어두운 곳을 다시 이성의 힘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시작된 것이다. 또한 중세 시대에는 시장이 도시 안 쪽으로 들어오게 된다. 중세는 재현 공간의 복귀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공간 재현의 씨앗을 다시 살리는 모순을 낳았다. 그리하여 12세기에는 시장이 나타나며 생산과 상인들을 통해 이성이 다시 등장하게 된다. 이때부터 부의 축적이 시작된다. 많은 도시들이 로마가 거점으로 삼았던 도시들 위에 다시 나타난 것을 보면 다시 이성 중심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16세기에는 화폐가 토지를 지배한다. 추상적인 것이 구체적인 공간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16세기의 도시는 소수 지배집단이 영토를 관리하며 상품, 화폐, 자본에 따라 사람들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이 시대에는 부르주아들이 통치를 하게 된다. 하지만 조금 뒤에는 강력한 국가들이 등장하게 된다. 국가는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폭력을 쓸 수 있는 존재다. 국가는 전쟁을 통해 부의 축적을 가능케 한다. 정치를 하며 통치를 받는 모든 존재를 획일적으로 관리한다. 국가는 축적의 합리성, 관료제도의 합리성, 군대의 합리성을 바탕으로 공간의 생산을 한다. 그리하여 국가는 토지, 자본, 노동의 삼각형을 완성시킨다. 자본가는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많은 시간의 노동을 착취하고, 이를 통해 만들어진 잉여가치를 자본가가 먹고 그 중 일부를 지주에게 넘겨준다. 즉, 노동자들의 희생을 통해 자본가가 잉여가치를 이윤으로 전유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과거에는 토지를 지배한 사람이 지배계급이 되었다면, 근대 이후에는 지배계급이 되면 토지를 얻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공간 문제를 생산하는 자본주의


현대 사회가 도래하고 국가는 거대한 자본주의라는 괴물을 탄생시켰다. 르페브르의 눈에 도시계획이라는 것은 상부구조로서 자본주의 체제의 재생산에 기여를 한다. 도시계획을 통해 자본주의의 착취는 은닉되는 것이다. 브르주아들은 공간을 통해 돈을 번다. 부동산 개발 및 투기, 문화한업, 유통업, 의료산업, 학교와 같은 것으로 돈을 번다는 것이다. 도시의 주인은 바로 브르주아인 것이다. 그런데, 르페브르는 도시의 주인이 바로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시민이 시민의 권리를 통해 도시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재현공간이라는 개념을 통해 시민의 항거를 요구한다. 도시는 우리에게 강요를 한다. 여기다 주차하지마, 여기는 일방통행이야, 여기는 오른쪽에 붙어서 걸어야 해와 같이 말이다. 그런데, 르페브르는 이러한 도시의 규칙은 바로 브르주아들이 이 같은 규칙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시민들은 이에 대해 항거할 수 있고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의 말에 따라 6.8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도시개발을 보면 계획가, 공무원, 건설회사들이 도시를 개발하고 있다. 최근의 재개발 사례를 보면 그 개발이 과연 시민들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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