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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Jan 21. 2018

기억 속에 있는 도시를 찾아서

<보이지 않는 도시들> 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쿠빌라이 칸과 마르코 폴로가 대화하는 형식의 소설이다. 마르코 폴로는 칸에게 55개의 도시를 시라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실 텍스트를 하나하나 뜯어보는 성격이 있는 나에게 이 소설은 쉽게 읽히지가 않았다. 200페이지의 짧은 소설이지만, 하나의 도시를 지나갈 때마다 생각을 하며 읽으니 시간이 오래걸렸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읽을 때, 매력은 논리적인 사고를 가지고 글을 읽어나가면 독자는 <보이지 않는 도시>로 한 발짝도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독자들은 <보이지 않는 도시들>로 모험을 떠나기 전에 두 사람을 만나게 된다. 바로 쿠빌라이 칸과 마르코 폴로다. 쿠빌라이 칸은 몽골 제국의 지배자다. 그는 높은 곳에서 세상을 조망하며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세상을 자신의 손에 넣으려고 하는 사람이다. 그에 비해 마르코 폴로는 자신의 주관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느낀다.



기표와 기의, 기호와 상징 사이에서


도시는 이와 같이 조밀한 기호의 껍질 속에 있기 때문에 여행자는 타마라에서 나올 때에도 도시가 정말 어떤 모습인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혹은 숨기고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 민음사, P.23>


동방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곳의 언어를 전혀 몰랐던 마르코 폴로는 몸짓과 높이 뛰어오르기, 감탄이나 공포의 비명, 포효하는 동물 울음이나 새소리로, 혹은 여행가방에서 타조 깃털, 콩알 총, 석영 같은 물건들을 꺼내 자기 앞에 체스 말처럼 늘어놓으면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 민음사, P.33>


우리는 쿠빌라의 칸의 시각으로 도시를 바라보려고 한다. 우리가 배우는 도시, 도시계획 모두가 쿠빌라이 칸의 눈이다. 쿠빌라이 칸의 눈은 도시를 기호로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가 기호를 사용하는 이유는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기호는 약속된 표현을 통해서 의미를 전달한다. 소쉬르가 이야기했듯이 기호는 기표와 기의로 나뉜다. 우리가 사과를 사과라고 부르는데는 아무런 연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에서 사과는 '애플'이며, 일본에서는 '링고', 프랑스에서는 '뽐므'다. 이렇게 기표는 각 나라마다 서로 다른 기표를 가지지만 사과라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을 지칭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가 여기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기표와 기의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이에 대해 '기표와 기의가 자의적이다'라고 말한다. 기표와 기의가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데, 의미가 전달되는 것은 매우 신기한 일이다. 기표와 기의가 아무런 상관성이 없는데도 의미를 전달하는 것은 체계 혹은 구조 때문이다. 가령, 사과의 의미가 전달되는 것은 멜론, 토마토, 포도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기호에서 기표와 기의 중 기표는 빈 껍데기와 같은 것이다. 우리가 어느 날 사과를 '우루슐라'라고 부르기로 사회적 합의를 본다면 사과는 내일부터 '우르슐라'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도시를 바라 볼 때, 도시도 이렇게 보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신사동이나, 선릉 같은 곳을 명명할 때, 동네의 이름과 그 지역은 아무런 연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이름을 붙인 것 뿐이다. 지배자의 눈은 기호로 세상을 바라본다. 우리는 우리와 관련 없는 숫자들의 조합(주민등록번호)로 확인되고, 잘 정비된 도로명 주소로 확인되며, 도시도 인간도 기호가 되어 버린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을 바라볼 때, 합리성과 효율성만으로 보지는 않는다. 우리는 언어에 감정과 주관성이 들어가기도 한다. 가령, '슬픔의 칼날'이라는 표현이 있다고 치자. 그러면, 어떻게 칼날이 슬플까. 여기서 칼날은 복수, 원한과 같은 의미를 포함하게 된다. 여기다 '슬픔의 망치', '슬픔의 국자'가 칼날을 대체할 수 있을까. 아니다. 지금까지 '칼날'은 날카롭고 쇠로된 도구를 의미했지만 '슬픔의 칼날'에서 '칼날'은 주관적인 요소가 들어가게 된 것이다. 즉, 기표가 추상화된 것이다. 이것은 기표와 기의의 자의성의 약화를 가져온다. 우리는 약화된 자의성에 상상의 세계, 초월의 세계와 같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 기표와 기의가 자의성을 상실하게 되면 '상징'이 된다. 이렇게 되면 상징은 모호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상징을 바라보는 인간은 자신의 살아온 삶의 궤적과 시각을 가지고 상징을 해석할 수 밖에 없다. 하나의 상징 앞에서 하나의 진리적인 해석이 나올 수는 없다. 각자가 경험한 것에 따라 상징은 재각각의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다. 마르코 폴로가 바라보는 도시는 환상적이다. 그가 들려주는 도시 이야기가 읽기 힘든 것 자체가 우리가 세상을 기호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서울에 인구가 몇 명이 살고, 사업체 수는 얼마나 있고, 자살률을 얼마이고, 독거노인의 수는 무엇인지 도시를 바라보며 정보를 얻으려고 한다. 하지만, 마르코 폴로는 자신이 여행했던 도시들, 베네치아를 자신의 주관적 해석과 느낌으로 표현해준다. 마르코 폴로의 도시에 대한 환상적인 이야기들은 쿠빌라이 칸과 독자들에게 보이지 않는 도시에 대해 깨닫게 도와준다.



도시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제가 아직 젊었을 때, 어느 날 아침 그곳에 도착했습지요. 수많은 사람들이 시장으로 향하는 길을 바쁘게 걸어갔고 아름다운 치아를 가진 여인들이 제 눈을 똑바로 처다보았어요. 무대 위에서는 병사 세 명이 클라리넷을 연주했고 사방에서 바퀴들이 굴려다녔고 색색깔의 플래카드들이 휘날렸습니다. 그때까지 제가 아는 것이라고는 사막과 대상로 밖에 없었지요. 그날 아침 저는 인생에서 제가 기대할 수 있는 행복이 도로테아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 제 눈은 다시 광대한 사막과 대상로를 바라보아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길이 그날 아침 도로테아에서 제 앞에 열려 있던 수많은 길 중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 민음사, p.16>


도시의 탄생은 바로 교환 때문이었다. 교환과 분업 덕분에 시장이 나타나게 되었고 연결망인 도로가 생겨 수많은 도시들을 연결하기에 이른다. 그런 도시들을 수없이 많은 간판들이 나타나게 되며 도시는 기호를 둘러 싸이게 된다. 사람들은 도시로 모여들고 도시는 계속 팽창하며 쇠락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꿈을 가지고 도시로 오지만 그 꿈을 잃게 만드는 곳도 도시다. 도시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연속상 속에 놓여 있다. 과거의 역사가 축적이 되어 도시가 형성되었고, 기술의 진보에 따라 도시는 매일매일 발전해 나간다. 이런 도시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욕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고 각각의 공간에 기억을 가지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도시에서 서로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며 도시는 형성된다. 이처럼 도시는 주관적 요소와 객관적 요소들이 함께 어우러진 공간이다. 마르코 폴로가 도시를 바라보는 방법을 신비롭다. 그는 자신이 여행했던 도시들을 객관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객관적 설명이 도시를 과연 다 담아낼 수 있을까. 서울시의 인구수가 곧 서울시를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마르코 폴로는 자신이 느끼는 도시를 상상과 이미지를 통해 보여준다. 예를 들어 A라는 카페가 있다고 하자. 어떤 사람에게 그 카페는 커피가 맛있는 집일 수도 있고, 또 어떤이에게 그 카페는 연인과 함께한 추억이 있는 곳일 수도 있으며, 또 다른 이에게는 친구들과 함께한 추억의 장소일 수도 있다. 이렇게 하나의 공간이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다르게 기억되는 것은 한 공간이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쿠빌라이 칸의 눈은 모든 공간을 기호로 바라보고 기표의 의미를 지워 버림으로써 모든 것이 하나의 획일적인 공간으로 보일 뿐이다. 칼비노가 말하고 싶은 것은 도시는 수없이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수없이 많은 요소들이 모인 곳이다. 도시는 각각의 개인들에게 다른 얼굴들을 보여준다. 그러하면서 그들은 주관적인 경험에 따라 도시를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는 하나의 객관적 실체로 존재하지만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는 다양한 형태로 도시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하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마르코 폴로가 묘사하는 도시들의 모습

나의 공간에 묘비를 세우겠소

살아 있는 사람들의 지옥은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서 살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방법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위험하고 주의를 기울이며 계속 배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즉 지옥의 한가운데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게 공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 민음사, P.33>


고통의 연금술

                                보들레르


어떤 이는 제 열정으로 너를 비추고

또 어떤 이는 네 속에 제 슬픔의 눈물을 놓는다. 자연이여....

어떤 이에게 ‘묘지여’라고 말하는 것은

다른 이에게는 ‘생명과 광채여’라고 말하는 것


나를 보살피고

언제나 나를 겁나게 하는 수수께끼의 헤르메스여

너는 나를 연금술사 중에 가장 슬픈

마이더스와 같게 만드는구나


너에 의해 나는 금을 쇠로

천국을 지옥으로 변하게 만든다

흰구름의 수의(상복) 속에서


사랑하는 이의 주검을 찾아

천국의 기슭 저편에서

난 대석관들을 새우리라


도시는 어떤 곳인가. 마르코 폴로의 눈에, 이탈로 칼비노의 눈에 현대의 도시는 절망적으로 보인다. 보들레의 시 <고통의 연금술>에서 시인은 황금의 세상 속에 살고 있다. 황금이 가치있는 이유는 황금이 희소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황금으로 둘러 싸인 세상에서 황금은 천국을 만들지 못한다. 그는 천국이며 황금의 세상을 쇠로 만들고 지옥으로 만들어 버리려고 한다. 시인은 자신의 황금도시를 쇠로 만들고 시체를 찾으며, 대관석을 세우려고 한다. 그것이야 말로 자신의 존재를 찾는 길이며 자신의 공간을 만드는 길이기 때문이다. 마르코 폴로도 이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거대화되고 효율성이 판치는 도시 속에서 인간의 의미를 잃어가며 우리 자신의 공간을 잃어 버린다. 우리는 자본주의와 도시가 규정해가는 삶에 따라 삶을 영위해 간다. 마르코 폴로가 말한 첫번째 방법은 간단하다. 도시에서 도시의 시간표에 맞춰 살아가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학교나 회사를 가고 오전에 공부와 업무를 보고 점심을 먹으러 나온다. 그리고 오후 일과를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현대인의 삶이다. 우리는 끝없이 반복되는 삶에서 잃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나' 자신이다. 모든 것이 습관이 되어버리면 의미를 잃어버린다. 그에 비해 마르코 폴로가 이야기하는 두 번째 방법은 <고통의 연금술>에서 시인이 황금의 땅에 묘비를 짓는 것과 같은 행위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공간을 찾는 것이다. 세상이 규정한대로 공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눈으로 도시를 느끼고, 사랑하며, 가끔은 저항도 하며, 자신의 주체성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우리의 도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도시를 바라 볼 때, 쿠빌라이 칸의 눈으로 본 도시와, 마르코 폴로의 눈으로 본 도시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두 시각은 서로 갈등하기도 하지만 조화를 이룰 수 있으며 각각 도시의 단면들을 설명한다. 하지만, 우리는 마르코 폴로가 바라보는 도시의 눈을 감아 버렸다. 그 눈을 다시 뜰 때, 도시는 내 앞의 의미없는 몸짓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꽃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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