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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Feb 07. 2016

전체주의는 코끼리를 한 순간에 늙게 만든다.

<동물농장> 조지오웰


일곱 계명

1. 무엇이건 두 발로 걷는 것은 적이다

2. 무엇이건 네 발로 걷거나 날개를 가진 것은 친구이다.

3. 어떤 동물로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

4.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

5. 어떤 동물도 술을 마시면 안 된다.

6.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여선 안 된다.

7.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수퇘지 올드 메이저에거 연설을 들은 나폴레옹과 소노볼은 글을 배우고 그 휘하에 언변가 스퀄러와 함께 동물주의를 외치며 반란을 일으킨다. 농장주를 쫓아내고 매너 농장을 동물 농장으로 바꿔 버린다. 혁명을 성공시킨 후 소노볼과 나폴레옹은 회의를 열었다. 이와 동시에 스노볼은 많은 위원회를 만들어 낸다. 그들은 평등을 외쳤지만 사과와 같은 과일들을 돼지들이 가지기 시작한다. 동물 농장을 잘 돌아갔다. 그때, 농장주가 처들어왔지만, 스노볼의 방어술로 농장을 지킨다. (외양간 전투). 이후 나폴레옹과 스노볼은 서로의 의견이 차이를 보이는데, 스노볼은 풍차를 건설해서, 효율성을 높이자고 제안한다. 나폴레옹은 개들을 풀어 스노볼을 공격하고 스노볼은 농장을 이탈한다. 이때부터 나폴레옹은 전체주의를 표명하며 실권을 장악해버린다. 나폴레옹과 스퀄러는 스노볼의 풍차계획을 자신들의 계획인양 시행을 시킨다. 하지만 풍차작업은 동물들에게 피로만 더할 뿐이었다. 진행 중에 나폴레옹은 동물들에게 피의 숙청을 감행하며 자신의 반대자들을 모두 제거한다. 풍차가 완성되었을 때, 프레드릭 일당이 처들어온다. 이번에도 농장은 지켰지만 풍차는 부셔진다. 이후 다시 풍차는 완성되지만 기존 동물들의 생활은 힘들어지고 돼지들만이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며 소설은 끝이 난다. 마지막에, 일곱 계명에서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에서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는 더 평등하다'라고 고쳐져 있다. 


동물농장의 인물 관계도


조지 오웰이 진정으로 경계하고 싶었던 것은?


<동물 농장>은 명작이다. 우화를 빙자한 소련의 모습을 보여준 사회 풍자적 소설이다. 조지 오웰은 사회주의를 비판한 것인가? 조지 오웰은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사회주의가 인간의 평등과 존엄을 이루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특정 계층에 의해 독재화 되고, 전제주의적 속성을 가지게 되자 그는 실망을 하고, 전체주의를 비판했다. 전체주의라는 것이 어감적으로 부정적으로 볼 수 있지만, 전체주의가 오히려 좋은 통치방식이 될 수 있다. 가령, 예수님이 전체주의 방식으로 통치를 한다면, 그 나라가 오히려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전체주의의 문제는 통치를 하는 집단이 권위주의적 태도를 가지면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국가를 운영할 때, 문제가 생긴다. 즉, 전체주의는 사람들을 수단으로 본다. 조지 오웰은 사람을 수단적 가치로 만드는 점에 분노를 했었는데, 그가 동인도 회사에서 일을 할 때, 코끼리가 난동을 부렸다. 그는 총을 들고 나갔는데, 잘 보니 코끼리가 시간을 가지고 달래면 죽일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의 눈과 관리들의 명령에 따라 그는 할 수 없이 코끼리를 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코끼리가 총에 맞아 죽는 모습을 '코끼리의 시간이 빨리 흘러 늙게 만든다고 만들었다.' 라고 표현했다. 이 사선을 통해 전체주의라는 것은 한 개인을 총을 쏠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몰아 부친다는 것을 오웰은 느꼈던 것 같다. 아마 이 사건이 조지 오웰의 마음에 상심으로 남았던 것 같다. <동물 농장>에서 사회주의라는 체제는 이상적이며, 유토피아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에 오고, 적용이 되면, 그 안에서 소수가 권력을 가지게 되고 이상적인 사회주의는 피를 부르는 전체주의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전체주의가 되어가는 사회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 농장>은 소련의 모습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이런 시대적인 소설은 그 시대가 지나면 사라지기 마련인데, <동물 농장>은 고전이 되고 계속 읽혀진다. 그것은 그의 소설에 전체주의라는 것이 우리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체주의의 두려움은 바로 하나의 가치가 그 세상에서 유일한 가치처럼 여겨지고, 신처럼 받아들여 질 때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사람들은 각자 다양한 가치를 지니고 살며 그 가치를 통해 세상을 바라 본다. 우리가 사회 생활을 하면서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하나의 가치관이 사회를 장악할 때, 그 가치관에 맞지 않는 사람을 반대자가 되고, 그 가치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되고, 낙오자가 되어 버린다. 이런 점에서 조지 오웰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여기서 조지 오웰이 착안한 것은 바로 미국에서 이루어진 다원주의 때문이다. 즉, 다양한 가치와 주장을 할 수 있는 세상을 조지 오웰은 바랬던 것이다. 그 속에서 오웰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세상 속에서 인간이 수단이 아닌, 인간대 인간으로 서로를 받아들이며, 서로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더라도, 서로 화해하고 함께하는 사회를 꿈꿔온 것이다.



대한민국은 전체주의 국가로 걸어가고 있다.


지금 한국사회는 전체주의 국가로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한국의 경우, 무능력한 정부와 국회, 강력해지는 재벌들이 한국을 이끌어 가고 있다. 이들은 철의 삼각모형처럼 정부와 국회와 재벌들이 하나의 집합체를 유지하며 대한민국을 이끌어가고 있다. 재벌이라는 집단들이 한국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한 것에 대해서는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경우, 재벌이 망하면 한국 사회가 무너질 수 있는 상태이다. 그리하여, 재벌이라는 사기업들이 국가적 기업이 되었다. 즉, 대한민국 국민들은 재벌이 힘들어지면 국민의 세금이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쓰여진다. 하지만, 재벌들은 이런 국민들의 혈세에 대해서 감사함을 모른다. 이처럼, 정부와 국회와 기업인들이 대한 민국을 이끌어가며 사회 속에서 경쟁을 심화시킨다. 이런 사회 속에서 많은 시민들은 삶의 낭만을 즐기기 보다는 일만 하는 기계가 되어 버린다. 나는 이런 사회일수록, 대한 시민들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생각이 든다. 민주주의의 주인은 바로 시민이다. 시민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참여를 해야 세상이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나의 마지막 바람은 대한민국 사회의 지식인들이 상아탑에서 나와 국민들을 이끌고, 정말 멋진 정치인이 나와서 핼조선을 바꿔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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