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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Feb 08. 2016

배운다는 것은 오해로부터 시작된다.

<스승은 있다> 우치다 타츠루



당신의 근처에 좋은 선생도 없고 선생 운도 없는데 당신에게 스승이 있다니!


모두다 학창시절에 정말 답없는 선생님들을 적어도 한번 씩은 겪어 봤을 것이다. 그냥, 가르치는 것 같이 거의 30분을 필기하시는 선생님, 자신의 시를 가져와서 수능에 나온다고 바보 같은 소리를 했던 선생님, 자신이 수학 문제를 풀지 못해서, 답지가 없으면 수업을 하지 않았던 선생님.. 여하튼, 나도 이런 선생님을 매일 평가하고 뒤에서 욕을 드럽게 많이 했던 것으로 생각이 난다. 우치다 타츠루는 자신의 책에서 제가 가치 없다고 생각했던 선생님들 하나하나에 모두 배울점이 있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것이 정말로 가능할까?


우치다 타츠루는 먼저 '오해하는 자아'에 대해 설명을 한다. 오해하는 자아란, 어떤 두 사람이 의사소통을 할 때, 서로가 상대방이 말한 것들을 100% 정확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그동안 서로가 살아오던 성장 배경이 다르고, 자신이 만난 사람들이 모두 다르며, 공부한 것들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약간 과장된 재밌는 예를 들자면 이과 생과 문과생이 단어를 받아들이는 사고 방식이 다르다는데, 아니면 그냥 웃어 넘기자


이과생과 문과생은 하나의 단어를 보고도 다른 생각을 한다.


이것이 비록 재미를 유발하기 위해 만들어 졌지만, 이처럼, 우리도 각자 경험한 것이 하나의 단어를 들어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오해하는 자아'는 서로가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먼 산으로 가면서 어떻게 되었든 간에 각자의 결론에 도달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우치다 타츠루는 절대로 제자가 스승을 겪어보고 깨닫기 전까지는 평가를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의 사교육 시장을 봐도, 아니, 공교육 또한 선생님들이 모두 평가를 받는다. 과거에는 제자들이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도 않았는데, 지금 이 시대의 스승들이 '나는 가수다'의 스타들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스승들을 평가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들이 상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 학생들은 소비자이다. 그리고 선생이라는 콘텐츠를 구매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과연 어떤 사람의 가치를 돈이나, 상품가치로 매길 수 있겠는가....

그들은  시장에서 판매되는 돼지고기가 아니다.


그렇다면, 배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제자는 절대로 스승의 밑에 있을 때는 배운다의 의미를 알 수 없다. 그리고, 스승의 진정한 능력을 자신이 스승이 되기 전까지 알 수 없다. 스승은 기능적인 사람들이다. 여기서 기능은 콘텐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소통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스승이라는 존재는 모든 것을 알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단지, 제자보다, 많이 알고 그것은 전달할 수만 있다면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스승은 나름 제자가 모르는 것을 가르쳐 준다. 제자는 그것을 배운다.(단, 여기서 제자는 능동적이라는 가정)

제자는 그 당시에 스승의 뜻이나 배운 것을 100%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나이가 들어 그것을 혼자 깨닫게 된다.

그러나, 제자가 나이가 들어 깨달은 것은 자기 자신의 주관적인 해석을 통한 것이다. 우치다 타츠루의 이런 외침이 여러분에 귀에 안 들릴 수 있다. 만약, 내가 대입 수능을 3주 정도 남겨놨다면, 개소리라 하겠지만...

그래도, 절대로 최악의 선생은 없다.  비록, 정말, 못 가르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스승으로부터 열정이나 혹은 순수성이나 시를 쓰는 법이나 그런 것을 배운 다면, 과연 그 선생이 정말 최악의 선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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