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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Feb 14. 2016

광기의 마을 속에서...

<시련>  아서밀러


아서 밀러의 희곡 <시련>은 미국의 세일럼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애비게일을 포함한 여자 아이들이 장난으로 마녀에 대한 춤을 추면서 그것이 패리스 목사에게 발견이 되고, 패리스 목사는 확실하지 않은 마녀의 존재를 통해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고 한다. 이와 더불어 퍼트넘 부부는 마을의 영향력을 위해 마녀를 기정 사실화하고 퇴마에 대한 지식을 가진 헤일 목사를 부르기까지 한다. 애비게일을 포함한 여자 아이들은 자신들의 장난이 들킬까봐 다른 사람들을 고소하는 것으로 일이 커지고 헤일 목사의 조사에 따라 마녀재판이 시작된다. 애비게일은 프록터와 내연의 관계였지만 프록터의 부인 엘리자베스가 그 사실을 알고 애비게일을 마을에서 배제시키에 이른다. 이에 앙심을 품은 애비게일은 마녀사냥에서 엘리자베스를 고소한다. 프록터는 이 사실을 진실을 밝히려고 고군분투한다.


종교와 권력이 하나로 합쳐질 때...


세일럼의 목사 페리스는 이름만 목사인 사람이다. 그는 어린이들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이 하버드를 나왔는데 이런 시골 마을에 있다는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다. 그와 더불어 페리스 목사는 하나님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패리스 목사는 하나님에 대한 설교를 하기 보다는 '지옥'에 대한 설교를 함으로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느끼게 만든다. 그리고 타인에게 정죄를 함으로써 무늬만 목사인 사람이다. 파견을 나온 헤일 목사는 겉으로 보기에 긍정적 인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도 일그러진 면이 있었으니 바로 지식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신앙이라는 것은 믿음과 지식(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하지만 헤일 목사의 경우 신앙에 대한 지식만 있지 믿음에 대한 것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즉, 세일럼에 있는 목사들은 신앙보다는 자신의 권위와 지식을 앞세우고 있는 사람들이다. 즉, 내실이 없다는 것이다. 그와 더불어 퍼트넘 부부는 마을의 실세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페리스 목사를 좌지우지한다. 본질없는 청교도와 권력이 손을 잡게 되고 이것은 집단적인 광기를 불러일으키는 시발점이 된다. 세일럼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때, 성경에 대한 지식이 없었고 단지 믿음 하나로만 하나님을 믿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정치 권력은 폐쇄된 공간과 교조화된 종교를 자신의 아래에 넣고 사람들을 조종한다. 이와 더불어 마을 사람들은 마음 속의 악이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한 소녀의 광기


애비게일은 자신의 내연남이었던 프록터를 잃고 광기의 존재가 되어 버린다. 그녀는 프록터의 아내인 엘리자베스를 죽이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겉으로 보기에 애비게일은 프록터의 아내를 파멸시키려는 것이다. 애비게일이 포록터의 아내를 미워하고 살인까지 하고 싶어 하는 것은 엘리자베스가 프록터의 아내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더 본질적으로 나아가자면, 엘리자베스는 애비게일과 남편의 내연 사실을 알고 애비게일을 내 쫓아 버린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애비게일을 받아주지 않는다. 애비게일의 광기는 바로 다시 사회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의 표출이다. 즉, 프록터에게 다시 사랑을 받게 된다면 자신이 사회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마음이 아마 무의식 중에 깔려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마녀라는 존재는 애비게일을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세일럼에는 진짜 마녀는 존재하지는 않지만 애비게일과 그의 친구들을 마녀로 볼 수 있다. 마녀라는 존재는 운석에서 떨어진 존재들이다. 마녀들에게는 정체성이 없고 사회로부터 배척을 받던 존재들이다. 마녀와 같은 애비게일에게 마치 성녀의 이미지가 나오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을 고발할 때 그녀는 성녀의 모습으로 둔갑을 한다. 정치체제는 사회에서 아무 것도 아니었던 그녀를 성녀로 만들어 그녀에서 권위를 부여하게 된다. 권위를 가진 애비게일은 프록터와 그의 아내 엘리바제스를 계속 미궁으로 몰아 버린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프록터


프록터에게는 두 가지 죄책감이 있었다. 첫번째는 개인적인 죄책감으로 애비게일과 내연을 했고 그 결과 아내를 배신했다는 죄책감과 마녀재판의 본질적인 원인을 제공했다는 죄책감이다. 프록터의 경우 마을에서 인망이 좋았던 사람이었다. 엘리자베스를 제외한 그 누구도 프록터가 애비게일과 내연관계였다는 것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아내가 잡혀가게 되고 프록터는 자신 때문에 아내가 고소당했다고 괴로워 한다. 그는 고민 끝에 진실을 말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리하여 법정에서 자신이 애비게일과 자신이 내연관계였고, 내연관계가 깨지자 애비게일이 분노하여 마녀재판 소동을 일으켰다고 말한다. 프록터는 진실을 말하였다. 하지만 법원에서는 진실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마녀 사냥에 더 초점을 맞춘다. 즉, 프록터가 진실을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록터는 세일럼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애비게일의 위협에 무릎을 꿇은 시녀 메리워렌이 프록터를 배신하게 되자, 프록터는 분노하며서 자신이 악마를 보았다고 자포자기를 해버린다. 이 말은 프록터가 악마를 보았다는 증거가 되어 그를 구속하게 만든다.


나의 죄는 내가 지고간다.


프록터가 잡혀가자, 애비게일은 도망을 가고 기성권력자들은 그들이 도망간 것에 의심을 하기 시작한다. 기성권력자들은 자신들의 마녀재판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고 사람들에게 잡혀있는 사람들이 자백을 하면 교수형에 처하지 않겠다고 회유를 한다. 프록터 외에 7명은 자백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프록터를 회유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한다. 기성 권력자들은 엘리자베스에게 프록터를 회유해달라고 한다. 엘리자베스는 프록터에게 '누구도 당신을 심판할 수 없다며, 당신이 하고 싶은데로 하라'고 말한다. 프록터는 고민한다. 자신은 이미 더럽혀졌고, 여기서 거짓 자백을 한다면 자신은 살지만 다른 사람들이 불명예스럽게 죽을 것을 깨닫는다.  그는 선택에 기로에 놓인다. 자신이 살고 타인들을 마녀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죽어 모두의 명예를 살릴 것인가 말이다. 그는 죽음을 선택한다. 지금까지 프록터의 모습은 타인들의 시선에 만들어졌던 존재였다면, 지금은 프록터 홀로 자신의 죄를 감당하고 이겨낸 것이다. 그가 자신의 죄책감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선택한 것은 적어도 그에게는 패배로 보였지만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세일럼의 기성 권력을 무너트리게 되었다.


프록터는 법정에 섰을 때, 자신의 이름 즉 정체성을 찾게 되었고, 진정으로 자신의 대가를 받은 것이다. 그의 마음 속에 있던 선의 조각들이 빛나 개인의 영위가 아니라 타인들을 위하는 삶으로 마감하게 된 것이다. 프록터는 죽음 앞에서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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