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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Feb 15. 2016

우리는 언제까지 사회의 부조리에 침묵할 것인가?

<페스트> 알베르트 카뮈


<페스트>는 정말 길었다. 과거에 읽었던 <이방인>에서는 개인이 사회에 대한 반항을 보았다. 뫼르소는 부조리한 사회에 대해 무관심으로 저항을 하였다. 까뮈의 부조리에는 사회에 대해 저항을 하면 그 대가를 치뤄야 한다는 것이다. 그 대가는 죽음을 통해 저항이 완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페스트>에는 어떤 저항이 나올까 이번에는 개인이 아닌 집단의 저항이 이루어 진다. 


 페스트라는 감옥 속의 사람들


페스트에는 많은 등장인물이 나온다. 의사인 리유, 기자 랑베르, 파늘루 신부, 선의에 찬 타루, 공무원이지만 어딘가 낭만적인 그랑 그리고 혼돈을 즐기는 코타르.... 페스트가 오랑시에 퍼지게 되고 사람들은 도시 봉쇄라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봉쇄된 초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빠지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사람들은 그 상황에 적응을 하며 일상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리유와 타루는 사람을 살리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즉 페스트라는 거대한 부조리와 맞서 싸우는 존재들이다. 연대를 맺어 구급대를 편성한다. 리유는 사람을 구하려는 이유가 자신이 사회에서 맡은 바를 다하기 위해서였다. 그에 비해 타루는 과거의 사건 때문에 사람들을 살리려고 한다. 그는 과거 아버지가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판결을 내리는 것을 보고 선량한 아버지가 사회 속에서는 타인의 목을 움켜쥘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한다는 것에 충격을 받는다. 그는 자신이 그동안 죽음이라는 것을 추상적으로 알았지만 그 죽음을 체험하기 위해 집안을 나와 가난한 삶부터 시작을 한다. 리유는 사회적 직분을 다하기 위해, 타루는 사람을 위해 사회에 저항을 한다.

기자인 랑베르와 파블루 신부 그리고 타루와 리유를 묶어서 이야기를 해야겠다. 랑베르는 타지역에서 와서 취재를 하다가 오랑시에 갇히게 된다. 그는 파리에 있는 자신의 연인을 만나기 위해 끝없는 노력을 한다. 처음에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시작을 하지만 모든 것이 무산이 되자 비합법적인 방법을 통해 오랑시를 탈출하려고 한다. 그의 탈출 이유는 바로 사랑과 행복 때문이었다. 마지막 그가 오랑시를 떠날 수 있을 때 그는 자신의 개인적 행복을 뒤로 미루고 구급대에 들어간다.

파늘루 신부는 신앙을 강조하고 페스트는 신의 뜻이며 인간들이 어쩔 수 없다고 설파한다. 하지만 신부가 한 아이의 죽음을 대면하고 나서 그는 자신의 신앙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된다. 과연, 행동하지 않는 신앙이 올은가에 대한 고민을 한 것이다. 그는 아이의 죽음 앞에서 구급대에 들어가고 페스트의 최전선에서 일을 하다가 죽는다.



 혼돈 속의 두 사람


'5월에 어느 아름다운 아침에, 어떤 날씬한 여인이 누부신 밤색 말에 몸을 싣고, 꽃이 만발한 사이를 뚫고 숲의 오솔길을 누비고 있었다...'


그랑이라는 인물은 책을 읽으면서 마음을 짠하게 만든 인물이었다. 그가 페스트에 걸렸을 때 아픈 몸을 이끌고 크리스마스 목각 인형들 앞에서 사랑하는 여인 잔을 위해 눈물을 지었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는 구청의 공무원이며 한 여자와 결혼했으며 가정이 어려워지자 잔은 그랑을 떠난다. 위의 문구는 그랑이 잔을 위해 쓴 최후의 문구였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나의 추측에는 그랑은 언제나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다. 괴로운 상황 속에서도 이 작품이 절망적이지만은 않은 것은 바로 그랑의 글쓰기 때문이었다. 그는 죽음이 판치는 세상 속에서도 과거의 연인을 그리워하며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 그의 모습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어쩌면 낭만이라는 것은 절망 속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요소인지도 모르겠다.

코타르라는 인물은 혼돈을 즐기는 사림이다. 평안한 시기에 그는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페스트라는 불행 속에서 행복감을 느낀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가 페스트가 지나가고 총기난사를 하다가 잡혀간다. 어떻게 보면 코타르는 그냥 부정적인 인물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 나름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페스트가 놓였던 시기에 코탈르는 암거래를 하며 사람들과 친분을 쌓는다. 즉 그는 페스트를 통해 사회에 소속감을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페스트가 지나가자 그는 다시 사회의 이방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안정적인 사회에서 소속감을 얻는 방법은 바로 하나였다. 바로 선고를 받는 것이다. 그는 선고를 받으면 사회 속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콭타르라는 인물을 부정적인 인물로 단정짓는 것은 성급한 것 같다. 어쩌면 그는 사회에서 자신을 봐주기 위해 총기난사를 했을지도 모른다.



페스트는 삶이다, 그 삶이 부조리하다면 저항하겠다


까뮈가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문제가 터졌을 때, 그것을 인간이 직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문제를 추상적으로 생각하여 해결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추상이라는 것은 가령 내가 월급을 받는데 현금으로 받는 것과 통장에 들어와 숫자로 표기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이다. 현금은 내가 쓸 때마다 느낌이 오지만 통장에 숫자로 나온 월급은 와닿지가 않는다. 이처럼 오랑시의 사람들이 페스트와 싸울 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사망자 수가 숫자로 표기되었기 때문이다. 파늘루나 타루 그리고 리유가 세상에 저항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사람의 죽음을 바로 앞에서 봤기 때문이다. 즉, 까뮈는 사회의 부조리를 직접 대면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까뮈에게서 연대의 저항은 사람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뭉쳐서 사회의 부조리를 타파하자는 것이다. 이들은 종교도 사랑도 신도 거부한다. 이들은 오로지 인간의 힘으로 사회에 부조리에 저항을 한다. 하지만 저항에는 언제는 그 대가를 치뤄야 한다. 타루는 끝에 페스트에 걸려 죽게 되고 의사 리유도 부인의 죽음을 통해 그 대가를 받는다. 어떻게 보면 페스트와 인간 연대의 싸움에서 인간은 패배한 것이다. 하지만 패배 속에서 그들은 값진 것을 얻었다.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까뮈가 정말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인간의 연대와 그 기본이 되는 인간애인 것이다. 세상이라는 감옥 속에서 사람이 그 감옥을 버틸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인간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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