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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Feb 17. 2016

한 종교인의 평범한 삶이 세상을 바꾼다.

<달라이라마 자서전> 텐진 가쵸



마침내 식이 끝났을 때, 나는 전면의 위협에 직면한 연약한 티베트 국민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명백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내 나이 겨우 열 다섯이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듯했다. 그러나 가능하기만 하다면, 이 재난을 막는 것이 나의 의무라는 것을 납득했다. (달라이라마 자서전, 정신세계사, P102)


달라이라마 자서전을 읽으면서, 왕(이 표현이 완전히 옳지 않지만)의 고독과 그 어깨에 놓인, 무게감을 느낄 수 있었다. 점점 빼앗겨 가는 조국을 눈앞에 두며, 학살당하는 티베트인들을 보면서,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이 번번히 묵살당하는 한 젊은 이의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런데 달라이라마의, 정말 모순적인 점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복수심으로 가득차 어두운 현실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상황을 비폭력으로 일관하며 평화적으로 해결하는데 있다. 과연 그의 이런 모습은 어떻게 나온 것일까?



관조하는 삶


달라이라마의 삶을 보면, 그의 삶은 삶에 끝에 선 지도자였다. 삶의 끝에서 그를 지탱해준 것을 두 가지로 요약하자면 바로 관조하는 삶과 상처받은 티베트의 국민이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관조에 대해 나오지만, 나는 이 관조라는 것이 달라이라마를 지금의 달라이라마로 만든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관조라는 것은 세상과 연결된 자신을 분리시키고 명상을 하는 것이다. 그는 관조를 하면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홀로 앉아 있었다. 그의 관조는 종교심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티베트의 미래 때문에 명상을 했던 것 같다. 아무도 방해받지 않는 곳에서, 그는 홀로 고민을 한다. 자신에게 묻고 또 묻는다. 그는 홀로 자신의 결론을 내린다. 바로 그것은 평화이다. 책을 읽다보면, <카탈로니아 찬가>에 나왔던 장면들이 나오는데, 비록 적이라도 그들 또한 인간이라는 생각하는 마음 그것이 달라이라마를 평화로 이끈 것이다. 그에게 있어 불교적 명상은 모든 사람을 보편자로 만들어 버렸다.


상처받은 티베트인


이와 더불어, 달라이라마가 평화를 주창한 것은 티베트 국민들 때문일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달라이라마가 맑시즘을 긍정적으로 보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그는 맑시즘의 사상에 찬성은 하지만, 인간을 유물론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것에 대해서는 문제제기를 한다. 이런 이유는, 그가 본 티베트 인들의 투쟁과 죽음으로 나온 것이다. 만약 인간이, 물건과 같은 존재라면, 자유를 위해 피를 흘릴 필요가 없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하나의 미립자로 되어있는데, 그런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다스리는 세계가 망가져 가는 것을 보면서, 자유를 갈구하는 민중들을 본다. 아마, 그의 머릿 속에, 이렇게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민중들이 있다는 것을 가슴으로 느꼈을 것이고, 그는 자유의 기본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든 인간은 같다. 달라이라마의 눈에 그들은 모두 똑같은 인간들이다. 달라이라마는 인간을 살육하지 않는 불교적 교리와 더불어 그에 따라 그들이 모두 평등하고 나눠야 하는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모두 평등한 인간상에 있어 그는 유물이 아니라 유물이 채워야 하는 곳을 인간이 채웠다. 이것이 아마 달라이라마가 홀로 세상을 관조하며 내린 결론일 것이다.



한 사람의 종교인이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 (왜 한국의 기독교는 비판받는가?)


3년 전 쯤에, 수업시간에 교수님께서 '한 사람의 종교인이 바뀔 때, 세상은 바뀔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당시에는 밤낮으로 그 말을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 그 의미를 조금은 깨달을 것 같다. 나는 교회를 다니며 성도이다. 이런 젊은 성도의 눈에 지금의 한국 교회는 양적으로 팽창했을지는 모르지만 질적으로는 전혀 아니다. 그것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많지만, 예수님처럼 살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가? 교회를 크게 지으면 개독교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교회로 갈까?  사랑이 목적이 아니라 전도를 위한 전도를 하면 사람들이 교회로 올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무작정 교회의 문턱을 올려보리는 것이 옳을까? 모두 아니오다. 과거 기독교가 대한민국에 많은 영향력을 미칠 때는 바로 선교사들이 왔을 때이다. 소수의 선교사들이 와서 교회를 짓고, 병원을 짓고, 학교를 지었다. 그들은 소수였지만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와 비교하여, 지금의 기독교는 덩치만 큰 힘 없는 종이 호랑이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선교사들은 정말로 예수의 가르침으로 살려고 했고 나름 포함한 지금의 기독교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달라이라마 텐지 가초나 프란치스코 교황에 세상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들이 자신의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그 가르침을 직접 몸으로 실천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평범함 속에서 진정으로 사랑을 보여주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준다. 그때, 세상은 조금씩 닫힌 그 문을 열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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