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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Jul 02. 2019

나쁜 자기계발서, 너가 뭔데 나한테 쓴소리를 하냐?

<거대한 사기극> 이원석


최근 글을 지향하는 플랫폼에서 제일 많이 소비되는 콘텐츠는 바로 자기계발이다. 한 때는 자기계발이 문화의 한 맥락으로 이해를 했었다. 그리고 인문학 부심이 있어서 모든 가기계발설를 까내려 갔는데 그것은 나의 오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자기계발은 절대로 나쁜 개념은 아니다. 당연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자기계발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나쁜 자기계발 서적들이 판을 치고 있다. 사실 나쁜 자기계발서는 좋은 말만 쭉 써놓고 성공사례만 나열하며 아무 의식이나 사회에 대한 고민 없는 책을 나는 나쁜 자기계발서라고 생각한다. 사실 좋은 자기계발서와 나쁜 자기계발서를 나누는 기준을 잡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이원석의 <거대한 사기극>은 자기계발 시장이 어떻게 시장과 결부되고 사람들을 속이는지에 대해 역사적 발전과정을 통해 접근한 책이다. 이 책은 정말 자기계발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읽어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기계발의 역사와 두 가지 페러다임 (1) : 윤리적 페러다임


이원석은 자기계발의 역사를 조명하며 크게는 두 가지 페러다임으로 자기계발의 역사를 설명한다. 첫번째는 윤리적 페러다임이며 두번째는 신비적 페러다임이다. 심리적 페러다임 또한 존재하지만 이는 윤리적 페러다임의 변형이기 때문에 윤리적 페러다임을 이야기하며 함께 설명을 한다. 윤리적 페러다임은 근면의 힘을 믿고 외부와 주변 환경에 탓하지 말고 스스로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성실한 노력을 중시하는 것이다. 윤리적 패러다임은 미국의 개척시대와 건국의 아버지들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미국은 기독교 국가로 시작되었다. 개신교의 청교도 윤리를 그 바탕에 두고 있는데 기독교를 믿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내가 교회를 다니고 예배를 보는데 예수님이 돌아오시고 심판의 날에 구원을 받을지 아닐지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청교도 윤리는 근면과 금욕을 하며 돈을 열심히 벌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의 성공이 구원의 증거가 된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건국의 아버지들은 이신론을 믿으며 미국의 척박한 땅을 정복한다. 기독교의 이신론은 개신교의 입장에서 이단이다. 지금 기독교에서 하나님이라는 신은 성도의 삶에 관여하는 신이지만 이신론의 신은 이 세상을 창조하고 우주 어딘가로 떠나서 더 이상 인간의 삶에 간섭을 하지 않는 신이다. 신이 사라진 세상에서 인간은 우주와 자연법칙에 순응하는 동시에 자유를 얻게 된다. 청교도 윤리와 이신론은 미국의 개척시대에 원동력이 되었다. 미국의 황무지 속에서 사회적 인프라는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믿을 수 있는 것은 자기자신 뿐이었다. 근면하게 일하고 부를 쌓고 끝없이 자기 자신을 계발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자기계발은 태생부터 아주 미국스럽고 미국적인 것이다. 미국의 자기계발의 아버지는 <프랭클린 자서전>을 집필한 벤자민 프랭클린이다. 그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에서 제일 미국스럽고 미국의 정신의 화신 그 자체다. 프랭클린은 끝없이 자기 쇄신을 하며 경제적인 성공을 이룬다.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1850년대에 유럽에서 세뮤얼 스마일즈는 <자조론>이라는 책을 펴낸다. 자조론은 '스스로 자신을 돕는다'라는 주제로 삼는다. 그는 사회개혁을 하려고 했지만 좌절되고 초점을 개인의 개혁에 맞추게 된다. 그는 인격을 중시했다. 그런데 인격이라는 말이 매우 모호하기 때문에 습관의 변화를 통해 인격을 고양할 수 있다는 해답을 내놓는다. 습관의 변화를 통해 성공을 하는 것은 인간이 자신이 노력하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내포하고 있다. 윤리적 페러다임은 경제 상황이 좋고 발전 가능성이 좋을 때 가능하다. 1927년 미국의 대공황이 일어나게 되고 윤리적 페러다임의 바톤을 이어받은 사람은 바로 데일 카네기였다. 데일 카네기가 초점을 맞춘 것은 미국 내에 세일즈맨이 증가하게 되고 거절받는 상황이 증가하자 이들을 위한 인격적 자기계발 프로그램을 만들게 된다. 카네기가 프랭클린이나 스마일즈와 다른 점이 있다면 정신적인 가치는 배제하고 윤리적 페러다임을 오로지 기술의 영역으로 타락시켰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카네기는 인간관계 잘 하는 기술이나 감성과 심리에 대해 초점을 맞춘다. 데일 카네기의 <인간 관계론>을 기점으로 심리적 페러다임이 나타나게 된다. 미국의 경제 상황이 나빠지고 1960년대 시위가 많아지며 미국 사회는 극도로 불안한 사회로 변모한다. 1980년대 스티븐 코비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집필한다. 이 책은 카네기의 기술에만 집중하는 태도를 비판하며 다시 인격과 성과를 중시하게 된다. 1990년대에는 경영학의 아버지 피터 드러커와 <초유량기업의 조건>을 집필한 톰 피터스의 경역하적 용어와 윤리적 페러다임이 만나게 되어 자기계발에서 경영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사용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1997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벤처 기업들이 우후죽순 나타나고 경영인들의 자기개발서가 쏟아져 나온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제 더 이상 개인의 실존(과 그 의미)을 고민하는 청춘은 없다. 자아와 생각의 대등한 통합을 모색하는 청춘도 없다. 그들의 자아는 세상 앞에 맞설 정도의 무게를 가지고 있지 않다. 세상 안으로 어서 편입하고 싶어 안달하는 겉늙은 청년들만 있을 뿐이다. 돈이 없어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3포 세대가 아픈 이유는 청춘이라는 아름다운 세대에 속해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망령이 배회하는 아름답지 못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사기극, 북바이블, pp.93-94)


데일 카네기를 기점으로 윤리적 페러다임에서 심리적 페러다임이 파생되었다고 밝혔다.심리적 페러다임은 윤리적 페러다임의 상업화 과정에서 습관과 같은 인격 대신에 기술을 강조하는 페러다임이다. 즉 한 개인의 정서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대공황 같은 시기에는 개인의 노력으로 성공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하여 개인의 노력보다는 심리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카네기 이후 1980년대 차일디니는 <설득의 심리학>을 집필한다. 그는 감정의 상품화를 이루어 냈으며 정신의 안정을 중시했다. 심리적 페러다임은 긍정심리학과 행복 연구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이런 긍정심리학이나 치유는 사회와 외부세계를 외면하고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긍정심리학의 문제는 세상의 구조적 문제나 부정적 현실을 대면하지 못하게 만들며 이상적 세상을 통해 현실을 긍정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상적 세상을 생각한다고 현실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자신에 집중하는 심리학 자기계발서는 사회가 불안하고 경쟁이 심해지며 개인의 부담이 커지는 사회 속에서 최고의 마약이 된다. 그리하여 심리학적 자기계발만 읽는 젊은 세대는 나약해지며 세상과 맞서 싸우는 용기나 힘을 상실하게 되며 사회의 부조리나 불합리함에 순응하게 된다.



자기계발의 역사와 두 가지 페러다임 (1) : 신비적 페러다임


자기계발의 다른 주류는 신비적 페러다임이다. 신비적 페러다임은 자신의 지성에 모든 것을 맡기고 계속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생각하면 목표를 이룰 수 있음을 강조한다. 신비적 페러다임은 유니테리어니즘으로부터 나타나게 되었다. 유니테리어니즘은 청교도에 대한 반감으로 시작되었다. 기독교에서는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의 삼위일체를 믿는다. 그러나 유니테리어니즘은 성부 하나님만을 인정하며 성자 예수님을 믿지 않으며 예수님은 신이 아니라 선지자 중 한 명이며 모방해야할 성인으로 생각한다. 또한 기독교의 근본 개념인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어 발생한 원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성자 예수님이 자리에야할 위치에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으며 신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이러한 유니테리어니즘은 미국의 초절주의와 신사고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초절주의는 개인의 자유, 개인의 자립을 중시한다. 이들은 칸트와 헤겔의 합리론에 영향을 받아 인간의 이성을 위대하고 완벽하게 바라본다. 이원석이 지적한 바에 따르면 초절주의는 자기계발의 모태가 되는 낙관주의를 잉태하게 되었다. 낙관주의는 인간의 능력과 가능성에 대한 무하한 믿음에서 비롯된다. 신사고 운동은 인간의 부와 건강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하여 신비적 페러다임은 인간의 이성이 믿고 생각하는대로 세상이 이루어진다는 담론을 생성시킨다. 즉 신비적 페러다임의 핵심은 인간의 이성을 완전하게 보며 이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이 목표한 것을 모두 이루게 만든다는 것이다.


1910년대에 월레스 와톨스는 <부자가 되는 과학적 방법>을 집필했다. 그는 모든 방법을 과학적 방법론인 인과성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와톨스가 이 저서에서 핵심적으로 다루는 것은 바로 심상화다. 심상화란 믿으면 이루어진다는 심념이다. 그 이후 1990년대에 나폴레온 힐은 <성공의 법칙>을 저술하며 내용은 윤리적 페러다임의 영역을 저술한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런 실천을 할 때도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성공을 하겠다는 신념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이원석이 책에서 지적한 것은 이때까지 신비적 페러다임의 자기계발서에는 그 시대의 사상과 문제의식이 존재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리얼리티 트랜시핑>과 <시크릿>이 2007년 금융위기 이후 대박을 치게 된다.  론다 번의 <시크릿>은 윤리적 페러다임이나 이전의 신비적 페러다임에서 이야기했던 실천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 즉, 끌어당김의 법칙이라고 하여 계속 생각하는 것만으로 성공을 할 수 있다는 어이없는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시크릿>같은 이상한 이야기가 2007년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던 이유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비참함과 개인의 힘으로 더 이상 성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윤리적 페러다임의 경우 개인의 의지와 노력이 성공을 이룬다고 하지 않았는가. 경제 자체가 어려운 시기에 윤리적 페러다임은 힘을 쓰지 못한다. 오히려 <시크릿>과 같은 유사종교의 자기계발서가 성공을 하게 된다. 이원석이 주장하는 것은 자기계발서는 윤리적 페러다임, 심리적 페러다임 그리고 신비적 페러다임의 자기계발서들이 언제나 서점가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가 좋을 때는 윤리적 페러다임이 득섹를 하며 경기가 좋지 않으면 심리적 페러다임과 신비적 페러다임의 자기계발서가 득세를 하게 된다.


대한민국 사회와 자기계발서


그렇다면 대체 문제는 무엇인가. 바로 자기계발의 '타락'이다. 처음의 진지한 문제의식과 지적 성찰은 시간이 갈수록 퇴조하고, 실로 진부한 표현이지만, 자본의 논리에 포섭되고 말았다는 뜻이다. (거대한 사기극, 북바이블, p.69)


자기계발서가 미국과 한국에서 대박을 치는 것은 대한민국과 미국이 닮아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6.25 전쟁 이후 폐허가 되었으며 자원도 없는 그 모습이 마치 미국이 개척을 할 때와 같은 모습을 연상케한다. 한국은 경제발전을 이룩하면서 국가와 사회전체적으로 윤리적 페러다임의 자기계발을 장려했다. 신비적 페러다임의 경우 경제발전을 이룩하며 기독교 신앙에 제대로된 신앙적 교육을 받지 못했던 1세대 목사님들과 교회 내에서 신비적 페러다임을 장려했다. 유시민의 <나의 한국현대사>에서도 지적한 것 같이 한국은 돈과 욕망을 추구할 벌판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고 지적했는데 한국 사람들의 욕망과 1세대 목사님들의 기복적 신앙관은 대한민국에서 자기계발을 하는데 첫 단추를 끼기 아주 좋은 벌판이 되었다. 교회에서 자기계발적 설교를 듣고 사람들은 일터로 나가 열심히 일하고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다. IMF 이전까지 윤리적 페러다임의 자기계발이 득세를 했다. 그러나 IMF와 2007년 금융위기에는 신비적 페러다임으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이지성의 <꿈꾸는 다락방>, <시크릿> 같이 믿으면 된다 식의 자기계발서들이 우후죽순 나타나게 된다. 이원석은 자기계발에 대해 나름의 중립성을 지킨다. 그는 모든 자기계발서를 읽지 말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전이 된 자기계발서를 통해 그 당시의 사회문제와 의식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을 권한다. 그러나 이원석은 자기계발서에서 아무런 철학도 없고 돈을 벌기 위해 짜집기만 반복하는 자기계발서들을 비판한다. 


2013년 이후의 자기계발서는 '쓴소리' 교주들을 따르는 세상


<거대한 사기극>이 2013년에 출판되고 최근에 이원석의 <대한민국 자기계발 연대기>가 2018년에 나오게 되었다. 나중에 한 번 읽어보아야 겠다. 여하튼 최근 석사학위 논문을 쓰며 느낀 것은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의 발전이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켜 놓았다는 것이다. 특히 2018년 후반기에 유튜브에는 윾튜브라는 신인이 나타나 단기간에 60만 구독자를 만들고 과거행적 때문에 사라진 일이 있었다. 윾튜에게서 본 것은 바로 종교와도 같았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신비감을 표출하며 자신이 생각하기에 옳다고 믿는 신념을 사람들에게 내뱉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열광을 했다. 그때 그의 모습은 마치 사이비 교주 같았다. 그러나 그가 나중에 몰락하게 된 계기는 그의 가면 속의 얼굴이 드러나게 되었고 더 이상 그는 교주같은 카리스마를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사실 윾튜브 같은 사람들은 계속 나타나게 될 것이다. 윾튜브가 사회적 지위가 없었기 때문 가면을 통해 신비로움으로 자신을 치장했다면 이제는 신비로움을 조장할 필요 없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통해 새로운 교주가 될 수 있게 되었다. 유튜브를 보다보면 가끔 추천 영상에 '~선생님의 쓴소리'라는 영상이 뜨는데 이 분의 영상을 보면서 어이가 없었다. 학원에서 강의하시는 분인데 정말 학생들의 인격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경쟁에서 승리해야 한다고 욕을 섞어가며 하는 그 모습에서 역겨움을 느꼈다. 그런데 이러한 쓴소리는 자기계발 시장의 주류로 자리잡게 되었다. 사실 최근의 이러한 쓴소리하는 강사들이나 자기계발 강사들은 <거대한 사기극>의 윤리적 페러다임, 신비적 페러다임, 심리적 페러다임 중 하나로 설명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시크릿>과 같은 신비적 페러다임을 읽는 사람들은 쪽팔림의 대상이 되어 사라지게 되었고 심리적 페러다임의 치유는 에세이 쪽의 거대한 장르로 성장했다. 지금 가지계발 시장에 남아있는 것은 윤리적 페러다임과 심리적 페러다임이 섞여버린 '쓴소리 페러다임'이다. 이는 유튜브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젊은이들에게 독설을 퍼부어서 멘탈을 부숴놓고 자신의 말을 믿으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연설을 늘어 놓는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 이 사람들의 말하는 방식이 윾튜브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사이비 종교같이 만들어 강한 팬덤을 형성하고 자신은 교주가 되는 방식이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쓴소리로 사람의 인격을 밟아 버리는데 이들의 말을 어떤 소비자가 따르냐는 것이다. 즉, 이런 콘텐츠를 소비하는 소비자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2016년을 전후하여 사회문화와 경제 강사였던 최진기와 역사 강사인 설민석이 등장하게 된다. 이들은 내가 수능을 보기 전에 메가스터디에서 강사를 시작했던 사람들이다. 즉, 메가스터디의 인터넷 강의가 등장하면서 전국의 모든 학생들이 소수 학원들의 인강을 소비하게 되었다. 이때 인강을 소비했던 소비자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조금씩 경제인으로 편입되는 순간 최진기와 설민석이 공중파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즉, 최근에 다수의 젊은 층은 인강 세대이며 스타 강사들에 대한 사랑이 있다. 학원 강사들은 인강이 나타나고 연예인과 같이 되었다. 그 당시 스타 강사들이 하는 일화, 쓴소리를 듣고 자란 세대가 바로 지금의 20-30대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 세대에게는 고등학교 때 인생을 잡아주었던 학원 강사들이 필요하다. 멘탈이 흔들리면 그것을 잡아주던 강사들, 동기부여가 안 될 때 동기부여를 해주던 사람들이 강사였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인강을 자신의 멘탈관리를 위해 강사들의 강의를 들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수많은 20-30대가 쓴소리하는 청년 멘토나 자기계발 작가들에게 열광을 하는 것이다. 아직도 쓴소리를 듣고 멘탈을 잡고 있다면 반성 좀 해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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