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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Feb 25. 2016

글쓰기와 샤르트르

<말> 장 폴 샤르트르

나는 불안 속에서 살았다. 이유 없이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가증 큰 것부터  가장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는 저마다 이 세상에서 뚜렷한 제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의식적 태도를 통해서 내게 납득시키려고 했는데, 정작 나 자신이 존재 이유는 오리무중이었다. 나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임을 별안간 깨닫고는, 이 질서 정연한 세계에 끼여든 나의 괴이한 모습이 부끄러워 지는 것이었다.

<샤르트르 말, 민음사>


샤르트르의 <말>은 샤르트르의 자서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자서전은 젊은 시절에서 막을 내리게 된다. 생각을 해보면, 자서전이라는 것은 자신의 황혼기에 자신의 궤적을 바라보면 쓰는 것인데, 왜, 그의 자서전은 젊은 날에서 끝을 맺고 있는 것일까?



읽기의 세계와 할아버지


어린 샤르트르는 어린 시절, 수없이 많은 책을 보았다. 또한 집에서 샤르트르는 자신이 언제나 가족의 주인공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 그는 책을 읽으면서 다양한 상상을 하며 정신적 유희를 즐기고 있었다. 샤르트르에게 있어 책을 읽는 다는 것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위안이었다. 그는 책에 빠져 들어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거기서 지적인 즐거움을 느꼈다. 그러나, 어느 날, 어린 샤르트르는 '읽기'라는 것이 관념에서 시작되는 것을 느낀다. 샤르트르의 관점에서 책을 본다는 것은 일종의 연극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책을 읽을 때는 마치 연극에 몰입하듯 우리는 주인공에 감정이입을 한다. 하지만, 연극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다시 연극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돌아간다. 즉, 이를 통해 샤르트르는 책이라는 것은 관념일 뿐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와 더불어 그에게 큰 사건이 있는데, 그는 인간 사이에서 관념화된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언제나 자신이 집에서 왕처럼 느꼈던 어린 샤르트르가, 어른들의 본질을 직면했을 때의 일이다. 샤르트르는 어른들이라는 존재가 자신 앞에서는 잘 해주지만, 정말 중요한 사건에서는 자신을 배제시킨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즉,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어머니가 샤르트르에게 해줬던 행동들은 현실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관념화된 장면이었을 뿐이다.



쓰기의 세계로 넘어가다


어린 샤르트르에게 이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글쓰기기를 시작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샤르트르에게 있어 일시적인 구원이었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 '쓰기'라는 것은 '읽기'에 비해 글쓰기라는 것은 자율성을 가진다. 즉, 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글을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쓰기도 관념의 연장선이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죽음이라는 관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그의 글쓰기는 너무나 처절하게 묘사가 되어 있는데, 책 한 페이지, 페이지를 쓸 때마다 그는 자신의 묘비명을 쓰는 것과 같은 것을 느낀다. 즉, 자신이 죽었을 때, 남는 것은 그의 묘비명 즉 글들이다. 사람들은 그의 글을 보면서 샤르트르를 실존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관념으로 인식할 뿐이다. 그는 책을 한 권, 한 권, 쓸 때마다 자신의 죽음을 확인하는 것이라 생각을 한다. 즉,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글쓰기를 샤르트르는 경멸하게 된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그는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읽기+쓰기=샤르트르의 존재?


그는 모든 회의 끝에 자신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은 단지, 그냥 아무 것도 아닌 인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글쓰기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된다. 이때, 그는 죽음의 글쓰기로 해방되기 시작한다. 그에게 있어 글쓰기는 일상이다. 그에게 있어 더이상 의미는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는 존재라는 것이 마치 사물처럼 이 세계에 던져진 것이라고 주장을 한다. 즉, 그가 제일 잘 하는 것은 글쓰기이기 때문에 글을 쓴다. 글을 쓸 때, 샤르트르의 존재는 완성이 된다. 그에게 있어, 과거라는 것은 전혀 필요가 없고, 미래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지금, 하루를 사는 것이 샤르트르의 존재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자서전이 왜, 젊은 날에 멈췄는지를 밝혀야 겠다. 그의 젊은 날에 그는 자신의 모습을 찾았고, 그 모습이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그 이후의 삶에 대해 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즉, 샤르트르의 삶은 어린 시절에 멈춰져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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