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민성 Feb 20. 2016

오늘,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기억하며...

<장미의 이름> 움베르토 에코 : 그의 죽음을 추모하며...


<장미의 이름>을 지은 움베르토 에코가 세상을 떠났다. 예전에 그의 책 <장미의 이름>을 읽었었는데, 처음에 백 페이지를 읽다 기절할 뻔한 기억이 있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중세의 어두운 시기를 너무나 사실적으로 보여주었다고 생각했다.


첫 100페이지를 읽을 때 우리는 중세의 수도사가 된다.


<장미의 이름>을 읽을 때, 처음부터 고비가 찾아온다. 그것은 수없이 많은 수사학에 대한 이야기들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읽다가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포기했다. 하지만 에코가 왜 이 지루한 수사학을 독자들에게 들이 밀었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이다. 대부분의 소설들은 소설의 첫 문장을 중요시한다. 그 이유는 독자와 작가가 처음 만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첫 부분을 독자들의 관심을 끌만한 것들을 들이민다. 하지만 에코는 독자들에게 수사학을 들이 밀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가 그 지겨운 수사학을 하나하나 읽어가며 우리가 에코가 창조한 중세의 시대로 걸어가는 통과의례와 같은 것이다. 그의 생각으로는 그 100 페이지를 넘어서지 못하면, 독자가 자신의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독자들은 그 지겨운 수사학들을 겨우 겨우 읽어가면서 독자의 생각이 현대적 관점에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중세 말기의 수사학에 관심을 보이고 새로운 것에 대한 앎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수도사들로 만드는 작업인 것이다. 우리들은 대부분의 소설을 현대의 관점으로 보지만 에코의 소설이 무서운 이유는 우리를 그가 만든 세계에 우리를 묶어두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에코의 <장미의 이름>의 첫 부분을 읽고 나면 그가 창조한 세계의 중세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다.


중세에서의 앎은 곧 권력


중세에서는 신학이 절대 진리라는 것이라는 것에 대한 것부터 시작이 된다. 즉, 중세 시대의 수도사들이 추구하던 것은 어쩌면 신이라는 존재보다 절대적인 진리에 목숨을 매었던 것 같다. 한 수도원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살인을 조사하는 두 수도사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 소설은 중세의 진리에 대한 집착을 통한 권력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여준다. 중세의 성직자들은 우리가 알다시피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사제들을 통해 민중들이 신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순간 중세에서 이런 신부들과 수도사들은 신에 대한 사랑보다 일반 민중들이 알지 못하는 섭리를 자신이 알고 잇다는 자부심에서부터 그 권력이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앎을 어둠 속에 가두어 두려고 한다. 또한 라틴어를 안다는 것 또한 성직자의 권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런 앎에 대한 지배는 민중들의 일상생활을 하나 하나 다 지배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민중들은 기독교에 열광했던 이유는 바로 자신들의 내일의 삶이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윌리엄 수도사는 그들에 비해 깨어있는 수도사이다. 과거에 수사학이 단지 그런 이해해 머물러 있었다면, 윌리엄의 수사학적 지식은 이론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즉, 그는 중세의 구조적 문제에 대해 비판을 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장미의 이름


누군가에게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래의 시를 보자!


김춘수의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꽃의 소묘(素描), 백자사, 1959>


즉,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그 존재에 대한 온전한 올바른 의미를 아는 것이다. 우리가 장미라는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장미 꽃이 얼마가 하는지, 어디서 파는지 그런 세부 정보를 알 필요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장미에 대한 진리는 바로 그 아름다움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는 장미꽃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만 초점을 맞춰야 한다. 하지만, 장미가 얼마인가 라는 것에 정신이 팔이게 되면 우리는 그 장미를 어떻게 하면 더 잘 팔 수 있나 아니면 어떻게 더 싸게 살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이 바로 에코가 비판했던 중세 수도사들의 모습이었다. 진리라는 것은 진리 그 자체로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왜곡하는 순간 우리는 평생 장님의 눈으로 진리를 못 볼 것이다.



에코가 만든 중세


에코의 소설을 읽다보면 그는 하나의 중세를 그의 책에다 담아 냈다. 그는 소설 속에서 중세를 만들기 위해서 그의 삶을 중세 사람처럼 만들었다. 즉, 과거에 자살을 한 히스레저가 조커 역을 연기하기 위해서 조커처럼 삶을 살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는 소설에서 '소설의 세상이 만들어지면 언어는 따라온다'라고 믿었다. 그만큼 그는 중세를 정확하게 구현하려고 만들었다. 또한, 그는 각각의 캐릭터들을 만들 때, 그가 만들어 놓은 중세의 매커니즘에 따라 움직이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독자들 마져 앞의 지루한 100페이지를 통해 중세의 수도사들처럼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그의 책< 장미의 이름>을 읽는 다는 것은 우리가 그의 세계 속에서 그가 만든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멋진 소설가를 잃었다는 것이 큰 슬픔으로 남는 밤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