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의 역사> 미셀 푸코
많이 부족한 글입니다. 제가 이 글을 쓰고 있지만 많이 어렵네요 ㅎㅎㅎㅎ
혹시 제가 잘못 이해한 부분이 있다면, 코멘트 해주세요 ~
나름 연구를 했는데, 철학은 어렵습니다 ^^
아르토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줄기차게 공언한 것은 세계의 엄청난 광기, 태양과 같은 광기, 찢긴 의식 속에서 끊임 없이 실현되는 "불의 막마와 같은 존재의 삶과 죽음"이 우리의 문화 밖으로 떠밀린 날부터 우리 문화의 중심인 비극의식이 상실되었다는 것이다. (중략) 합리적 사유를 이끌어 광기를 정신병으로 분석하도록 하는 올바른 엄정성이란 것은 수직적 차원에서 재해석되어야 한다. 그러면 합리적 사유의 각 형태 아래 이 비극적 경험이 더 완벽하게, 또한 더 교묘하게 가려져 있다는 것, 그렇지만 이 비극적 경험이 합리적 사유에 의해 완전히 축소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속박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필연적으로 폭박이 일어난다. 니체 이후에 우리는 이 폭발을 목격하고 있다. (광기의 역사, 나남출판, p.86)
<광기의 역사>를 읽기 전에 이해해야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미쉘 푸코가 역사의 시간을 어떻게 보았는지 말이다. 이를 위해서 푸코의 스승이었지만 잘 알려지지 않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시대 개념을 가져와야 한다. 바슐라는 시대를 '단절'과 '감싸기'로 보았다. 먼저, '단절'이라는 개념은 각 시대가 연속적이지 않고 단절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울 때 17세기는 18세기, 19세기를 연속적 개념으로 보지만 바슐라르는 각각의 시대가 각기 다른 시대라고 명명했다. 그 시대를 가르는 것은 바로 시대 정신이다. 시대 정신은 당시 사람들의 사고를 좌우하는 생각이다. 지금 우리로 따지면 자본주의적 사고가 시대 정신이고 우리는 자본주의 사고를 한다. 그와 더불어 '감싸기'는 이전 시대의 시대 정신이 다음 시대의 시대 정신의 한 부분으로 놓인다는 것이다. 예컨데, 조선과 대한민국은 완전히 다른 시대다. 조선은 유교의 국가이지만 대한민국은 서양의 법과 제도를 들여와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서양의 제도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과거 유교주의는 문화나 삶의 방식에 살아 숨쉰다. 이것이 바로 감싸기다. 한 시대의 시대 정신은 다음 시대에 완전히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 정신의 밑에 놓이게 된다. 바슐라르의 단절과 감싸기를 통한 시대 정신을 푸코는 에페스테메라고 지칭하고 이를 받아들였다.
사실, <광기의 역사>에서 에페스테메라는 개념이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고, <말과 사물>에서 나오지만 이 개념을 알고 있으면 책을 조금은 순조롭게 읽힌다. 에페스테메가 기준이 되자 푸코는 그동안의 역사의 분류법을 자신에게 맞게 만들어 버린다. 푸코는 중세 기독교 시기, 데카르트가 이성을 통해 주체를 발견한 시기를 고전주의 시기 마지막으로 현대에 이르는 시기를 실증주의 시대라고 명명했다. 푸코의 이런 시간 개념은 그의 저서 모두를 관통한다.
바보들의 배
그런데 기이한 일은 17세기에 이루어진 바와 같은 수용의 영향 아래, 성병이 의학의 맥락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나가고 광기와 더불어 도덕적 배제의 공간에 통합된 것이다. 사실상 성병에서가 아니라,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의학적으로 편입될 매우 복잡한 현상에서 나병의 진정한 유산을 찾아보아야 한다. 그 현상은 바로 광기이다. (광기의 역사, 나남출판, p.50)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보면 돈키호테는 광인이다. 하지만 지금의 광인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돈키호테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과 어울리며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밥도 같이 먹는다. 광인은 마을에서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도 했으며 사회의 삶의 일부였다. 오히려 광기라는 것은 신의 은총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광인들이 말하는 것은 신의 말씀을 매개하는 것이며 신적인 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존재로 보았다. 시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광인을 보기란 쉽지가 않다. 대부분 정신병원으로 가게 되었다. 푸코는 그동안 우리와 함께하던 광인들이 왜 정신병원에 갇히게 되었는지에 대해 밝히고 싶어한다. 즉, 어떤 기준을 통해서 광인이 사회의 일부에서 격리의 대상이 되었는지를 밝힌다고 해야겠다.
광인 감금되다
사람들은 비곤을 신성화하는 종교적 경험에서 빈곤을 정죄하는 도덕적 이해로 슬그머니 넘어간다. (광기의 역사, 나남출판, p.135)
모든 수용자는 이러한 윤리적 가치 평가의 대상이 됨으로써 실로 인식이나 연민의 대상이기 이전에 '도덕 문제'의 대상으로 취급된다. (광기의 역사, 나남출판, p.139)
17세기 이 이전에도 광인이 강금되는 일은 있었지만 광인과의 연관성이 인정되는 집단 전체에 광인을 섞어 넣음으로써 광인을 수용하기 시작하는 때는 17세기이다. 르네상스 시대까지 광기에 대한 이해 방식은 상상계의 초월적 존재가 광기를 통해 드러난다는 생각과 관계가 있었다. 그러다가 고전주의 시대부터 역사상 처음으로 광기는 무위도식에 대한 윤리적 단죄를 통해 인식되고 또한 노동 공동체로 확고해진 사회의 내재적 존재로 인식된다. 이 노동 공동체는 윤리적 분할의 권한을 획득하여, 사회에 불필요한 모든 형태를 마치 다른 세계에 속하는 것인 양 배척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다른 세계'에서 광기는 현재 우리가 광기에 대해 인정하는 그 지위를 갖게 될 것이다. (광기의 역사, 나남출판, p.157)
고전주의 시기에 이르면 광인을 새롭게 규정한다. 서양의 고전주의 시기하면 '이성'이 제일 먼저 떠오를 것이다. 이 시기에는 이성을 가진 존재를 정상인으로 보았고 이성적으로 생각 못하는 존재를 광인으로 보았다. 이성이 돌아가는 사회에서 이성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회 부적응자일 뿐이다. 대감호에 갇힌 사람은 광인만 갇힌 것은 아니었다. 정치범, 사상범, 범죄자와 같은 사람들도 대감호에 갇혔다. 이 시기는 기독교와 자본주의가 결합을 하게 된다. 노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신의 관점에 따라 도덕적이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런 도덕적이지 않은 사람을 교화하고 통제하는 것은 바로 국가다. 그리하여 국가는 사회에 부적응한 사람들을 교정하기 시작한다. 먼저 육체를 통제한다. 대감호에서 붙잡혀 있는 사람들은 신체적 고통을 당하며 노동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런 신체적 고통은 비이성적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며 광인의 해방이 시작된다. 이때는 훈육하고 두들겨 패지는 않지만 도덕적으로 훈육을 한다. 대감호에 가둘 때는 육체를 통제했지만 이제는 정신을 통제하는 것이다. 계속적으로 도덕을 주입받도 이성적 삶을 주입받게 되면 인간은 단순하게 그 논리에 따르게 된다. 사실 스타트업을 하는 분들의 포스팅을 종종 볼 때가 있는데 하나의 공통점은 '~을 배웠다.' '~을 혁신해야 한다.'라는 말을 주로 한다. 사실 이런 말이 몇 년전만 해도 보기 힘들었지만 요즘은 많은 사람이 이런 강박관념적 성향을 보인다. 노는 것은 부덕이며 무엇인가를 해야하는 모습은 푸코가 지적한 것과 매우 흡사하다.
정신병원의 등장
다시 말해서 이러한 죄의식 때문에 광인은 자신과 타자에게 어느 때이건 제공되는 징벌의 대상이 되고, 이 대상의 지위에 대한 인정과 자신의 죄의식에 대한 자각에서 자유롭고 책임 있는 주체의식으로, 따라서 이성으로 복귀하게 되어 있다. 시선에서만큼이나 노동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정신병자가 타자에 대해 대상화됨으로 써 자유를 되찾는 이 움직임이다. (광기의 역사, 나남출판, p.742)
여기에서 선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은거처에서 정신병자와 감시인의 공동체가 갖는 대가족의 모습이다. 겉보기에 이 가족은 환자를 정상적이고 동시에 자연스러운 환경 안에 위치시키는 긋하지만, 사실상 환자를 더욱 더 소외시킨다. 즉, 광인에게 지정되는 법적 미성년의 지위는 법적 주체로서의 광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겠지만, 이 예부터의 구조가 공존의 형태로 변하면서부터는 심리적 주체로서의 광인을 이성인의 권한과 위세에 전적으로 내맡겨버리는 결과를 초래하는데, 이에 따라 이성인은 광인에게 구체적인 성인의 모습, 다시 말해서 지배와 합목적성의 형상을 띠게 된다. (광기의 역사, 나남출판, p.748)
고전주의 시기 처음에 광인은 대감호게 가두어 졌었다. 그러나 잠시 광인은 해방이 되고 도덕적 교화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실증주의 시기에는 다시 광인은 정신병원에 갇히게 된다. 푸코가 지적하듯이 정신 의학이라는 것은 광인을 관찰하다 만들어 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의학이 발달함에 따라 사회의 개인은 배제를 당하게 된다. 사실, ADHD라는 것이 1950년대 학교에서 발견이 되었을까? 그 당시 아이가 단지 산만한 것으로 치부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의학이 발달함에 따라 산만한 아이는 ADHD를 앓는 환자가 되고 치료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이제 광인은 사회 부적응자에서 위험한 인물이 되었다. 위험한 인물의 기준은 고전주의 시기의 기준이었던 도덕성이며 죄책감이다. 푸코가 지적하는 것은 지금 우리 시대는 거대한 정신병원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끝없이 병명을 부여하면서 우리 자신을 감시하고 서로를 감시하는 제도를 만든 것이다. 푸코가 지적한 정신병원의 권력화 현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마른 여성들은 자기검열을 하며 끝없이 다이어트를 하고 동시에 뚱뚱한 사람을 지적한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개인은 자신이 끝없이 이뻐지고 잘생겨야 한다고 자기 검열을 하며 못생긴 사람을 지적질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버는 것은 미덕이다. 돈을 못 벌면 쓸모 없는 사람이라고 치부해버린다. 이런 권력들은 모든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켜 버리면서 구조의 문제를 가려버린다. '열정 페이'도 같은 맥락이다. 자본가의 탐욕을 열정 페이라고 가려버리고 열정이라는 개인적 문제로 환원시킨다. 푸코가 묻는 것은 이것이다. 도대체 누가 이런 기준을 설정하는가? 푸코의 논리에 따르면 사회는 다양한 권력 관계의 싸움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지금 우리를 관통하는 이념이라는 것은 두 개념이 잘나서가 아니라 수많은 이데올로기와 싸워 이겼기 때문이다.
니체의 초인이 되어라!
작품과 광기가 함께 태어나고 완성되는 순간은 세계가 작품에 의해 소환되고 작품 앞에서 세계 자체의 모습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사건의 시초이다. (광기의 역사, 나남출판, p.815)
니체의 사상을 사랑했던 푸코는 니체의 '초인' 개념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본다. 푸코는 그리스적 인간을 생각하며 언제나 자신을 초극하라고 한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자신이 사회 권력에 종속되지 않았나 고민하는 것이다. 초극의 기준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어제의 나보다 자신에게 집중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 그런 사람이 된다면 이런 감옥의 세상은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푸코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