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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Mar 23. 2016

악의 꽃... 추함과 아름다움은 어쩌면 같은 것일지도?

<악의 꽃> 샤를 보들레르






프랑스의 상징주의는 나를 매혹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상징주의와 낭만주의의 차이점부터 집고 가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둘의 공통점이라고 본다면, 이 사회가 짜증스럽고, 답이 안 나오는 곳이라고 느끼는데, 그 주안점이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세계를 극복할 방법을 모색한다.낭만주의자들의 경우, 사회를 떠나버린다. 그에비해, 상징주의자들은 사회라는 곳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버린다. 그래서, 그들의 시는 절망적이고, 지옥에 서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들의 시가 니힐리즘에 빠졌다면, 우리에게 그렇게 회자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상징주의자의 대가 보들레를 통해서 상징주의자들의 생각을 옅보려고 한다.


 보들레르에게 있어 사회라는 곳은, 정말 지옥 그 자체였다. '파리의 우울'에 나온 '이 세상 밖이라면 어디든지'라는 시에서는 이 세상을 병원에 비유를 한다. 보들레르가 보는 세상은 이 사회가 하나의 거대한 병원이며, 누구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곳이라고 한다. 그들에게 있어 하늘이라는 곳은 뚜껑과 같은 것이어서, 우리의 탈출을 막는 존재로 치부된다. 보들레르는 그 누구도 이 지옥같은 사회를 벗어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절망한 상징주의자들에게 남는 것은 앉아서 사회를 관찰하는 것이다. 보들레르의 시 중 교감(Correspondances)를 보면, 그는 그가 놓여있는 이 세계를 관찰하고 교감을 하려고 한다. '인간이 그곳 상징의 숲을 지나가면, 숲은 정다운 시선으로 그를 지켜본다.'(문학과 지성사 '악의 꽃' p50) '향기와 색체와 소리 서로 화답한다.'와 같은 구절이 있듯이, 보들레르는 자신이 놓여있는 세계를 관찰하며, 자연과의 교감을 하려한다. 보들레르의 눈에서 자연이라는 것은 불멸하고 영생을 누리는 존재이다. 아마, 그는 이런 세계를 보면서 추한 인간에게서 희망을 찾은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그가 혐오하던 더러운 인간에게서, 어떻게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자연과 대비되는 인간의 유한성 때문이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시가 바로 '고통의 연금술'(Alchimie de la douleur)이다.


고통의 연금술

               보들레르


어떤 이는 제 열정으로 너를 비추고

또 어떤 이는 네 속에 제 슬픔의 눈물을 놓는다. 자연이여....

어떤 이에게 ‘묘지여’라고 말하는 것은

다른 이에게는 ‘생명과 광채여’라고 말하는 것


나를 보살피고

언제나 나를 겁나게 하는 수수께끼의 헤르메스여

너는 나를 연금술사 중에 가장 슬픈

마이더스와 같게 만드는구나


너에 의해 나는 금을 쇠로

천국을 지옥으로 변하게 만든다

흰구름의 수의(상복) 속에서


사랑하는 이의 주검을 찾아

천국의 기슭 저편에서

난 대석관들을 새우리라


이 시의 묘미는 바로 자신의 세상을 뒤집어 버리는데 있다. 지금 보들레르가 있는 세계는, 천국이고, 만지는 모든 것은 황금이 되어버리는 세상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황금이 되어버리는 세상이 좋은 시기는 황금이 적을 때, 그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만지는 모든 것이 황금이 되는 세상은 그에게 진정한 천국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보들레르가 자신이 머물고 있는 천국에 묘비를 건설하고, 지옥을 만드는 것은 그의 지옥이 그에게 있어서 바로 천국이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불멸의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삶에 대해 노력할 필요도 없고 그냥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존재는 언젠가 죽게 된다. 그 죽음이 다가오기 전까지 열심히 사는 인간의 모습은 보들레르에게 영감을 준 것이다. 그리하여, 모순적이게도, 추한 인간의 모습에서 보들레르는 아름다움을 찾은 것이다.



이런 아름다움을 본 보들레르에게 세상은 절망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가 쓴 알바트로스를 보면 느낄 수 있다.


알바트로스

               보들레르


뱃사람들은 종종 장난삼아

거대한 알바트로스를 붇잡는다

바다 위를  지나치는 배들을 시름없는

동행자처럼 뒤쫓는 바다의 새를


배의 바닥에 내려놓자 이 창공의 왕자는

어색하고 창피스런 몸짓으로

커다란 흰 날개를 노처럼

슬프고 가련하게 질질 끄는구나


이 날개 달린 항해자의 어색함과 나약함이여

한때 그토록 멋지던 그가 얼마나 슬프고 추악한가

어떤 이는 담뱃대로 부리를 쿡쿡 찌르고

어떤 이는 절뚝절뚝 날던 하늘의 불구자를 흉내 낸다


시인도 폭풍속을 드나들고 사수를 비웃는

이 구름의 왕자처럼

야유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상에 갇히니

그 거인의 날개가 걷기조차 방해되는구나


비록, 이 시에서 하늘의 왕자 알바트로스는 세상에 떨어져 갖은 굴욕과 괴롭힘을 당한다. 도리어, 그의 거대한 날개 때문에, 지상에서 사는 것이, 문제가 될 뿐이다. 그러나, 희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그에게 거대한 날개가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다시 상승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즉 보들레르의 시는 절망으로 시작하지만, 그 절망의 탑을 세워서, 나중에는 그 탑이 밝은 태양에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마지막에 말한 것과 같이, 그는 추한 인간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했고, 절망의 탑을 세워서 태양에 도달하고픈 욕망을 보았다. 그가 자신의 시집을 '악의 꽃'이라 지은 것은 악과 꽃의 이미지가 서로 전혀 다른 것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같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상징주의가 추구하는 것이다.



여담으로, 보들레르가 이렇게 시를 쓸 수 있는 것은 저번에 쓴 토탈 이클립스에서 썼던 '극단'의 의미에서 설명이 될 수 있다고 생각이 든다. 랭보나, 베를렌같은 경우 극단의 삶을 직접 찾아 다니면 경험했다면, 보들레르는 자신의 존재를 극단에 놓았다. 그는 사회에 버림받은 존재였으며,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존재였으며, 이방인이었다.


      이방인

                 보들레르


수수께끼같은 친구여.. 자네가 제일 사랑하는 자는 누구인가?

자네의 아버지인가? 어머니인가? 자매인가? 아님 형제인가?

난 아버지도 어머니도 자매도 형제도 없소

그럼 친구는?

당신은 오늘까지 내가 의미조차 모르는 이야기를 하는구려

그럼 조국은?

난 나의 조국의 위와 아래 그리고 위치 조차도 모르오

그렇다면 아름다움은?

난 기꺼이 불멸의 여신이라면 사랑하겠소

금은?

당신을 신을 미워 하듯이 나도 금을 미워하오

아... 그렇다면 불가사의한 이방인아 자네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구름을 사랑하오. 흘러가는 구름을.....

저기....저기 저 찬란한 구름을...


보들레르는 이 시에서처럼 사회의 끝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자신과 같이 옆, 즉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노래할 줄 알았다. 창녀들, 노파들, 어린이들, 노동자과 같이 그들의 삶을 노래할 줄 알았던 사람들이 바로 시인들이다. 시인이라는 존재는  그들을 보고 느끼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면 모두가 시인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모든 것들이 바로 시가 되기 때문이다.


<악의 꽃> 의 아름다움...


제목이 참 매혹적이다. 악이라는 추함과 꽃의 아름다움이 동일 선상에 놓이니까 말이다. 보들레르는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 빛과 어둠과 같은 대립되는 개념들이 대립을 이루지만 그들이 극단에는 연결되는 점이 있다는 것이다. 마치, 배트맨과 조커가 완전히 대립되지만 잘 보면 그들이 맞닿아있는 모습처럼 말이다. 보들레르는 그동안 서양의 이분법을 무너트리고 그 안에서 새로운 시의 세계를 만들었다는데 그 의의가 있을 것이다. 독특한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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