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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선미 Apr 15. 2024

뒤엉킨 실타래

엄마, 아빠처럼 살지 않을 거야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오해했던 부분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하나둘씩 오해들이 풀렸다. 그렇다고 말끔하게 해결되었다는 건 아니지만 내가 살기 위해 잊어버리고 살아왔다.


유난히도 남녀차별이 심했던 시대에 태어난 건지 아니면 가난한 집이라 더 궁색 맞게 오빠와 나를 차별했는지 모른다. 어려서부터 지지배라는 이유로 할머니한테 박하사탕 하나 얻어먹지 못하고 장손이라는 이유로 넙죽넙죽 사탕을 받아먹는 오빠를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참 먹을 게 없던 가난하고 배고픈 시절이었다.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바쁘다는 핑계로 학교에 잘 다니는지 소풍은 가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엄마의 몫을 할머니가 대신해 주셨기에 엄마의 자리는 언제나 허전했다. 사랑으로 자식을 키운다는 말은 사치였고,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키우는 듯 자식일은 언제나 뒷전이었다. 비 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일이 우선인 부모님이었기에 더 빈자리는 컸고 오해는 쌓였다.


어릴 때 부모님들이 자식들에게 가장 많이 물어본다는 "커서 뭐가 되고 싶냐고?"라는 장래희망을 단 한 번도 묻지 않았고, 아버지가 생각하는 아들과 딸의 모습대로 만들기에 급급했다. 그 당시는 학교도 아버지가 가라는 곳으로 입학했고 졸업했다. 아빠가 원하는 직장에 취직하고 나라는 존재는 없었다. 그저 집안의 살림에 도움을 주다가 좋은 혼사 자리가 나오면 시집을 보내는 게 아버지의 목표였다.






아무리 부모자식 간이라 해도 긴 시간 동안 차곡차곡 쌓인 오해를 풀기엔 쉽지 않아 보였다. 본래 사과라는 뜻도 모르는 아버지의 무식함과 당당함이 하늘을 찔렀기에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아마 딸이었으면 안 낳았을까? 딸에 대한 차별이 심각해서 한편 왜 태어났는가를 사춘기에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불만이 있어도 무서워서 한 마디로 못했던 나는 곁에서 늘 지켜보는 나약한 엄마를 더 미워했다. 매번 미안하다고만 하는 엄마, 힘없는 엄마, 줏대도 없는 엄마가 싫었다. 엄마의 인생도 생각해 보니 참 안타까웠다. 중매로 시집을 온 엄마는 부자라는 이야기만 듣고 시집왔는데 알고 보니 일부자였던 것이다. 아빠한테 큰 소리 한번 못 치는 정말 순진한 엄마였다. 그런 엄마가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했을 텐데 그게 엄마에겐 없었다. 속은 시커멓게 탔을지언정 그 당시 엄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식을 보호해주지 않고 대변해주지 못하는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빨리 어른이 되길 손꼽아 기다렸다.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부모님을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어쩌면 내가 아이를 낳지 않고 부모가 안되었다면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다. 귀하게 아이를 낳아 부모가 되고 나서 수년간 뒤엉킨 실타래를 풀어낼 수 있었다. 아마 부모가 되지 않았다면 평생을 한을 품어 응어리진 채 연락도 끊고 살고 있을 게 뻔하다. 결혼하고 나서 곧바로 임신이 안 돼서 난생처음으로 엄마와 아빠의 관심이라는 것을 받았다. 출가한 언니와 오빠네는 순풍순풍 순산을 하는데 나에게만 없는 자식이 자존심이 센 아빠에겐 흠이 될까 두려웠는지 나보다 더 애를 태웠다. 시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모쪼록 백방으로 애써준 양가 부모님 덕분에 나는 더 포기할 수가 없었다. 더 간절하게 임신하는 일에 몰입할 수 있었다.


7년 만에 아기를 내 품에 안았을 때가 너무 생생하여 15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았다. 내 입에 나오는 음성이 가느다랗게 떨리고 양소리가 났다. '아가! 내가 너의 엄마야!' 낯설고 어색했다. 내가 그토록 애타게 불렀던 '엄마'와 내가 보호해주어야 할 '엄마'가 된 소감이란 말할 수 없는 경이로움이었다.


엄마라고 모든 것을 잘하는 만능이 아니었다. 엄마가 처음이라 모르는 것 투성이어서 모든 게 서툴렀다. 그제야 알았다. 우리 부모님들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서툴러서 그랬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에는 더 정보도 찾기 어렵고 배울 곳도 없던 시대라 더 답답했을지 모르는데 원망만 했었다. 그저 경험해 보는 것이 지식이 되었고 둘째, 셋째부터는 수월해졌을 것이다.


자그마한 핏덩이 아기를 만지지도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다. 꼼지락 거리는 손가락, 오물거리는 입술이 그저 신기하고 신비했다. 조심조심한다는 게 힘 조절이 안 돼서 실수했던 것들, 아~~ 우리 부모님들도 나를 키울 때 그러셨을 텐데...


내 마음을 몰라준다고 울어도 몰라주고 서운하다고 떼를 써도 몰라주었던 마음들이 나는 하나씩 하나씩 담아놓고 있었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일부러 그랬던 게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부모님도 처음 겪어보는 일들이라 몰라서 그랬던 것이었다.



내가 부모가 되고서야 얽혀서 풀리지 않았던 매듭들이 하나씩 오버랩되면서 풀려나가는 거 같았다. 내 어린 시절의 마음과 내가 지금 키우는 아이들의 마음 말이다. 나는 최대한 아이들과 매듭을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내가 그랬다고 아이에게 절대 대물림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부모가 된 후로 그동안 쌓이고 묵혀두었던 감정들이 뽀얗다 못해 새까맣게 되었던 감정의 먼지들이 단숨에 날아가게 되는 거 같았다.  바로 내가 어렸을 때 찍어두었던 부모님에 대한 오해의 점들이 내가 부모가 되어서야 찍은 점과 연결시키니 이해가 되었다.



'아버지가 그때 왜 그랬는지?'


'어머니가 그때 왜 그랬는지?'






부모님에 대한 오해들이 하나둘씩 해답을 찾아 엉킨 실타래가 실 한 오라기씩 풀리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열심히 살으셨는지 궁금했다. 지금은 온몸으로 반평생 농사일  혹사시켜서 얻은 아픈 몸밖에 남지 않았다. 사실 훈장 같은 자랑스러운 부모님이셨다. 비록 내가 중년이 되고서야 알게 되었다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노년을 너무 고생하고 계신다. 다섯 번의 허리 수술, 양쪽 무릎 수술, 목 디스크 등등 젊으실 때 힘이 천하장사였다고 자랑하셨던 아버지, 어머니는 지금은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보내고 계신다.


나는 너무나 왜 그렇게 몸을 아끼지 않으셨는지 화가 났었다. 주위의 같은 연배의 어르신들은 운동도 다니시고 산도 다니시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너무 아팠다. 젊을 때 조금만 돌봤다면 저렇게까지는 안 되셨을 텐데 하고 말이다.






내가 어른이 되고 나서야 알았다. 엄마, 아빠의 나이가 되고 나서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그동안 바빠서 쉴 틈 없이 일하셨던 것을, 왜냐면 농사일은 모두 때가 있다고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본인들의 몸은 때를 놓치게 된 것이다. 우리의 몸은 얼마나 신비로운지 스스로 치유하는 면역력이 꽤나 좋다. 조금만 쉬거나 회복 시간을 준다면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 어머니는 자신들에게는 그럴 시간조차도  없으셨던 것이다.  그 당시 순간순간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셨던 것이다.


물려받은 땅들을 돈으로 만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모두 몸을 써야 했던 농사일이었기에 최선을 다하셨던 것이다. 농사일로 4남매를 키우고 대학까지 가르치기까지 또한 아버지의 6남매 형제들한테까지 농사지어서 드려야 했던 아버지, 어머니의 부담감을 나는 이제야 알았다. 바로 수십 년이 지난 후에 말이다.

남은 것은 병든 몸뿐이다. 어느 곳하나 성한 손마디가 없고, 무릎 연골도 닳고 닳아 무릎이 빠질 지경이 와도 남은 땅이 문제다. 내 눈에 흙이 들어올 때까지 땅을 손에 거머쥔 모습이 애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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