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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선미 May 16. 2024

엄마 되는 게 소원입니다

난임부부로 살아가면

막연하게 결혼하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가 되고 싶었다. 드디어 때가 왔다. 그런데 남편이 나고 자란 곳이 작은 소도시 지방이라 결혼식장은 두 곳이라 한계가 있었다. 그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데 시부모님은 예식비와 식대가 가장 저렴한 농협예식장을 예약하셨다. 최신 유행의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입고 싶었는데 예식장에 비치된 것들은 구식으로 보이고 일단 후져 보였다.    

 


  인생에 있어 단 한 번의 결혼식을 근사하게 하고 싶었지만 처음부터 톱니바퀴가 엇갈리는 느낌이 들었다. 남편과 나는 웨딩업체에 메이크업과 드레스와 턱시도를 예약하고, 신혼여행지도 예약했다. 남편 집에서는 첫 혼사를 치르는 터라 예상치도 못한 하객들이 많이 몰리는 바람에 준비된 음식이 모자라 가까운 친지들은 대부분 굶어야 했다. 반면 막내를 시집보내는 친정집은 청첩장도 안 돌렸고 버스 한 대만 대절해서 오셨다. 결혼식이 끝나자 8남매의 장남이셨던 시아버님 덕분에 폐백 드릴 집안 어르신들이 많았다. 옆에서 잡아주는 분이 있어도 생전 큰절을 그렇게 많이 해본 적이 없어 다리가 끊어지도록 절을 올리고 절값을 두둑이 받을 수 있었다.      



  신혼집으로 분양받은 아파트는 번화가가 아닌 한적한 마을에 위치해 있어 휘황찬란한 도시에 비해 더 깜깜하고 조용했다. 더구나 자가용 없이는 마트나 은행에 가는 교통편도 꽤 불편했다. 도시적인 풍경보다는 정겨운 시골 풍경이 낯설었지만 곧 익숙해졌 유난스런 겁쟁이라 마음대로 외출 못했다. 아는 친구도 한 명도 없었고 가족과도 동떨어져 살다 보니 남아도는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다. 단 한 사람 남편만 바라보고 용감하게 신혼의 단꿈을 꾸었다. 퇴근시간만 손꼽아 기다리고 모든 것을 남편에게 의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처럼.     


  결혼식 후 1년간은 아주버님을 앞서 결혼했기 때문에 아기는 아주버님이 결혼 후 갖기로 계획하고 피임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어머님이 왜 아기를 안 갖느냐고 성화를 부리셔서 남편과 서둘러 가족계획을 변경했다. 그 후로 어머님은 나를 가만두지 못하시고 본가로 점심 먹자고 불러냈다. 밥 먹자는 것은 핑계 같았고 용하다는 점집이나 이름난 한약방, 어머니가 다니는 절의 스님을 뵈러 가자고 앞장섰다. 그곳에 가면 곧 방도가 있는 것처럼 믿었다. 문제는 시아버지와 남편이 있을 때는 나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존중해 주셨는데 둘이 만나면 전과 달리 360도가 달라지셨고 막무가내였다. 새댁이었던 나는 어머님의 말이라면 어떤 핑계도 대지 못하고 순진하게 불려 가서 모진 고초를 당하고 퇴근하고 오는 남편에게 고해바치고 남편은 죄인이 되어 대신 사과했다. 다시는 혼자서는 엄마를 만나지 말라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시댁은 1년에 제사가 14번이 있었다. 당시 직장인이었던 나는 회사를 조퇴하고 어머니와 장보고 제사음식을 준비해야 했다.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가고 매달 찾아오는 생리는 한 치 오차도 없이 규칙적이라 느닷없이 화가 치밀어 올라왔다. 병원에서 산전검사도 했지만 아무 이상 없이 건강하다는데 왜 우리 부부만 임신이 안 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어머님은 내 속도 모르고 매일 아침 태몽을 꾼다며 재촉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선을 넘어선 어머님은 부부의 잠자리 자세까지 묻기 시작하면서 거북스럽고 낯부끄러워 대면조차 피하고 싶었다.     


  나름대로 한약도 먹고, 건강보조식품도 챙겨 먹으며 병원에서 배란일을 받으며 시도하고 있었다. 너무 간절하셨는지 점집에도 나를 데리고 가면서 비싼 굿도 마다하지 않고 유명한 절에 방생기도도 다녔다. 돌이켜보니 내가 이 집에 시집와서 해야 할 일을 못하는 죄인이었다. 여자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감당하기에 너무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게다가 남편은 회사일로 바쁜데 병원 다니느라 인공수정 날을 여러 번 실패하면서 남편도 참다 참다가 폭발했다. 우리 엄마 때문에 우리나라에 살기 싫다면서 왜 애를 못 낳는 게 내 집사람 때문이냐며 호주로 이민 가겠다고 선언했다. 앞으로는 엄마 얼굴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며 집에도 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 후로 몇 달간 잠잠했지만 곧 손주타령을 다시 꺼내시면서 당신 죽기 전에 소원이 있다면서 시험관 아기 시술이라도 해보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그사이 이민도 알아보고, 입양도 알아보면서 남편과 나는 결혼생활에 지쳤다. 애틋하게 행복하게 살겠다는 다짐은 온 데 간데 사라졌고, 아기를 낳아야 살아남는 육식동물이 되어 있었다.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쳐서 어디든지 멀리 떠나고 싶었다. 친정 부모님은 죄인이 되어 안절부절 눈치만 살폈고 나란 존재는 누구에게든지 불편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착한 며느리 콤플렉스였던 나는 마지막으로 어머님이 알려준 서울 난임 병원에 다녀오고 나서 포기하겠다고 했다. 남편도 없이 나 홀로 3시간 넘게 걸리는 병원을 다니는 게 마치 여행 같았다. 차창 밖을 내다보면서 자연을 만끽하고 사람구경하면서 황량한 마음이 서서히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포기하지 못하는 이 욕심으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다녀서 그런지 순차적으로 시험관 아기 시술이 진행됐다. 과 배란 주사를 매일 내 배에 찔러도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난자는 건강하게 자라서 채취도 많이 할 수 있었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시작하니 정신적, 육체적으로 황폐해졌어도 충천되었는지 수정란도 성과가 있었다. 냉동란도 여유 있다니 어딘지 모르게 든든했다.       




  난자채취 후 신선배아를 이식하고 욕심에 병원에 피검사 전까지 12일간 입원을 했다. 이식 후 증상이 꼭 임신이 될 거 같은 증상이 있었지만 결과는 0%로 비 임신이었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이 커서 모든 걸 던져버리고 싶었다. 마음은 갈대처럼 휘청거렸다. 남편과 집으로 내려오면서 이제 앞으로 우리 둘만 살자고 부탁하는 바람에 그러자고 울면서 끌어안았다.      


  몇 개월이 지나 마음껏 먹고 최대한 게으르게 생활하면서 일상으로 돌아갔다.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하고 참았던 음식들을 매일 먹었다. 문화원에 그림을 배우러 다니면서 시간을 보내니 견딜만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냉동 수정란을 몇 개 남았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언급했다. 냉동배아 이식을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다 남편과 상의했다. 많이 남은 냉동배아를 딱 한 번만 이식하고 내려오겠다고 약속했다. 자연배란주기요법으로 병원을 찾아서 꿈처럼 나 홀로 여행을 하듯 서울 난임 병원에서 이식하고 그날 내려왔다. 그리고 바쁘게 생활하면서 잊고 있었다. 역시 내려놓고 잊으면 된다고 했었는데 내게도 때가 왔다. 수정란이 착상되어 임신이 되었다는 피검수치결과를 전화로 알려줬다. 앞으로 세 번의 피검사가 남았지만 계속 높은 수치가 나와야 정상이라고 했다. 그때까지 임신테스트기를 안 해본 내가 대견했다. 이식 후 가만히 누워있지 않아서 증상도 못 느꼈다. 그렇게 아기는 내게 느닷없이 찾아왔다. 아기는 엄마가 바쁜 것을 좋아하나 보다.



  이 기쁜 소식을 3차 피검사를 할 때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기다리던 가족들이 실망할까 봐도 있지만 간절하게 얻은 이 아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때부터 몸가짐을 조심하고 태교에 전념했다. 포기하지 않고 아이를 기다린 덕분에 아이를 만났다. 아이를 가지고 열 달 동안 지키는 것도 어려운 우리 부부였지만 살아가면서 큰 기쁨을 주는 아이 덕분에 수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우고 뉘우치면서 살고 있다. 내 아이가 내 마음을 투명하게 비추는 거울과 같다. 스펀지 같은 아이는 우리의 말, 행동, 생각까지 흡수하면서 올바른 어른이 되게 인도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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