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ad

by 민수연
102동 현관, 34x20.5cm, mixed media on mirror, 2024



혼자 버스를 타던 날


'새마을금고 앞 행단보도에서 내려주세요.'


엄마가 입원하고 나서 엄마를 보러 가지 못했다. 병실 전화로만 통화하다가 어느 날 엄마가 버스를 타고 혼자 와 보겠냐며 버스 타는 법을 알려주었다.

"100원 내고, 새마을금고 앞에 횡단보도에서 내려주세요. 하면 돼. 알겠지? "

수화기 너머로 엄마가 불러주는 내용을 받아 적었다.


100원은 준비했는데 버스 아저씨에게 말할 자신감은 준비되지 않았다.

집에서 깨끗한 종이 귀퉁이를 네모 반듯하게 오려 연필로 정성스럽게 적었다.

'새마을금고 앞 행단보도에서 내려주세요.'

버스를 타서 100원을 내고 기사님께 적힌 종이를 보여주었다. 기사님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인파 속에서 기사 아저씨 옆에 길게 박힌 봉을 엄마 손처럼 꼭 붙잡고 도착지만 기다렸다.

키 큰 어른들에 파묻힌 나를 불러 여기서 내리면 된다고 일러주었다. 아무도 못 들었을 개미만 한 목소리로 "감사합니다." 인사하며 그들의 허리춤에나 있었을 어른들의 시선을 빠져나왔다.


한 번 성공한 뒤로는 자신감이 붙었다. 엄마가 보고 싶을 때면 100원과 함께 메모를 썼다.

몇 번 해보니 글자를 더 크게 쓰면 더 잘 보이겠지 싶었고, 빳빳한 종이에 접지 않고 드리면 이게 뭐냐고 묻지 않으시겠지 싶었다. 나날이 방법이 발전했다. 쪽지를 건네받곤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기사님도 계셨고, 읽었는지 알 수 없다가 큰 소리로 "지금 내려라!"하시는 기사님도 계셨다. 덕분에 사람이 많은 날에도 적은 날에도 무사히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병원 입구에 작은 매점이 하나 있었다. 돌아다니며 구경할만한 크기는 아니고, 사람이 하나 들어앉아 창문으로 계산만 하는 형식의 한 평 가판대였다. 신문도 팔고 껌도 팔고 소량의 과자도 팔았다. 내 낙은 거기서 껌 하나와 사탕 하나를 사서 엄마의 병실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일단은 돈이 없기 때문에 엄마의 병실로 가서 반가움을 표하고, 500원을 받아내 다시 1층 로비로 내려와 매일 같은 종류의 껌과 사탕을 샀다. 300원짜리 해태은단 껌과 200원짜리 네거리 사탕을 사면 딱 맞았다. 껌은 오래 씹어야 하니까 사탕부터 먹었다. 버스를 탈 때까지는 긴장했던 시간들이 매점에서 사탕을 까서 입에 넣는 순간부터 달라졌다. 5층 병실까지 올라가는 길은 재미있기만 했다. 병실에선 오롯이 엄마와 나만의 시간이었다. 간호사와 간병인이 중간중간 왔다 가고, 엄마는 누워 있어야만 했지만 그래도 둘만 있는 공간이었다. 나는 사탕을 입에 문 채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며, 집에 있었던 일이며, 할머니, 할아버지, 작은 엄마 등 집에 머무는 사람들 욕을 빙자한 흉내를 내며 끊임없이 엄마에게 이야기했다. 엄마는 내 이야기를 모두 들어주었다. 내친김에 학교에서 배워 온 것들도 보여주었다. 교실에서는 눈동냥만 하며 하는 시늉만 냈던 걸, 엄마 앞에서는 마치 담임 선생님처럼 노래도 크게 부르면서 율동을 했다. 엄마는 두 다리를 천장에 매단 채 옆으로 돌아보고 깔깔대며 웃었다. 나의 재롱이 끝나자, 엄마는 환호를 하며 박수를 쳤다.

"너무너무 잘한다! 할머니, 할아버지한테도 보여 드리지!"

"싫어."

잠시나마 무대였던 빈 공간에서 걸어 돌아와 엄마 침대 옆에 홀랑 돌아누우며 말했다.

"왜, 이런 거 보여드리면 할머니, 할아버지도 엄청 좋아하실 텐데."

엄마는 내가 집에서는 말도 잘 안 하고 눈치만 보는 걸 알았을 거다.

그러나 엄마는 모른다.

'엄마니까 보여주는 거야. 엄마한테 이 많은 말을 하려고 먼 길을 온 거야.'

엄마 옆에 누워 껌 종이를 까면서 생각했다.


껌을 사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껌을 싸고 있는 은박지를 가지고 놀기 위함이었다. 은단 껌이었던 이유는 다른 껌보다는 덜 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은색 도트의 포장지가 예뻤다. 병실에 있는 동안 계속 엄마와 놀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엄마가 많이 아픈 날은 오후 내내 잠들기도 했고, 병문안 오는 사람이 있기도 했다. 진료 시간이 길어질 때도 있었다. 엄마와 오래 있고 싶었지만 지루함을 달래려면 놀거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중으로 되어 있는 은박 껌종이를 벗기는 게 1번 놀이였다. 최대한 찢어지지 않게 넓게 벗겨낸 은박지를 엄마 공책에 붙이는 것이 2번 놀이였다. 껌 종이를 구기면 흰 종이와 은박지 사이에 살짝 틈이 벌어진다. 그 틈을 잡고 조심스럽게 떼어낸다. 어렵게 떼어낸 은박을 동그란 볼펜 뒤꽁지로 공책에 빤빤하게 눌러 붙이면 스테인리스처럼 반짝반짝해졌다. 엄마 침대 한편을 차지하고 엎드려 그러고 시간을 보냈다. 나는 아이였기 때문에 오래 병원에 있을 수 없었다. 해가 지기 전에 집에 돌아가야 했다. 길지 않은 시간은 언제나 아쉬웠다.


100원이 보이면 엄마에게 갔다. 50원이 두 개 보일 때도 엄마에게 갔다.

매일 가고 싶었지만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엄마 병원에 가는 걸 내키지 않아 했다. 그래서 자주 가지 못했다.


번외로 행단보도가 횡단보도였다는 사실은 꽤 오래 지나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그려준 악보


하루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엄마를 보러 갔다.

그동안 자리가 없어 어쩔 수 없이 1인실에 입원해 있었는데, 엄마의 차도가 좋아지면서 6인실로 옮기는 과정에서 가족들이 방문했다. 어른들이 얘기하는 동안 나는 복도에서 기다렸다. 조금 지나자, 얼마 있지도 못했는데 집에 가야 한다고 했다. 안 가겠다고 떼를 썼다. 엄마랑 헤어지기 싫었으므로 지랄발광을 하며 버텼다. 그러면 왠지 누군가는 더 있으라고 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래주는 이 없었고 엄마도 일단 집으로 가라고 칭얼대는 나를 만류했다. 그날따라 얼마나 가기 싫었는지 입원실부터 내내 악을 쓰며 울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목을 놓아 울었다. 집에 거의 다 와 갈 때쯤엔 흐느꼈다. 서러움이었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짚으로 엮인 발매트로 맞았다. 할아버지였다. 폭포같이 매가 쏟아졌다. 할아버지는 욕을 퍼부으며 날 팼다. 훈육이 아니었다. 이 성가신 울음을 그치게 하려는 분풀이였다. 엉금엉금 기면서 말했다.

"잘못했어요, 다시는 엄마한테 안 갈게요. 간다고 안 할게요."

주문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부어서 감각 없는 두 손으로 싹싹 빌었다.

그 후로도 한참을 매질당한 후에야, 아마도 할아버지의 분이 풀린 뒤에야 날 때리던 매가 그쳤다.

캄캄한 안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엄마가 자던 침대에 누워 엄마를 생각했다.

호흡이 쉽게 진정되지 않아 잠들려고 노력해도 이불이 규칙적으로 들썩였다.

얼마가 지났을까. 할아버지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악보였다.


직접 그린 악보에는 오선과 음표, ‘나비야’ 가사가 적혀 있었다. 곁눈질로 잠깐 봤는데도 방금이라도 음악 교과서를 찢어 내민 것 같았다. 악보가 아름다웠다. 무서웠지만 받지 않았다. 대꾸가 없자 할아버지는 악보를 가져가더니 피아노를 열고 연주를 했다. 이 정도의 노력이면 더 큰 화를 불러오기 전에 응해줘야 하나 망설였다. 호흡이 가다듬어지지 않은 채로 누워 연주하는 할아버지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길지 않은 한 손 연주가 끝났다. 할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떠났다. 나는 미동 없이 검은 방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내 문은 닫히고 방은 더 캄캄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악보는 내게 오래도록 영감이 될 만큼 아름다웠다.

나중에의 일이지만 나는 그 악보를 꽤 소중하게 여겼다. 할아버지의 정성이나 마음 따위가 담겨서가 아니라 내 눈에 그저 아름답게 보였기 때문이다. 종이 한 장에 적힌 글씨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나 생각했다. 아름다운 그림을 보듯 때때로 그 종이를 꺼내 보았다. 음표 하나, 글자 하나, 일정한 필압. 확실한 할아버지의 재능이었다. 국민학교 교사였던 할아버지는 노래도 잘하고 손재주도 좋아 이것저것 만드는 일을 잘했다.

그 악보는 사진처럼 내게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내게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때려서 미안하다고, 내게 사과를 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땅히 어른이라면 그래야 한다.

손수 그린 악보를 내밀게 아니라.



댕기 머리


엄마의 부재가 가장 잘 드러나는 건 행색이었다.

할머니는 손이 야무지지 못해 머리를 반듯하게 묶지 못했다. 엄청난 머리숱과 잔머리가 지배적이었던 나는 할머니가 묶어준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물을 묻혀 아무리 정리해도 머리칼이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다시 묶기 일쑤였다. 할머니도 눈치를 챘는지 앞으론 직접 묶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했다.


그즈음 친한 친구와 그 언니가 디스코 머리를 자주 하고 다녔다. 나도 그 머리가 너무 하고 싶었다.

스스로 할 수는 없어서 어느 날 할머니에게 말했다. 위에서부터 땋는 머리인데 이렇게, 이렇게 하면 된다고. 할머니는 알아들은 듯 알았다고 했다.

그러더니 내 머리에 머리에 물을 묻혔다. 여기부터 이상했지만 가만히 지켜봤다. 꼬리빗으로 곱게 빗더니 밑에 부분을 댕기 머리처럼 땋았다. 마치 오성과 한음처럼.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무서웠기 때문에 반항할 수는 없었다. 현관문을 나와 그대로 머리를 풀어 다시 하나로 질끈 묶었다.

차마 그 머리로는 학교에 갈 수 없었으므로.


할머니가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머리 이야기를 했던 모양이다. 앞서 말한 친구의 엄마는 아니었지만 같은 동에 사는 딸 둘을 둔 엄마였다.

어느 날 그 아주머니가 나를 집으로 불렀다. 그 집에는 언니도 친구도 아저씨도 없었다. 아줌마의 배려였으리라. 긴 거울 앞에 나를 앉혀 두고 머리를 빗겨 주었다. 색색의 알갱이가 사탕처럼 떠다니는 젤을 짜서 내 머리에 발랐다. 그리고는 여러 갈래로 머리를 땋아 내려갔다. 낯선 곳에서 낯선 손길이 익숙해질 즈음 눈이 감길 것 같았지만 참았다. 다 됐다는 목소리에 거울을 보니, 오며 가며 봤던 이웃집 딸들의 머리와 비슷한 내가 있었다.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머리였다. 조금 쑥스러웠다. 그 머리를 하고 나는 하루를 어떻게 보냈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 머리에 발리던 젤 향 만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오전반 오후반


내가 1학년에 입학할 때 한 반의 정원은 60명이었다.

아파트는 많이 생겼는데 학교는 많지 않아 멀리까지 학교를 다녔다. 지하철 두 정거장 정도의 거리쯤 되려나. 모두 걸어 다녔기 때문에 특별히 멀게 느끼진 않았다. 교실 복도에 팻말이 두 개 붙어 있었다.

1-7 밑에 1-8. 나는 8반이었다.


문제는 학교를 언제 가는지를 모르는 거다.

엄마도, 아빠도, 오빠도 없었으므로 가이드가 없었다.

8반이니까 오후에 가면 되겠지 싶어, 느지막이 학교를 가겠다고 나왔다.

한참을 걸어 교실 앞에 도착했는데, 7반이 수업 중이었다. 그 앞을 서성이다 그냥 되돌아 집으로 왔다.


걸어오는 길은 더 멀다. 집과 학교의 중간쯤 큰 마트 하나가 있었다. 바로 옆에 작은 공터가 붙어 있었다.

다리도 아프고 책가방도 무거워 거기 앉아 쉬었다.

지대가 다른 곳보다 살짝 높아 저층 빌라들의 꼭대기가 보였다.

학교만 왔다가 가는데도 벌써 해는 파랗게 저물고 엉덩이는 차갑다.



회상


작가의 이전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