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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비 Jun 16. 2022

겪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

다른 이의 육아관을 손가락질하기 전, 한 번 더 생각해보기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틈에서 아기새를 찾아본다. 안경 없이는  미터 떨어진 사람도 제대로  알아보는 내가 오십 미터는 떨어져 있는 아들의 신난 몸짓과 즐거운 표정은 보인다. 수많은 아이들  아기새쉽게 찾을  있다. 신기하게도 아기새만큼은 그리 좋지 않은 시력에도 한눈에 들어온다.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은 모두 목에, 또는 손에 휴대폰을 들고 있다.

아기새는 휴대폰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아침 등굣길도 엄마와, 하굣길마저 엄마와 함께하는 아기새는 그 흔한 학원이나 학습지도 하지 않는 백수 어린이(?)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방과 후 수업 첫날 명단 누락으로 어쩔 줄 몰라 혼자 교문밖에 나와있던 아기새는 엉엉 울다 다른 엄마에게 발견되었다. 고마운 어느 엄마의 전화를 받고 허겁지겁 달려왔다. 고작 10분 혼자 있었다고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아기새를 보니 한숨이 났다. 언제 클까 하고. 그리고 그 주 주말, 아빠가 이전에 쓰던 휴대폰을 개통해서 손에 들려줬다. 아기새의 등하굣길은 여전히 엄마인 나와 함께지만 켜지도 않는 휴대폰을 책가방에 넣어두었다는 것만으로도 거짓말처럼 안심이 되었다. 내 아이를 지켜줄 부적 같은 느낌. 아기새도 "OO 할 때 엄마 없으면 엄마한테 전화하면 돼."라고 계속 언급하는 걸 보면 그런 것 같았다.

그 이후 놀이터에서 휴대폰을 들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생각한다. 부모님이 아이에게 휴대폰을 들려줬을 때의 마음을. 나도 비슷한 일을 겪고서야 아이의 안전과 더불어 불안을 해소하려는 고민에서 나온 방책임을 실감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게임하고 영상 보고 자기들끼리 톡 보내느라 바쁜 어린이들을 보니 귀엽기도 하다.



비슷한 예로, 책가방을 들어주는 엄마의 미안함과 안쓰러움을 생각하면 가슴이 찌르르하다.

우리 때와는 달리 바쁘고 치이느라 놀이터에서 놀 새도 없는 바쁜 어린이들. 삼삼오오 무리 지어 돌아가는 하굣길에, “야, 너 오늘 놀 수 있어?” 하고 묻는 아이와 “아니. 나 OO학원 가야 해.” 하고 대답하는 아이의 대화는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들어보고 있자면 일주일 내내 뭐가 그리 바쁜지. 태권도에 피아노에 수학, 미술, 영어, 줄넘기, 팩토, 코딩, 독서 등등 종류가 많기도 하다. 그 작은 어깨에 짊어진 삶의 무게를 감당하는 것이 안쓰러워 물리적인 가방의 무게라도 나누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이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백수 어린이인 아기새의 가방의 무게는 오롯이 아기새의 몫이다. 가끔 아빠와 함께 데리러 가는 날은 무척 기뻐한다. 아빠는 기꺼이 아기새의 가방을 들어주는 어른이니까. 나는 참으로 매정한 엄마가 아닐 수 없다.



백 명의 사람에겐 백 가지의 사정이 있음을 이제는 알아서, 어떤 장면이 보이더라도 그것이 범죄가 아니라면 그다지 동요하지 않게 된다. 아기새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 어린 어른이 시절을 생각해본다. 그때는 의아했던 것들을 지금은 이해한다. 막 걸음마를 뗀 아가의 뾱뾱이 신발은 심장박동 측정기와 같고 기다란 끈 달린 꿀벌 가방은 활달한 아이를 위험으로부터 제한하기 위한 최소한의 바운더리임을, 아이를 낳고 키우고서야 알았다. 왜 아이를 낳고 진짜 어른이 된다고 하는지 실감한다. 여전히 자랄 수 있고 여전히 성숙할 수 있는 건 아이 덕이다. 잠든 아이의 볼에 뽀뽀를 하며 감사한다.

오늘도 엄마를 한 뼘 자라게 해 줘서 고마워, 사랑하는 나의 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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