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니 슬슬 일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날이 따뜻해지면서 각종 행사들이 줄을 잇고 있는 탓이다. 당장 다음 달에도 연간 가장 큰 행사라고 할 수 있는 대형 전시회가 예정돼 있다.
오늘은 그 행사 건으로 회의가 열렸다. 각 제품별 사업실의 담당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규모가 규모인 만큼 대리, 과장급의 낮은 연차가 아닌 각 팀의 팀장, 부장, 차장급들이 대거 참석했다.
오늘 회의의 주요 안건은 단연 ‘발표’였다. IT 행사다 보니 업계 트렌드 및 동향부터 시작해 제품이나 서비스에 적용된 최신 기술들에 대해 설명하는 기술 세미나들이 유독 많았다. 우리 회사 역시 며칠 동안 이어지는 전시 행사 동안 하루에 3~4개의 발표 세션을 완성해야 했다.
이틀 간의 행사이니 최대 8번의 발표 세션이 마련된 셈이다. 문제는 ‘누가 발표를 하냐는 것’. 가뜩이나 연초인만큼 신규 사업과 영업 미션들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영업팀이었다. 그런 와중에 발표까지 해야 한다니. 발표를 하면 꼼짝없이 발표 자료까지 만들어야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만큼 하기 싫은 건 당연지사였다.
예상했듯 발표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이쪽저쪽에서 낮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하, 우리는 이번 연도에 딱히 보여줄 만한 고객사례가 없는데…'로 시작하는 소스부족 이유부터 시작해 지난해에 한 발표 내용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우리는 앵무새가 되기 싫어요 이유까지. 왜 자신의 사업팀에서 발표를 할 수 없는지에 대한 갖가지 이유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누구 하나 나서지 않는 상황에서 발표 일자는 다가오는 상황. 보다 못한 각 사업실의 팀장들이 총대를 메고 즉석에서 담당자들을 지정하기 시작했다. 자율로 맡겼다간 지원자가 0에 수렴할 판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갑자기 불려 와 난데없이 발표를 하게 된 담당자들. 이들의 반응은 신기하게도 극명한 두 갈래로 나뉘었다. 무덤덤과 흥분. 누군가는 허무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마치 다음 달에 식사 자리가 하나 있는데 너도 갈래?라고 누가 묻기라도 한 것처럼. 쏘쿨한 모습이었다.
반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온몸으로 싫은 내색을 하는 이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자신이 왜 발표를 할 수 없는지 이유에 대해 열변을 토해 보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미션을 받아 든 이들의 표정이 너무나도 어두워 보는 나마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 광경을 보고 느낀 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확실히 자신이 잘하는 분야에서는
사람이 한결같이 당당하고 느긋한 태도를 보일 수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다.
가만히 보면 갑작스러운 발표 지시에도 느긋한 표정을 지었던 이들은 평소 발표를 자주 했던 사람들이었다. 사내 직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소규모의 교육이던 큰 규모의 세미나건 과거 이들이 진행했던 발표에 참석한 경험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즉 발표가 평소 업무 루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일이기에 큰 반발감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유독 싫은 티를 냈던 이들은 어땠을까. 이들 역시 공통점이 있었다. 지금껏 한 번도 발표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마케팅 부서에 속해 있다 보니 회사에서 진행하는 크고 작은 행사에 대해 알고 있거나 참여하는 편인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이들이 누군가의 앞에 서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본 기억은 없었다. 즉 발표가 익숙하지 않았기에 발표 자체가 굉장히 큰 부담으로 다가왔고 적극적인 태도가 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어차피 해야 할, 언젠가 해야 할 일이라면 평소에 익숙하게 만들어 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 순간이다.
일을 하게 될수록 느끼지만 직급이 올라갈수록 피할 수 없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연차가 늘수록 책임도 커지고 큰 프로젝트를 맡게 된다. 연차가 적을 땐 나보다 능숙한 상급자에 기댈 수 있지만 연차가 쌓이면 그 방패막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그야말로 거부할 수 없는 미션이 덜컥 맡겨져도 피할 곳이 전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충분히 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얼마나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게 될까.
어떤 일이 갑작스레 내 발등에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능숙하고 침착하게 받아내기 위해. 내 마음의 안정과 평온을 위해서라도 피할 수 없으면 익숙하게라도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걸 생각하게 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