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인가. 예능 프로 전참시에 수학 일타강사 정승제님이 출연한 편을 본 적이 있다. '수학의 신'이라고 불리는 그는 과연 어떤 일상을 보낼까?
과연 수학을 향한 그의 뜨거운 열정은 생활 곳곳에서 보여졌다. 눈을 뜨자마자 수학 문제를 풀기 시작해 늦은 밤까지 시간이 날 때면 어김없이 아이패드를 붙잡고 초집중 상태로 수학 문제를 푸는 사람. 그야말로 수빠자(수학에 빠진 자)라는 별명이 딱 어울리는 일상이었다. 개인 엘리베이터가 딸린 럭셔리한 집, 홍어마니아들도 어렵다는 홍어전을 아무렇지 않게 즐겨 먹는 모습 등 다양한 모습이 그려졌다. 수학, 재력, 음식 취향까지 모든 것이 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그의 일상.
그런데 딱 한 가지, 매우 공감되는 점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그가 가지고 있다는 '단종포비아' 였다. 그는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혹여 사라질까 미리 쟁여놓는 일종의 강박 같은 것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같은 티셔츠만 300장일 정도라고. 티셔츠뿐만이 아니었다. 방석, 스피커, 연필꽂이, 리모컨, 안경, 침대, 맥주쿨러까지 그의 집과 사무실에는 여러 품목에 걸쳐 동일한 제품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심지어 집과 사무실 역시 같은 인테리어 업체에 맡겨 동일하게 했을 정도로 그는 익숙한 것, 좋아하는 것에 대한 집착이 있는 것 같았다.
그처럼 모든 물건에 그런 건 아니지만 나 역시 한 카테고리에 있어서 만큼은 단종 포비아가 있었다. 나의 경우는 화장품이었다. 피부가 예민한 탓에 바를 수 있는 화장품이 한정되어 생겨난 경향이다.
트러블이 안 나고 맞기만 해도 성공한 케이스일 정도로 잘 맞는 화장품을 찾기란 쉽지 않은 편이다. 그 탓에 나는 마음에 드는 화장품이 있으면 혹여 단종될까 하는 불안함을 늘 마음 한구석에 가지고 있다. 화장품은 유통기한이 있으니 많이 쟁여놓을 수도 없는 노릇. 그래서 화장품을 살 때면 무조건 유명한 제품, 베스트셀러만 사곤 한다. ‘판매량이 많아 단종이 안 될만한 제품' 이것이 내가 화장품을 살 때 고려하는 제 1순위 조건이다. 하지만 아무리 인기 있는 제품이라도 영원할 수는 없는 법. 잘 쓰고 있는 화장품이 갑자기 단종된다는 소식을 접할 때면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갑작스러운 소식은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독서 모임을 마치고 시간이 난 김에 화장품을 사러 갔다. 오늘 아침 화장 할 때 보니 기존 제품의 양이 얼마 남지 않아 떨어지기 전에 구매해 두려고 백화점에 들른 것이다. 화장품을 결제할 때였다. 직원분이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손님, 이 제품이 이제 곧 단종될 예정이에요."
"네?!?! 이거 판매량 많지 않나요ㅠㅠ 왜요...ㅠㅠㅠ?"
"그렇죠. 이 제품이 한국에서는 인기가 많은데 해외에서는 그렇지 않은가 봐요. 이번 재고만 소진되면 다시 들어오지 않을 거예요."
대수롭지 않게 소식을 전했는데 급 침울해진 나의 표정을 눈치채신 걸까. 직원분은 이와 비슷한 제품이 있다며 한 번 써보라고 샘플을 두둑이 챙겨주셨다. 화장품 유목민 생활을 드디어 청산하나 싶었는데 이렇게 또 시작인건가. 사는 김에 몇 개 더 구매해 쟁여놓을까 하다가 이내 마음을 접었다. 어차피 떠나보내야 할 운명(?)이라면 너무 집착하지는 말자 싶어서였다. 문득 오늘 모임 시간에 읽었던 기사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방사능 오염수 130t이 바다에 방류되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자신감은 인간이 자연을 완벽하게 통제한다고 착각할 수 있었던 시대의 철 지난 잔여물이다."
"자연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고 믿으며 무한하게 규모를 키우는 확장성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마주침이 우리 모두를 변모시킬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불안정성."
물론 이 상황에 딱 들어맞는 건 아니지만 인간이 자연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는 없다는 그런 뉘앙스였다. 그러니 나 역시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을 맞닥뜨려도 너무 스트레스받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래 이게 자연스러운거다. 그리고 또 누가 알아. 더 잘 맞는 제품을 만날 수 있을지 말야.' 아무리 유명한 제품이라도 언제든 단종될 수 있는 법. 이를 받아들이고 마음을 편하게 갖자. 내 뜻대로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것, 그런 건 이 세상에 별로 없으니까.
* 사진 출처 : Photo by Wesley Tingey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