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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로망 Oct 20. 2021

기록의 모래성을 쌓다

 나는 생각이 너무 많다. 말도 많고, 쓸데없는 상상도 자주 한다. 하나의 문장(단어로도 충분하다)에서 시작된 생각은 끝을 모르고 뻗어나가 어느새 나는 세상에 좀비를 풀거나 유명한 가수가 되어 전 세계를 누빈다. 때문에 연인이나 친구들과 시시콜콜한 잡담으로 시간을 보내는 일은 내게 필수적인 스케줄이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의 생활이 있고, 함께 수다 떠는 시간도 한정돼있다. 그러니 내 뇌가 과부하에 걸리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글을 써줘야 한다. 재작년의 나는 일기를 택했다. 그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네모난 종이에 내 하루의 A부터 Z까지 모조리 털어놓았다. 사건마다 연결되는 이야기도 곁들였다. A-1, A-2, A-3... 챕터를 나누는 것까지 가능했다. 어찌나 많은 이야기를 쏟아부었던지, 한 달에 거의 한 권씩 갈아치웠다. 방청소를 하거나 시간이 날 때면 전에 썼던 일기를 다시 펼쳐보며 과거의 나를 들여다보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기록에 재미를 붙이면서 내 책상 한 켠은 온갖 종류의 공책으로 가득했다. '데일리 일기', '5년 일기', '운동 기록장', '일주일 챌린지 기록장', '30 day 챌린지 기록장', '독서록', '버킷리스트 수첩'... 예전에는 내가 이미 흘려버린 시간은 모래사장에서 쥔 한 줌의 모래처럼 흩어져버렸지만, 이제는 기록이라는 물로 단단하게 다져져 모래성을 쌓았다. 모래성을 들여다볼 때면 온갖 근심 걱정이 사라졌다. '난 한 게 없어'가 '이런 걸 했었네. 열심히 살았다'로 바뀌었다. 기록의 종류가 늘어날수록 내 삶의 가치가 올라간 기분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기록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하나둘씩 줄어 지금은 일주일에 한두 번 쓰는 데일리 일기와 몇 일치를 몰아 쓰는 5년 일기만 남았다(5년 일기는 한 쪽당 같은 날짜 5년 치를 모아볼 수 있는 일기장이다). 그와 동시에 책도 읽지 않았다. 나의 기록을 멈추면서 남의 기록도 멀리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생각의 배출구가 막히자 지독한 고찰이 시작되었다. 근 세 달간 나는 '이건 아닌데'라는 말을 수없이 반복했다. 내 삶이 지금처럼 흘러가게 놔둬서는 안 되겠다는 느낌, 하지만 이걸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기분. 이 세 가지에 젖어 뚜렷한 목표나 해결책 없이 시간을 보냈다. 당연히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고, 목표도 찾을 수 없었다. 남은 건 우울한 감정뿐이었다.

 10월이 되고, 만기 된 적금으로 휴대폰을 바꾸면서 그동안 너무 사고 싶었던 태블릿을 장만했다. 태블릿으로 그림도 그리고, 영상도 크게 보고, 모바일 게임도 고해상도로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부풀었다. 그런데 태블릿을 사고 내가 가장 먼저 설치한 어플은 다름 아닌 전자책 플랫폼, '밀리의 서재'였다. 습관적으로 다시 '기록'을 찾은 것이다. 곧이어 일주일 간 9권의 책을 읽어치웠다. 기억하고 싶은 책의 구절을 게시하는 인스타그램 계정도 만들었다. 그 모든 순간이 너무나 즐거웠다. 그러다 회사에서 자료 하나를 분석하라는 지시를 받아 두 시간 동안 꼼짝 않고 글을 쓰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글로 먹고살고 싶다.'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았다. 생각해보면 나는 남의 글도 좋아하고, 나의 글도 좋아하고, 어떤 글이든 읽거나 쓸 때면 가슴이 뛰고 집중력이 발휘된다. 왜 여태까지 몰랐을까? 사실 글쓰기는 생활에 너무 필수적인 요소이므로 당연히 해야 하는 행위라고만 생각했지, '좋아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를 못 해본 것 같다. 다이아몬드를 찾아 헤매다 발밑에서 발굴해 낸 기분이다. 좋아하는 일로 먹고살고 싶다는 열망을 품으면서도 막상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해 괴로워하던 날들은 끝났다. 이제 좋아하는 일로 먹고살 길을 개척할 때다. 아직 너무 포괄적이므로 당장은 아무 결정도 내릴 수 없지만, 작게나마 글에 관한 나만의 목표를 세웠다. 그동안 두려워 미뤄왔던 일들이나 여태까지 해왔던 좋은 습관들이다.

 첫째, 1일 2시간 이상 글쓰기.

 둘째, 공개된 곳에 기록하기.

 셋째, 1일 1권 이상 독서.

 넷째, 1일 1권 구절 정리.

 핵심은 오늘부터 새로 시도하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목표다. 글 쓰는 시간이 1일 2시간인 이유는, 한 책의 '하루 두 시간씩 10년이면 만 시간을 채운다'는 구절이 내 가슴을 울렸기 때문이다. 공개된 곳에 기록하는 이유는, 늘 나의 글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품고 살았기 때문이다. 과거의 내가 쓴 글을 보다 보면 부끄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고, 블로그에 일기를 썼다가 비공개로 전환한 적도 여러 번이다. 하지만 부족하지 않은 글이 어디 있겠는가? 모든 글이 모든 사람의 가슴에 울림을 줄 수 없고, 내 글도 마찬가지다. 민망하더라도 내가 쌓은 모래성을 자랑스럽게 보여줄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발전이 있다. 모든 것은 무너뜨리고 고치면서 성장해 나가니까. 나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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