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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하 Sep 08. 2023

나의 상처가 누군가에게는 살아가는 힘이 되어주는 순간

캐모마일이 전하는 사랑이야기

좁은 시골 동네에서 늘 소문 속에 휩싸여 있던 나에게 2008년은 견디기 힘들었던 해로 기억된다.


 어리고 사회 경험이 없던 나에게 이런저런 조언과 지지를 아끼지 않던 언니가 나와 함께 사업을 시작한 후 그 해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27살 어린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무거운 삶의 무게가 나에게 던져졌다.


둘이 함께 운영하던 사업은 나 혼자 감당해야 하는 일이 되었고, 생활과 맞닿아 있던 그 사업을 나는 그만둘 수가 없었다. 슬퍼할 새가 없었다. 언니의 삼우제를 지내자마자 떠밀리듯 함께 있던 공간에 다시 들어갔고, 하루에 14시간을 둘이 함께 꼬박 같이 있던 그 공간에서 혼자 버텨내는 공포를 견뎌야만 했다.


우울증으로 오랜 기간 마음이 아팠던 언니의 모든 이야기를 듣고 받아내었던 공간에 다시 들어가 혼자 버텨야 하는 시간은 큰 일을 치르고 난 후인 나에게 너무 큰 고통이었다.


샵 안에서는 자매가 둘이 지내던 추억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장소에서 혼자 버티는 시간이 외롭고, 아팠다. 밖으로는 나와는 상관없는 소문들이 일파만파 퍼져서 문을 열고 밖을 나가면 지나가는 모든 사람이 나를 비난하는 것만 같았다.


아침에 문을 열고 샵 안으로 들어가면 느껴지는 공간 속 어둠의 깊이 만큼이나 더 깊숙이 깊숙이 숨고만 싶었다. 하지만 아직 어린 조카들과 이제 막 5살 된 딸아이를 책임져야 했던 내 삶 안에선 내가 더 도피할 구멍이 없었다.


살아내야만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눈물로 보내는 날 중에도 고립되어 있던 나를 묵묵히 침묵으로 지지해 주던 특별한 인연은 존재했고, 나의 힘든 시간을 버티는 큰 힘이 되어 주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면 삭막한 가게 안에 쭈그리고 있던 나에게 대화 상대가 되어 주는 고객이 한 분 있었다. 언니의 고등학교 선배로 알게 된 이 분은 매사 흔들림이 없는 단단하고 언행이 일치되는 '어른'이었다.


사람들이 무심코 “언니가 그렇게 되는데 동생이 몰랐어?”라고 묻는 그 한마디 질문에도 버티고 있던 마음이 우르르 무너져 내리던 시기이던 그때, 이 고객은 그 무수한 나의 소문을 듣고서도 관련된 질문 하나 없이 일상을 이야기했다. 아무렇지 않게 어색한 침묵의 시간 없이 속 깊은 이야기를 따뜻하게 이끌어 주던 이 고객은 나에게 참 따뜻하고 버틸만한 일상을 선물해 주던 분이었다.


어느 날, 이 고객은 다른 여느 날과는 다르게 이런저런 살아온 본인의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결혼하면서 첫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8살이 되던 해에 백혈병이 걸렸어요. 백방으로 알아보면서 고치려고 했지만 결국 세상을 떠났어. 동네 많은 분이 도와주시고, 모금도 하고, 그 고마운 마음을 내가 어찌 잊을까... 아이를 고치기 위해 직장도 그만두고 병원을 왔다 갔다 하며 그렇게 그 시간을 보냈는데 결국 아이가 세상을 떠났어.


그런데 있잖아. 윤소 엄마. 시간이 지나니까 당연히 잊을 수 야 없지만 죽을 것 같은 아픔은 조금씩 굳은살이 생기더라고. 둘째랑 한 살 차인데, 저 녀석이 엄마 챙김을 못 받아서 그때 힘들었을 텐데 저렇게 건강하게 철없이 자라주니 참 고마운 일이지. 아무리 아픈 일도 시간이 흐르면 지금만큼 힘듦도 지나가요. 어느 순간 보면 잘 살아낸 내가 기특해지는 순간이 올 거야."


갑자기 마음 한쪽이 찡 해왔다. 아직 어린 첫아이를 잃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형제를 잃고 망연자실 좀비처럼 앉아 있는 나에게 공감을 이끌어 위로해 주기 위해 자신의 가장 아픈 얘기를 꺼낸 것이었다.


분명 누워 있는 얼굴은 미소 띤 얼굴이었는데 팩을 올려놓은 고객의 눈 옆으로 조용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얼른 티슈를 뽑아 눌러드리고 내 눈에 흐르는 눈물도 티 안 나게 얼른 주워 담았다. 그렇게 그녀와 나눈 마음의 공감으로 나는 매주, 한 달, 일 년 이렇게 내 일의 의미를 찾으며 버틸 수 있었다.


아파 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아픈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


사람이 삶을 살아내며 아픔을 이겨내면서 생긴 마음의 온유한 모습은 식물이 살아내기 위해 자신들 만의 방법으로 치유물질을 만들어 낸 모습과 닮아있다.


 땅에 떨어진 씨앗은 용기를 내어 싹을 틔운 후 본연의 모습으로 자라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과정을 맞닥뜨리게 된다. 벌레가 다가오지 못하게 벌레를 쫓아내는 물질을 만들기도 하고, 곤충과 공생하기 위해 그들을 유인하는 물질을 만들기도 한다. 온몸으로 빛을 받아 뜨거움을 흡수하여 다시 뱉는 물질로 숲에 숨을 불어넣는다. 자신의 아픔으로 세상이 존재함을 돕는 치유물질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로만 캐모마일은 노지에서 비 맞고, 바람을 마주하고, 밟힐수록 더 많은 씨앗을 퍼뜨리며 더욱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는 식물이다. 키가 작고, 작은 꽃망울을 가져 여려 보이는 첫인상을 가지고 있지만, 수많은 식물 에센셜 오일 중 로만 캐모마일은 어린아이에게도 안전하게 쓸 수 있을 정도로 독성이 없다. 그렇기에 치유의 목적으로 두루 쓰이는 가장 대표적 아로마 에센셜오일로 꼽을 수 있다.




식물의 꽃말은 ‘역경에 굴하지 않는 강인함’이다. 밟히고 밟혀 보았기에 더 뿌리를 강인하게 내릴 수 있는 이 식물은 추운 겨울에도 뿌리로 버텨 이른 봄에 다시 새싹을 피워내는 식물이다. 캐모마일이 가지고 있는 치유력은 다른 식물이 자라는 텃밭에 같이 심으면 타 식물이 병충해에 걸리는 것까지 막아주는 신비한 치유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것을 알고 나니 그 생명력과 포용력에 감탄하게 된다. 삶을 살며 많이 아파 본 사람들이 타인의 마음에 공감이라는 마음과 눈빛을 나눌 수 있듯 이 식물 또한 자기 몸으로 삶을 이겨내며 만들어낸 치유물질로 주변 식물까지 병충해를 막아주는 강인함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내가 겪은 아픔은 분명한 이유가 있다. 아픔으로 만들어진 나의 그늘은 타인이 쉬어갈 수 있는 그늘이 되어 줄 수 있다. 식물이 각각 고유의 향을 가지고 있듯이, 사람 또한 자기만의 아픔을 이겨낸 내면의 향기가 다르다. 내가 어떻게 그 아픔을 내면에서 숙성시키느냐에 따라 각자의 마음 향기가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아픔을 견디고 극복해 낸 식물들의 향에선 촉촉한 비와, 건조한 바람, 활짝 피워낸 꽃, 젖은 흙, 축축한 이끼의 냄새도 난다. 이런 각자 고유의 향은 다양한 삶을 버티고 살아낸 사람과도 참 닮아있다. 아프고 힘든 시간을 버텨낸 누군가의 삶은 다른 이의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있는, 누군가를 치유할 수 있는 강력한 인품의 향기가 되어 주지 않을까. 마치 캐모마일이 가지고 있는 포근한 치유 능력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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