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승달이 전하는 이야기
이번 주 함께 볼 그림입니다.
관액자 형식과 캔버스 가장자리에 스민 세월의 흔적으로 보여드리고 싶어 그대로의 이미지를 보여드립니다.
그림을 천천히 감상해 보세요.
그림을 관찰하며 떠오르는 단어가 있나요?
이 그림의 제목은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그림을 보며 떠오르는 질문이 있나요?
떠오른 질문 중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은 질문은 무엇인가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고 적어보세요.
그림을 보며 든 생각
옷을 갖춰 입고 모자까지 쓴 두 남자가 산중턱에서 달을 바라보며 서있다. 초승달을 보기 위해 어두워진 시각에 등산을 한 것인지 등산을 하고 내려오다가 달맞이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오른쪽 남자가 달의 풍경에 흠뻑 빠져있다면 왼쪽 남자는 오른쪽 남자의 어깨에 팔을 얹고 무슨 말인가를 건네고 있는 중이다. 이들은 도대체 어떤 대화를 주고받고 있을까. 화면의 중심에서 오른쪽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쓰러져가는 나무는 뿌리가 드러나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매우 불안정한 나무를 그나마 바위가 받쳐주고 있지만 그 무게를 이겨내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드러난 나무뿌리는 처음에는 공룡처럼 보였으나 판타지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나무 괴물의 손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부분이 그림 전체를 약간은 공포스럽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세히 관찰하다 보니 살기 위해 땅을 향해 뻗어나가려는 의지의 몸짓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림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이나 떠오르는 생각은 시간이 흐르면서 바뀌거나 정교해지는 경험을 한다. 이 그림이 특히 그러하다. 약간은 으스스한 공포로 시작했던 감정은 차분해지는 느낌으로 가라앉는다. 달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도 혼자가 아닌 둘이서. 이 그림에 초승달이 아닌 보름달이 떠있었다면 또 어떤 느낌이었을까? 화가는 왜 초승달과 샛별 하나만 선택한 것일까?
그림을 보며 느껴진 단어
숲 속, 어두움, 공포, 달, 비밀, 연구, 우정, 늑대, 신비, 적막, 무서움, 작은 희망, 고요
내가 지은 제목
태풍이 지나간 후
떠오르는 질문
- 두 남자는 어떤 관계일까?
- 왜 나무들은 이렇게 으스스한 공포 분위기가 느껴질까?
- 달을 함께 바라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 달 대신 해였다면 어땠을까?
- 여러 가지 달 모양 중 초승달을 그린 이유가 있을까?
- 별을 하나만 그린 이유는 뭘까?
- 별의 의미는 무엇일까?
- 나무의 뿌리를 두 개나 드러나게 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 앞에 있는 잘린 나무를 배치한 이유가 있을까?
- 어깨에 손을 얹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 옷을 갖춰 입고 달맞이를 간 이유는 무엇일까?
화가 이야기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1774~1840)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는 19세기 독일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입니다. 그는 우의적(다른 사물에 빗대어 비유적으로 풍자하는) 풍경화로 유명하며 종교적이면서도 인간과 자연의 강렬한 대비 혹은 교감이 돋보이는 그림을 주로 그렸지요.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대부분 뒷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일곱 살에 겪게된 어머니의 죽음 이후 누이들과 형제의 거듭되는 죽음과 같은 비극적인 사건들이 이어서 발생합니다. 이로 인해 프리드리히의 풍경화는 우울한 성향과 종교색을 띠게 되었지요. 등장하는 인물의 얼굴을 표현하기 힘들었던 이유도 아마 불행한 가족사와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우울로 끝나지 않고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놓치지 않고 있어요. 그의 슬픔에 공감하면서도 자연과 인간의 관계로 번져나가는 사색에 동참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프리드리히 그림이 가지는 힘이 아닐까 합니다.
작품 이야기
<작품 정보 >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달을 바라보는 두 남자, 1825~1830년, 캔버스에 유채, 34.9X43.8,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이 그림은 프리드리히의 연작 시리즈 중 세 번째 작품입니다. 저녁 늦가을 숲 속을 산책하다가 저무는 초승달을 바라보는 두 남자 이야기이지요. 오른쪽에 서있는 남자는 프리드리히 자신이고 왼쪽에 서있는 남자는 재능 있는 젊은 동료 아우구스트 하인리히로 추정하고 있어요. 이 그림은 프리드리히가 비대칭 구도를 탐구하던 시기에 그려졌으며 인물 뒤에서 바라보는 명상적인 전경은 1817년에 그린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와 동일합니다. '알트도이체 복장'을 입은 모습도 같아요. 이 복장은 독일 민족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이 자신의 신념을 보여주기 위해 입던 의상인데 나폴레옹 시대 이후 독일 정부가 1819년 착용을 금지했다고 해요. 금지된 옷을 입은 인물을 그린다는 것은 화가의 신념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요. 나무도 살펴볼까요. 앙상한 가지와 뿌리를 드러낸 떡갈나무는 죽음을 상징하고, 왼쪽의 가문비나무는 사계절 푸르른 상록수로 두 나무의 가지가 맞닿아 있어 생명의 영원한 순환을 의미한다고 학자들은 설명하고 있어요.
1. 연작 시리즈 중 첫 번째 그림
연작 시리즈 이므로 첫 번째 그림과 두 번째 그림도 함께 살펴볼게요. 위의 그림은 프리드리히가 첫 번째 제작한 작품입니다. 세 번째 그림보다 조금 더 어둡고 갈색톤이 강하며 뿌연 안개가 살짝 낀 듯한 느낌이 들어요. 인물보다는 가운데 떠있는 초승달과 샛별에 시선이 집중됩니다. 가운데만 초점을 맞추고 나머지 배경이 아웃포커싱 되는 사진을 보듯 인물이 어둠에 묻혀 사라져 보이고 달무리로 인해 신비로움은 더 강조됩니다. 먼저 제작된 그림이니 이 그림을 기준으로 두 번째와 세 번째 그림을 바라보는 것이 화가가 같은 주제를 다르게 표현한 이유에 대해 더 살펴볼 수 있겠지요.
2. 연작 시리즈 중 두 번째 그림
두 번째 그림은 달을 바라보는 남녀입니다. 첫 번째 작품과 달리 인물의 성별과 전체 분위기가 달라졌지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프리드리히와 그의 아내 캐롤라인으로 추정해요. 주인공도 바뀌고 색 분위기가 달라지니 비슷한 구도인데도 느낌이 많이 달라지지요. 첫 번째 작품에 화면 전체에 갈색 안개가 낀 반면, 이 작품에는 장밋빛과 연보랏빛이 감돌고 있어요. 조금 더 이른 저녁으로 보이며 어두운 전경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세 개의 작품 중 어떤 그림이 더 마음에 와닿으시나요?
달을 응시하는 두 남자 혹은 두 남녀의 경건한 분위기는 19세기 초 문학, 철학, 음악 등에서 표현된 달에 관한 사색과 연관 지어 볼 수 있어요. 퍼시 비시 셀리의 'To the Moon',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그리고 프리드리히의 작품이 대표적 예입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24시간 전기가 내뿜는 인공 불빛에 노출되어 있고 다른 유혹에 빠져 달을 바라보는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달빛과 같은 황홀한 사건은 이제 찾아보기가 힘들어졌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달과 별이 전하는 이야기와 그 숭고함과 신비로움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