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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에세이]_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즐거운 학교'

by 민트아트



오늘의 선데이 에세이 주제는 '즐거운 학교'입니다. 오늘은 줌모임이 없는 대신 팀장님께서 주신 주제로 자습을 하는 날입니다. '즐거운'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기에 그냥 학교라는 주제를 쓰는 것과 달리 추억 소환이 많아졌네요. 학교라는 곳을 떠나지 못하고 여전히 다니고 있는 우리 선생님들은 어떤 글을 쓰실까 궁금해하며 제 이야기를 펼쳐봅니다.




< 즐거운 나의 학교 >


'즐거운 학교'하면 생각나는 책이 하나 있다. 바로 초등학교 때 너무 재미있게 읽었던 <별난 국민학교>이다.

1986년 출간되었으니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고 부르던 시절이었다. 모든 에피소드가 기억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재미있는 학교를 다니고 싶다'는 느낌만은 아직까지 남아있다. 당시 초등학교 교사였던 최영재 작가는 실제 학교에서도 '별난 선생님'이셨고 경험에서 우러나온 사실적인 묘사뿐만 아니라 당시 교육현장에 대한 풍자로 더 화제가 되었다. 아파트 단지와 한옥 마을 사이에 우뚝 선 신설 학교. 학교 이름을 짓는 과정 중 교직원과 학부모들이 싸우며 서로를 '별나다'라고 지적하다 학교명이 되어버린 '별난 국민학교'. 이곳에서 벌어지는 별난 사건들이 즐거운 학교에 대한 나의 옛 기억 속 한편에 자리 잡고 있다.


학교를 누구보다 좋아했던 나는 눈만 뜨면 학교를 가겠다고 했던 열혈 학생이었다. 심지어 교문이 열리기 전에 학교에 도착해 기다린 적도 있었으니 말해서 뭐 하랴. 학교는 가고 싶은 곳, 즐거운 곳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을 터. 무엇이 날 이토록 학교를 사랑하는 아이로 만들었을까. 도깨비 드라마의 명대사처럼 국어시간은 읽고 쓸 수 있어서, 미술과 체육시간은 원래 좋아하는 시간이라서, 음악시간은 노래를 부를 수 있어서, 학교를 가는 '모든 날이 좋았다'. 배우고, 성장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이 행복했던 시간들이었다. 뛰어나게 잘하지는 못했지만 뭐든 열심히 해서 그런지 나의 담임선생님들은 다양한 도전을 하도록 많은 기회를 주셨다. 수상의 여부를 떠나 대회를 준비하고 참여하며 그 안에서 배움을 직접 경험하도록 해주셨다. 도전을 즐길 수 있는 곳, 실패를 해도 괜찮은 곳. 학교는 그런 즐거운 곳이었다.


나의 폭발적인 성장은 4학년 때 담임선생님을 만나고부터 일어났다. 글쓰기를 돈 내고 배울 수 없었던 그 시절 선생님은 다양한 글쓰기 훈련을 시켜주셨다. 연말에 우리는 1년 동안 쓴 글 중 별표 받은 글들을 모아 학급 문집을 만들었다. 당시는 한글프로그램이 없었기에 A4 종이에 또박또박 우리의 글을 적어나갔다. 편집부였던 나는 겨울방학에도 학교에 나가 글을 분류하고 챕터별로 모으고 부록을 더 넣는 문집책 제작 과정에 참여했었다. 종업식날 문집책을 받아 안고 뿌듯했던 감정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만함이었다. 이 기억은 나중에 교사가 되어 학급 아이들과 문집책을 만들게 하는 소중한 원동력이 되었다.


교실에서 야영을 했던 추억도 떠오른다. 책걸상을 복도 밖으로 빼고 우리는 교실에서 친구들과 1박을 했다. 평소 공부를 하던 교실에서 누워 잠을 잔다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가져온 돗자리에 앉아 저녁도 먹고, 친구들과 누워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그날 밤 교실 창 밖으로 비친 별은 참 아름다웠더랬다. 학교 텃밭에 키웠던 땅콩도 생각난다. 그 당시에는 반마다 일정한 공간을 주고 식물을 함께 키웠다. 우리 반은 땅콩을 심었었는데 엄청난 풍년이 되어 수확한 땅콩을 학교 전체 선생님들과 나눠먹었던 행복한 기억도 있다. 운동회는 또 어떻고. 청팀, 백팀으로 나눠 이루어지던 초등학교 운동회는 동네잔치나 마찬가지였다. 머리에 둘렀던 팀 구별용 머리띠는 해마다 어떻게 바뀔지 모르기에 청색과 백색을 뒤집어 사용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고, 꼭 필요한 아이템이었다. 목놓아 외치던 '청팀 이겨라, 백팀 이겨라' 응원 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공부가 슬슬 중요해지던 중학교 시절의 기억도 즐겁다. 초등학교 때와 달리 급식이 없었던 중학교 때는 도시락을 들고 학교 교정의 꽃나무 그늘 아래에서 점심을 먹었다. 지금 같아서는 화단을 훼손한다고 들어가지 못하게 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점심마다 공원에 소풍을 나온 듯 그렇게 소중한 추억을 쌓았다. 본격적인 입시 준비에 찌들어 있던 고등학교 때조차 산 아래 자리 잡았던 교정의 위치 덕분에 뻐꾸기 소리, 계곡의 물소리, 철마다 변하는 산을 마주하고 고단하고 불안했던 그 시절을 잘 보낼 수 있었다.


나에게 학교는 즐거운 곳이었다. 슬픈 기억도, 힘든 기억도 물론 있지만 지나고 보니 즐거운 기억이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학교에 대한 각자의 기억은 모두 다를 것이다. 다양한 감정이 공유되는 이 공간을 떠나지 못하고 나는 교사로서 계속 학교를 다니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학교는 아이들에게 과연 즐거운 곳일까라는 물음에 선뜻 대답할 수가 없다. 사회는 더없이 발전했지만 우리는 소중한 것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진실로, 즐거운 학교를 아이들에게 선물하고 싶다. 나의 기억처럼 아이들에게도 즐거운 학교의 기억을 남겨주고 싶다.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학생도 성취감을 맛볼 수 있는 학교, 자신의 끼와 꿈을 펼칠 수 있고 탐색할 수 있는 학교, 모두가 즐겁게 참여해서 즐길 수 있는 행사가 많은 학교가 되기를, 나의 조그만 힘이라도 보탤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라본다. 우리의 자녀와 어린이와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공부 잘하는 명문학교가 아니라 '즐거운 학교'이다.






<별난 국민학교>는 1997년 <별난 초등학교>로 재출간되었으나 현재는 절판되었습니다. 헌책이라도 구입해 볼까 인터넷 검색을 하던 중 한국교육신문에서 최영재 교장선생님의 기사를 발견했습니다. 아래는 기사 원문입니다.

최 교장은 실제로도 ‘별난 선생님’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수업 중 책상을 모두 교실 뒤로 밀어 놓고 아이들은 신문지를 바닥에 깔고 누워서 이야기를 하거나, 만화책을 보고 심지어 낮잠을 자기도 했다. 또 시장(市場)에 대한 수업 시간에는 아이들을 시장에 풀어놓기(?)도 했다. 그런 일들 때문에 당시 학교에선 ‘골치 아픈 교사’였다고. 최 교장은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교육은 자유로운 사고력을 키워주는 것입니다. 답답한 교실에서 모두에게 똑같은 교육을 한다면 의미가 없어요. 자기만의 즐거운 상상력을 키워주는 것이 중요합니다”라고 강조했다.

최 교장의 이러한 교육관은 학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신월초 교내 곳곳에는 최 교장이 직접 그린 그림들을 이용한 게시판이 자리를 잡고 있다. 교장실 문손잡이에도 최 교장이 직접 만든 명함이 붙어 있다. 권위주의적인 것을 거부하는 최 교장의 교장실에는 명패도 없다. “하루 종일 교장실에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누구든지 한 번은 웃고 나갈 수 있도록 하고 싶다는 생각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출처: 한국교육신문(2007.10.01.)


<별난 국민학교>가 명랑 소설 속의 학교만은 아니었음을 최영재 교장선생님의 에피소드와 교육철학을 접하며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이 책이 출간되어 널리 읽혔으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도 보태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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