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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아한밍블 Jan 11. 2020

내 지식과 경험의 출처는 어디입니까?

AI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성향에 대해 잘 알고 수용할 부분과 훈육할 부분이 구분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무색하게 첫째에게 큰소리친다. 느리다는 이유로 말이다. 등원 준비할 때, 외출할 때, 숙제할 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느리다. 아이의 성향이라고 한다면 나의 성향은 뭐든 ‘빠르다’라는 것이 문제이다. 빠른 엄마와 느린 딸이 만났으니 복장 터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닌 것이다.




“너는 왜 이렇게 느린 거야? 가방 제자리에 두고 도시락 꺼내고 씻는 일이 그렇게 어려워?”

“......”

“말 좀 해봐 도대체 어떤 부분이 그렇게 어려운 거야?”

“......”

“네가 얘기를 해야 엄마도 너를 이해할 수 있어. 엄마는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너한테는 어떤 부분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

“나는 씻는 게 싫어. 그냥 계속 놀고 싶어.”

“(웃음) 아. 씻는 게 그렇게 싫어? 그냥 계속 노는 걸 하고 싶은 거야?”

“응. 씻고 나면 재밌게 하던 놀이의 기분이 사라지고 숙제를 해야 되는데 그것도 싫고.”

“그렇구나.”

“엄마가 자꾸 뭘 해야 된다고 하는 것도 너무 스트레스받아.”

“엄마는 너희가 빨리 해야 할 일을 끝내고 더 많이 놀게 해 주려고 그러는 건데 해야 된다고 말하는 게 도리어 스트레스가 되는구나?”

“응 그냥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

“그렇구나.”





딸아이가 이만큼이라도 얘기해 주는 것은 아직 어려서 그렇겠지, 그나마 감사했다. 아이의 입장이 이해가 됐다. 하지만 아이의 말을 무조건 수용해 줄 수도 없었다.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해도 받아줄까 말까인데 그저 마음대로 하고 싶다는 말을 지지해 줄 수는 없었다. 한동안은 잔소리라도 하지 말자라는 생각으로 재촉하지 않았다. 아이가 더 많이 놀 수 있게 해주고 싶어서라는 건 사실 거짓말이었다. 그냥 내 눈에 정돈되지 않은 채로 계속 신경 써야 하는 일이 남아 있는 게 싫어서였다. 그렇다면 최소한 재촉하고 닦달하는 것은 그만해야지 싶은 생각이 들었고 하원 시에는 자기들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잔소리하지 않았다. 그나마 평화가 찾아왔다.


 아이의 욕구와 빠르고 느리다는 성향에 대해서 생각했다. 아이는 놀고 싶어 했다. 뭐든 자신의 자발적인 동기로 즐겁게 하기를 원했다. 세상은 그렇게 즐겁게만 살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해야 할 일들 목록을 내밀며 ‘너의 할 일’을 마치라고 이야기했다. 문득 해야 할 일들, 세상을 사는 법 등은 어디서 온 목록이며 기준인지 자문하게 됐다.  순전히 내가 겪은 세상, 내가 만든 기준이었다.


 휴직을 하고 유튜브 강의를 많이 접할 수 있었는데 EBS 지식의 기쁨이라는 채널에는 상당히 저명한 분들이 많이 나오신다. TV에서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인데 시간 맞추기가 어려워 공식 계정을 통해 다시 보며 그야말로 지식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 김대식 교수님도 EBS 지식의 기쁨 강의를 통해 뵙게 되었다. (인공지능의 미래, 뇌 과학 편) 김대식 교수님은 인공지능에 관한 기본 개념과 지식을 아주 쉽고 재밌게 알려 주셨다. 학습을 통해 컴퓨터를 사람처럼 생각하고 배울 수 있게 하는 기술이 딥러닝인데 이 과정에서 입력되는 수많은 정보를 통해 컴퓨터 스스로 출력 값을 도출해내는 것이다.

 그런데 컴퓨터가 사용할 수 있는 정보라는 것이 주로 일찍부터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진 선진국에서 입력된 정보에 기반하다 보니 정보의 편견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가령 백인만 사람으로 인식한다거나 인도의 신부는 무희라고 인식한다거나 하는. 그래서 어쩌면 평가된 정보의 출처를 아는 것이 중요해졌다고 말씀하셨다. 물론 이 또한 축적이 계속되면 해결될 수도 있겠지만 어느 분야나 정보의 출처는 중요해지고 있다. 엄청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인공지능도 이렇게 정보의 편견이라는 오류를 거쳐 진화하는데 나는 과연 얼마만큼의 축적된 데이터로 아이를 가르치는가 하는 생각이 번쩍 스쳤다.

겨우 내가 경험한 세상, 내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로 아이에게 이래야 한다, 라는 당위성을 그것만이 진리인 듯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순간 나를 부끄럽게 했다.


시간을 지키는 것, 약속을 지키는 것은 중요한 가치이고 덕목이다. 가르쳐야 하는 부분이 맞지만 덕목에 대해 설명하지 않고 엄마 눈에 신경 쓰이니 빨리 해라라고 다그치는 것은 순전히 나의 편함을 위한 이기적인 외침이다. 네가 숙제를 열심히 해야, 공부를 잘할 수 있고 공부를 잘해야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고리타분한 외침. 내가 어릴 때부터 아니 나의 부모님이 어릴 때부터 존재하던 그 데이터로 세상의 판이 달라진 지금 그대로 아이에게 입력시키는 것이 얼마나 오래된 방식인가?

  

유튜브에서 영상을 보다 보면 똑똑한 유튜브는 내가 검색한 검색어를 기준으로 유사한 강의를 계속 추천해주는데 그러다 EBS 특별기획 ‘통찰’이라는 강연 영상을 보게 되었다. 김대식 교수님의 뇌과학 이야기를 재미있게 봤는데 자동 추천으로 김대식 교수님과 서강대 철학과 최진석 교수님의 강연을 좋아할 거라 생각했는지 추천해준 것이다. 그 강의에서는 조금 더 심도 있고 철학적인 이야기가 많이 다뤄졌다. 그렇다면 AI로 대체되지 않는 인간의 특성이란 무엇이냐는 이야기였다. 지금 우리야 직업도 있고 먹고살만한 정도의 돈을 벌며 살고 있지만 아이들은 과연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기계에 대체되지 않으려면 어떤 능력을 키워야 하는지 귀를 쫑긋하게 되었는데 최진석 교수님은 ‘부정성’에 대해 말씀하셨다.

기계는 늘 효율성을 추구하고 답이 나오는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 그런데 인간은 합리적인 상황을 거부하고 엉뚱한 선택을 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우리 아이가 효율성 있는 과정을 따르지 않고 그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원하는 때에 놀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인공지능과 인간의 다른 점이라고.


나는 멍해졌다.

정말 그랬다. 인간만의 능력이라고 여겨졌던 직관과 창의성조차 엄청난 데이터가 축적이 되면 AI도 가능하다는 것이 알파고를 통해 증명되었다. AI는 분명한 답이 나오는 길을 수많은 데이터를 통해 찾아내며 그 과정에서 합리성을 이탈하는 과정은 있을 수 없다.

반면 우리 인간은 서로가 서로를 ‘절대 이해 못 하겠네’라고 한숨 쉬는 수많은 행동들을 반복한다. 아이의 행동을 이해 못 할뿐더러 나 역시도 행동하고 후회하고 늘 같은 문제,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도 한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 ‘부정성’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아이의 자유로운 행동은 엄마의 기준에 비춰볼 때 분명한 ‘부정성’에 해당하는 가히 창의적인 행동이다. 이 능력이 인공지능에 대체되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의 강력한 차이점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나의 기준에서 수정해야 할 행동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강의를 듣고 보니 그러한 ‘부정성’은 수정해야 할 행동이 아니라 장려되어야 하는 인간의 특성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는 나 역시 생각하는 능력과 직관적인 판단은 인공지능이 인간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관이라는 것도 사실 어느 정도의 경험이 축적되면 생기는 능력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마어마한 데이터 앞에 짧은 경험이라는 게 과연 얼마만큼의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합리성을 이탈하는 엉뚱함.

이제는 아이를 통해 내가 배워야 할 때가 왔다. 얼마만큼의 의미가 있을지 불확실한 나의 경험으로 아이를 판단하고 나의 기준을 들이밀며 아이를 기성화 시킬 때가 아니라.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변하지 않는 가치에 대해서는 나의 삶으로 보여주고 알려주되, 얼마 되지 않는 나의 경험과 지식으로 아이를 가두지는 말자.

너무나 다르게 변하는 요즘 세상은 엄마 역시 처음 경험하는 세상임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아이와 함께 생각하고 배워나가려는 마음가짐 하나만으로 어쩌면 관계가 더 좋아지는 비법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부디 이 마음 변치 않아야 할 텐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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