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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밍블 Feb 24. 2022

네가 책을 읽는 이유는 뭐야?

어디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도 되는 거야?     


나는 꽤 어렸을 때부터 책을 봤어. 눈뜨면 보이는 책을 읽었지. 할 일이 없는데 보이는 건 책뿐이라 책을 읽었어. 재수 없겠지만 사실 그랬어. 활자 중독이었나? 아무거나 눈에 보이는 글자를 읽었고 그래서인지 부모님이 책을 계속 사주셨지. 물론 전집으로. 집에 있는 전집을 한 권도 빠짐없이 다 읽었는데 당시 우리 집에는 세계명작동화 같은 건 없어서 친구네 집에서 좀 더 재밌는 책을 읽었지. 소공녀, 성냥팔이 소녀 이런 책들. 나는 하나도 불쌍한 어린이가 아녔는데 당시에는 왜 그렇게 불쌍한 소녀들에 감정이입을 했는지 알 수 없었어. 우리 엄마도 계모일 거라는 생각은 필수로 따라붙었지. 나는 위인전도 매우 재밌어했는데 훌륭한 위인들에게도 물론 감정을 이입했어. 이런 위인들도 평범한 시간이 있었네? 혹은 위인들은 어린 시절도 평범치가 않네? 그들처럼 나 스스로를 평범과 비범을 넘나드는 인물로 설정하고, 나는 불쌍하지만 위인이 될 법한 그런 사람으로 생각하며 놀았어. ^^


동생과 8살 차이가 나니 8살까지는 당연히 혼자 놀았고, 동생이 태어나고도 나이 차이가 났으니 쭉 혼자라는 생각을 했어. 외로운 사람의 놀이를 했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기억 속의 나는 늘 혼자였어. 뜬금없지만 우리 엄마는 인형을 사주시지 않았어. 바비인형을 물끄러미 바라만 볼뿐 나 역시 사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어쩐지 사달라고 말할 수가 없더라? 금발머리와 파란 눈, 화려한 옷이 어린 내가 보기에도 사치스럽게 느껴졌나 봐. 아마 어린 내가 생각할 때 당시 우리 재정형편이 좋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 같아. 어린이들은 눈치가 빠르잖아?(사실이든 아니든 자신이 성숙하다고 생각한 편이니까) 그래서 내가 간신히 사달라고 말할 수 있었던 건 두꺼운 도화지에 그려진 종이인형이었어. 바비인형과 종이인형이라니. 그 둘의 차이는 어마 무시했지만, 그 정도는 누구나 사줄만한 수준이라 생각했던 거지. 그런데 엄마는 그것마저 사주지 않았어. 그때의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 엄마는 왜 내게 이런 것조차 사주지 않는 건지 도~~ 저 히 이해할 수가 없었어. 나중에 엄마에게 들은 얘기는 그럴듯한 예쁜 인형은 사달라 하지 않고 종이 쪼가리로 뭘 하겠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고 했어. 흠, 소통의 부재란.     


 그래서 나는 계속 책만 읽었다는 이야기야. 유일한 즐길거리가 책이었고 엄마는 당시 유행하는 잡지라며 ‘새벗’을 사주셨어. 정말 유행이었는지, 나는  길이 없었지만 새로운 볼거리였으니 뭐든 매우! 열심히! 재밌게 읽었어. 어린 시절 독서의 이유는 오직 ‘재미’였어.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기 위한 도구 중 하나였지. 어릴 때는 시간이 아주 많잖아? 시간이 많았지만 재밌는 게 오직 책뿐이던 나도, 점차 더 재밌는 경험을 하게 되면서 책은 잠시 멀어졌어. 학교 공부에 정신없기도 했고. 그래도 여유가 생겼을 땐 다시 책으로 돌아왔어. 가장 익숙한 매체였고 지식을 뽐내기엔 책만 한 것이 없었으니까. 새로운 것을 알고 싶을 땐 제일 먼저 책을 찾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믿을 수 없을 땐 책을 찾아 검증했어. 이젠 책 보다 손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많아졌고, 굳이 내가 책을 찾아 검증할 필요도 없어졌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책을 읽어. 왜 아직도?


내가 얘기했지만 네가 믿지 않는 얘기. 나는 공감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어. 특히 타인의 아픔에 대해서는 로봇처럼 무감각했지. 나는 말이야... 겪어보지 않으면 누구나 공감을 못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충격이었어. 주변 사람들을 위하는 마음은 있는데 공감은 못하는 희한한 사람이 나였어.! 같은 마음으로 울고 웃지를 못했지. 어떤 감각인지를 모르겠는 거야. 다방면으로 노력했어. 공감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했고 사람들을 만나면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노력했어. 조언해줄 게 백만 가지가 넘었지만, 간신히 참고 백가지 정도만 조언하는 사람이 됐어. 그래, 여전히 차가우면서 잔소리까지 많은 사람이 나였지. 갈 길이 아득히 멀다고 생각했는데 30대 중후반이 되자 조금씩 알 것 같더라고? 아이를 낳고 내가 이렇게까지 나쁜 사람이었나 나의 바닥을 보며 다시 책으로 마음을 정돈해야겠다 생각한 시점이야. 결심과 다르게 시간과 체력이 안돼 짧은 단편소설만 읽을 수 있었던 그때. 소설과 에세이만 겨우 읽었던 그때부터인 것 같아. 나이를 먹어서인지도 모르겠지만 소설 속의 감정 흐름을 따라가다 보니 공감이라는 걸 하게 됐어. 내겐 기적처럼 마법이 걸리는 순간이었다고!



왜 꼭 책에서만 감정이입을 했냐고 묻는다면, 나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어서 그래. 탄탄한 구조와 눈에 보이는 활자만이 믿음직스러웠거든. 잘생기고 예쁜 배우가 나오면 이야기의 힘이 약해지는 느낌이 들었지. 차근차근 사건이 전개되고 내 시간표대로 감정을 전개할 수 있는 책의 아날로그성이 내겐 잘 맞았어. 공감능력이라는 큰 선물을 얻게 되니 나는 점점 욕심이 생겼지 뭐야. 주변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에서 세계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 너무 거창한가? 재미를 얻고 지식을 습득하고 공감하는 것을 넘어 세계를 알고 싶어 졌다고. 이 땅에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이해할 수 있는 만큼 아주 최대치로 이해하고 싶었어. 그것을 내 삶의 목표로 삼았지. 후훗

     

이해해서 뭐하냐고? 그러게. 누가 상주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 내겐 답이 있어. 너무 추상적이고 뻔한 답이지만 분명한 답이 있다구.

나는 세상을 사랑하고 싶어......     

그런데 나는 이해해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거든.

이해하려면 알아야 될 것이 너무 많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하잖아. 그걸 구분하는 작업이 내겐 책 읽기야. 아마 내 전 생애를 거쳐 이뤄가야 할 일이겠지? 


그 과정을 P, 너와 함께 하게 되어 기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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