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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밍블 Nov 04. 2024

아이와 나의 마음에 확신을 심는 시간

《고리오 영감》처럼 되지 말아야 할텐데.

특별히 나의 손길이 필요한 시기는 지났지만, 아이들이 하교하는 시간에 집에 있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무엇을 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나절 정도 다른 공간에 있었던 아이들의 얼굴이 보고 싶기 때문이다. 어쩐지 학교를 다녀온 아이들의 얼굴은 집을 나설 때와는 달라져 있었다. 나름대로 애써야 하는 사회생활, 피곤한 인간관계 때문인지 부쩍 고단해 보이기도 때로는 조금 성숙해 보이기도 했다. 묘한 차이를 보는 것이 좋았다. 짧은 시간에 인생의 파노라마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약간은 수척해진 얼굴은 몇 시간이 지나면 곧 내가 아는 앳된 얼굴로 돌아온다. 잠깐의 휴식을 누리기만 하면 다시 생기를 회복하는 놀라운 능력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다.




아이들이 현관의 도어락을 삐빅 누르고 들어올 때 하필 내가 화장실에 있을 때가 있다. 나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엄마 화장실에 있어, 라고 외치면 화장실 문을 빼꼼 열어 장난끼 가득한 얼굴의 초승달 눈으로 인사를 한다. 그리고 문 작은 틈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쉴 새 없이 밀어 넣는다. 내겐 하나도 중요치 않은, 본인 위주의 주요 에피소드를 밑도 끝도 없이 시작한다. 이런 아이들의 침입이 싫을 땐 문을 잠그고 있지만, 여전히 나는 학교에서 바로 돌아온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싶어 그냥 두는 편을 택한다.




아주 원초적인 생리현상을 방해받는 것이 싫으면서도 보고 싶은 아이들의 얼굴이라며 기꺼이 그 방해를 허용하기도 하는 나는 일관적이지 않다. 아이들이 늘어놓는 이야기에 대해서도 그렇다. 어떤 날은 별일 아닌 얘기를 대단한 사건인 것처럼 과장하는 아이의 표정과 목소리가 귀엽다며 호들갑을 떨지만 어떤 날은 알아듣고도 맥락을 알 수 없다며 시큰둥해 한다.




이토록 오락가락하는 나이지만, 노력하는 것이 있다면 아이들의 생활을 궁금해하는 것이다.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이야기를 항상 정성스럽게 듣는 것은 아니고, 영어 흘려듣기처럼 스치듯 듣더라도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아니 그래서, (틀린 이름을 넣어) 걔가 너한테 그랬다고? 너무 황당하네. 라든지 그건 네가 눈치가 좀 없었던 거 아냐? 같은 나 역시 눈치 없는 질문을 하면서 아이들의 사생활 속, 맥락 안에 있고자 노력한다.




발자크의 소설 《고리오 영감》을 읽으며 부모 자식간의 관계를 생각했다. 19세기 프랑스 파리의 하층민이 모여 사는 보케르 하숙집을 배경으로, 자식들에게 모든 것을 희생했지만 결국 외롭게 죽음을 맞이하는 고리오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소설은 당시 프랑스 사회의 혼탁한 모습을 보여주며, 돈이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었음을 비판하고 고리오 영감과 딸의 관계를 통해 올바른 사랑 표현, 돈 이외의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든다. 고리오 영감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숭고하지만 한편 무서운 면이 있다. 그는 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자신의 연금이 바닥날 때까지 모든 걸 쏟아부으면서 딸들의 인생에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싶어한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나? 하는 기대는 당연한 마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과는 비참하고 쓸쓸했다. 돈이 사라지는 동시에 모든 관계가 끝이 났다. 고리오 영감의 일방적인 사랑은 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아이들의 친구 관계, 학업, 외모 모든 영역에서 할 수 있다면 물심양면 도움을 주고 싶다. 지금도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꼼꼼하게 체크하며 개입할 적당한 시기를 고민하기도 한다. 하지만 고리오 영감처럼 해결사가 되지는 말아야지 다짐한다. 아이의 필요에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서로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마음을 주고 받는 건 어떻게 연습할 수 있을까? 내가 아이의 손에 쥐어줄 수 있는 건, 아이의 마음에 새길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삶을 대하는 태도? 책을 가까이 하는 마음? 재산? 모두 완벽하지 않은 상태였고 설사 가르친다고 잘 전해질까 싶었다. 나를 이루고 있는 태도나 여러 경험이 아이들에게 잘 맞는 방법일리도 없었다. 지혜의 아름다운 말만 하는 사람이 될 수도 없었다. 생각보다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고 아이들이 크는 모습을 그저 행복하게 지켜보며 응원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선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니 지금 아이들의 얼굴, 지금 아이들이 하는 말에 집중할 수밖에.




아이가 하교해 집으로 들어오는 순간과 내일로 넘어가는 자기 전 시간엔 오직 아이만 보기로 (나 혼자) 정했다. 자세히 알지 못해도 느껴지는 고단함을 격려하고 불안한 마음을 달래주기 위한 말들을 고르고 고른다. 나는 가끔 아이를 믿지 못한다. 친구들의 결정에 휩쓸리는 것은 아닌지, 언니나 동생이 하는대로 따르는 것은 아닌지 그런 줏대없음을 못미더워하기도 한다. 그럴때 어김없이 아이는 마음이 상한다. 자신을 온전히 지지해주지 않는 표정의 나에게 아이는 울먹거리며 말한다. "엄마, 내가 판단한 거야." 




불안해하는 건 언제나 아이보다 내쪽이다. 그렇기에 아이에게 집중하는 몇 시간은 사실 내 마음을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아이는 앞으론 내가 화장실에 있든 말든 자기 방으로 먼저 들어갈 테고 친구와 통화를 하며 잠들것이다. 그러니 나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지금, 내가 줄 수 있는 시간과 마음을 최선을 다해 쏟자고 다짐한다. 그것은 항상 최고가 될 수 있는 답을 알려주자는 열심이 아니다. 지금 아이의 결정이 설사 친구를 따라가는 것일지라도, 그래서 상처를 받게 될지라도 엄마는 다시 너를 응원하겠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시간이다. 아이가 내 곁을 떠난 순간에도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아주 당연하게 아이의 마음에 스며 들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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