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이라 그랬어_김애란 소설을 읽고
출간되자마자 친구가 선물해준 덕에 일찌감치 읽었지만 리뷰를 할 마음이 별로 생기지 않았다.
마치 다 같이 추워지기도 결심한 어떤 시절처럼 느껴질 때마다 우리 나약한 이들에게 안녕과 평안을 묻는 오늘날의 간절한 목소리, 지금 우리 시대의 인사 라는 책 소개 문구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책을 다시 들춰보지 않은 건 꼬였으면서 아닌 척 하고 불편하면서 괜찮은 척 하던 나의 어떤 한 시절을 굳이 다시 불러내 생각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었다. 아니 이미 뭐 지난 얘긴 걸. 이제 내 관심사는 아닌 마음들을 굳이 뭐. 그랬다.
처음 실린 '홈파티' 부터 불편했다. '최고경영자 과정'을 밟은 성민이 코로나 시대에 함께 공부한 사람들과 소규모 모임을 가지면서 이연을 초대했고 그 모임안의 분위기 묘사와 대화가 작품의 주를 이룬다. 성민과 이연은 다른 배경의 사람들과의 대화가 편치만은 않았지만 적응하려고 애쓰는 축이었다. 배우인 이연은 그들을 판단하지 않고 오로지 그들의 입장이 되어보겠다고 결심까지 한 상태였고.
세상에 주류다운 몸짓과 표정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닌데 제 모습이 민망해서였다. 다만 이연은 웃고 떠드는 와중에도 그들에게서 알 수 없는 힘을 느꼈다. 상대에게 직접 가하는 힘이라기보다 스스로를 향한 통제력이라 할까, 오랜 시간 ‘판단’과 ‘선택’이 몸에 밴 이들이 뿜어내는 단단하고 날렵한 기운이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나는 이연도, 성민도, 그렇다고 파티의 주최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편함을 느꼈던 건 내가 종종 파티의 주최자도 되었다가 이연도 되었다가 양쪽 모두에 몰입을 하면서도 결국 그 어느쪽도 확실하지 않구나 하는 자각때문이었다. 나의 위치는 어디지? 하다가도 아니 그 '위치'라는 게 뭐가 중요해? 하다가도 아니 어느 위치인지 아는 게 무슨 문제야? 왜 예민하게 그래? 하다 덮어버렸다. 나는 완벽한 대표성을 띠고 싶었던걸까? 하지만 그 어떤 역할도 자연스럽지 않은 것에 불편함을 느꼈던 걸까? 확실치 않다. 그냥 이 자리 저 자리에 서보는 흉내를 통해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것으로 만족한다.
'숲속 작은 집'의 상황 역시 비슷하다. 한국에서 비행기로 7시간 걸리는 나라의 산악도시 한달살이. 숙소를 청소해주는 직원에게 주는 팁으로 고민하는 부부가 주인공이다. 정확히는 남편은 아니고 아내인 은주의 고민.
나는 기쁘다기보다 서운했다. 나는 잔돈을 놓을 때도 큰돈을 둘 때도 항상 똑같이 고맙다고 적는데 팁에 따라 태도를 확 바꾸는 그녀가 거북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데도 그랬다. 그후로도 숙소에서 종종 그녀와 마주쳤지만 나는 아무 일 없던 양 웃으며 합장했다.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돈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나와 돈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나 사이의 갈등. 스스로 끝내지 못한 고민이 행동과 감정을 뒤흔든다. 이 고민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책에서조차 이런 불안정한 모습을 만나니 역시나 또 모른척 하고 싶다. 그런 고민은 들키지 않게 하자. 쉿, 조용히. 손가락을 입에 대게 되는 것이다.
'좋은 이웃'에서 이런 불편함의 원인은 좀 더 명확해진다.
마음이 허전하고 휑한 이유. 내가 연민하던 대상이 혼자 반짝이는 세계로 가버렸기 때문일까? 아니, 나는 시우를, 시우 어머니를, 그들이 사는 집을 내려다본 적 없는데. 그럼 마주보는 건 괜찮지만 올려다보는 건 싫은 걸까? 내가 경제적으로 가장 쪼들렸을 때조차 시우네만은 수업료를 안 올렸는데. 그때 그냥 오만원 더 올려 받을걸. 누가 누굴 걱정한거지?
윗집 내부가 안정적이고 아름다운 형태를 잡아갈수록 우리 생활은 천천히 부서지고 망가지는 것 같아서였다.
우리가 집을 잃어서도, 이웃을 잃어서도 아니었다. 우리가 정말 상실한 건 결국 좋은 이웃이 될 수 있고, 또 될지 몰랐던 우리 자신이었다는 뼈아픈 자각 때문이었다.
그치만 나는 '좋은 이웃'이 되지 못했다. 라고 결론짓지 않는다. 좋은 이웃이 되고자 했던 마음, 도덕적 만족감, 묘한 경제적 우월감이었을지라도 시우를 돕고자 했던 마음은 진심이었기에 약간의 불순한 마음이 섞였다 한들 차차 더 좋은 마음으로 채우면 된다고 생각한다. 내게도 그렇게 알 수 없는 마음이 뒤섞여 있다. 더 깨끗한 마음이기를 바라는 누군가는 그런 나를 위선과 가식 덩어리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때로는 나조차 그런 내게 지치는 마음이 생길지라도 점점 더 좋은 것으로 채우다보면 선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선(善)에 가까워질 것이라 믿고 있다.
뭐든 되어가는 중이다. 잘하고자 하는 마음도, 아끼는 마음도, 사랑하는 마음까지도 마음만으로 되지 않기에 불협화음을 낸다. 현실을 살아가기에 실제 내 그릇은 마음만큼 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표제작 '안녕이라 그랬어'는 안녕이라는 두 글자에 많은 의미가 실린다.
우리 다 그렇지. 그렇게 보이지. 그래, 우리에게는 ‘상황’이 있으니까.
화상영어를 통해 만난 로버트와 은미. 모국어가 아닌 대화이기에, 언어 이외의 것으로 더 진솔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원활한 소통이 이뤄지지 않아도 '상황'으로 알 수 있는 것들을 주고 받는다. 그런 분위기가 좋았던 단편이다. 보이지 않는 것으로 대화가 되는 기분, 내밀하면서도 예리한 위로랄까? 이 단편에서만큼은 드러난 거짓이 있을지언정 위선이 없다. 어쩌면 그래서 편안했고 좋았던 단편으로 꼽는지도 모르겠다.
은미는 로버트와의 마지막 수업에서 수업이 아닌 대화를 하고 싶었고 '안녕'이라는 말을, 평안을 비는 마음을 주고 받고 싶었다. 은미는 로버트에게 안녕이라는 말을 건넸다. 로버트에게서도 안녕이라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그 말을 들으면 자신이 정말 평안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로버트의 입이 벌어지는 순간 마치 정전이라도 된 양 화면이 자동으로 꺼졌다. ‘잔액부족’과 ‘시간 종료’ 문구가 뜬 노트북 화면만을 남겨두고.
아. 자본주의여.
제발 잠시라도 안녕하게 둘 순 없는건가? 꼭 이런 순간에도!
평소 자본주의 시대에서 사는 법을 말하면서도 이런 순간을 야멸차다 느끼는 나는 역시나 경계에 선 사람이다. 어쩐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면이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래서 나대로의 역할이 있음을 안다. 견뎌내야 한다. 나의 경계없음을 또는 명확한 선들을. 나의 위선을 또는 선한 마음을. 불편해서 외면하고 싶은 마음을 또는 기꺼이 불편하고자 하는 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