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한낮은 어려웠다. 겨우겨우 할 일을 마쳤다. 어디선가 늘어져 있다 뜨거운 공기가 한풀 꺾이면 '집에 있어? 산책이나 하자' 친구 집과 우리 집의 중간인 버스정류장으로 나오라고 문자를 보내곤 했다. 후끈한 공기가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아도 저녁이면 선선한 공기가 그야말로 쿨하게 등장하는 시간이 좋았다. 나뭇잎이 어제보다 진한 초록빛을 뿜어내다가도 곧 노랗게, 빨갛게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여름밤의 공기가 좋았다. 내내 짱짱할 것 같던 초록빛도 어느 순간 다른 색으로 물드는 것이 계절의 순리이듯 우리의 인생이 제발 다음 단계로 넘어가 주길, 평범한 직장인의 길이 우리에게도 무탈 없이 열리길 빌었다.
정해지지 않은 것이 많았던 날은 모두 여름밤이었던 것 같다. 도서관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한다고 주위를 서성이던 날도, 각종 시험공부에 치이면서 기력 보충을 위해 홍삼팩을 쪽쪽 들이켰던 때도 여름이었으니까. 불안하고 흔들리는 일이 오직 여름에만 찾아왔을 리 없지만 유독 여름밤이 기억나는 것은 그 시절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함께 했던 사람들과의 기억 덕분이다. 여름밤은 이야기 나누기 좋은 때였다. 해가 길어진 여름밤은 아무것도 없던 시절에도 넉넉한 부자가 된 기분을 갖게 했다. 확실한 것보다 불확실한 것이 많았던 시절이었지만 적어도 마음 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한 계절이었으니까. 취업과 인생을 고민하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이 가는지도 모르고 헤프게 썼지만 그것으로 충분한 마음이었다.
" 너는 금방 취업될 거야. 어디 가고 싶다 그랬지? 그래 그래. 화장품 회사. 너랑 너무 잘 어울려! 거기 가면 나도 화장품 싸게 살 수 있는 건가?"
" 취업하면 그때부터 월급의 노예가 된다잖아. 그때부터는 정말 노빠꾸! 그러니 지금 이 시간을 잘 누려야 하는 건지도 몰라!"
선선해진 밤공기에 계절의 변화를 느끼며 무엇이 되지 않은 서로에게 우리는 정말 잘 될 거라고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들을 나눴다. 그때 우리가 가진 것은 그런 것이었다.
사실 여름밤의 기억이 특별했던 것은 아니다. 한낮의 기온과 여름밤 온도의 차이가 약간의 생기를 더했고 시간이 많던 사람들의 만남이 잦았을 뿐이다. 나아감을 느끼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그저 내일을 기대하자는 흔한 말을 나누기 위해 우리는 여름밤 매일 만났다. 내가 무엇이 되기 이전,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는 그때.
취업을 했고, 결혼을 했고, 아이는 자랐다. 글을 썼고 책을 냈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용기 정도는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무엇이 되었다는 감각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니다. 되었다는 말은 어느 한 지점에 닿아 멈춘 느낌인데, 멈추길 바란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나는 여전히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 향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어쩌면 표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없이 보낸 여름밤 끝에 가을이 오고, 짙은 초록에도 빨간 물이 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시절 우리가 나누었던 건 단지 불안함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무더위에 눌린 하루가 저물면 슬그머니 나타나던 여름밤의 공기는 늘 말할 수 없는 감정을 꺼내놓기 딱 좋은 온도를 가지고 있었다. 낮에는 미처 말하지 못한 속내들이 조금은 식은 공기를 타고 흘러나오곤 했다. 그리곤 종종, 서로가 말 끝을 흐릴 때면 그 뜨겁던 낮을 견디고 온 우리에게 밤이 다정하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막연한 희망도 두루뭉술한 조언도 그리고 희뿌연 미래까지도. 어쩌면 그 밤엔 미래를 향한 불안보다, 현재에 깃든 희망을 크게 느끼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 같다.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이라는 말이 설득처럼 들리던 밤.
해가 늦게 지고, 바람이 천천히 불고, 아직 끝나지 않은 하루의 숨결이 천천히 식어갈 때,
우리는 아무것도 되지 않았기에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꿈꿀 수 있었다.
어쩌면 지금 내가 그리워하는 건 미완의 시간 속에서도 서로의 존재만으로 위안이 됐던, 매일 밤 아무 거리낌 없이, 오해 없이 서로를 불러낼 수 있었던 마음이 아닐까. 다시 여름밤을 맞이한 지금, 예전처럼 마음을 느슨하게 풀고 한참을 걷고 싶다. 아무 이유 없이, 아무 이야기 없이 다시 누군가와, 그냥 조용히 지금의 시절을 누리고 싶다. 하루 이틀 여름밤을 세면서 또다른 가을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아무것도 아닌, 하지만 함께인 시간을 더 깊게 느끼고 싶다.
그것이 지금 내게 주어진 선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21년의 글을 수정하여 발행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