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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아한밍블 Nov 16. 2020

기분 나쁜 소식에 지지 않았어!

직장은 동호회가 아니니까. 내 맘 같지 않으니까.

잡생각이 많아질 땐 걸으라고 했다. 걸으면 단순해진다고. 

누군가는 글감이 생각나지 않아 괴로우면 걸으라고 했다. 걷다 보면 생각나는 게 있을 거라고.


걷는다는 게 여러모로 소용이 있구나 싶다.

내가 걸어보니 둘 다 맞았다. 이 생각 저 생각에 힘들 때 무작정 걷다 보면 땀이 나고 목이 마르고 힘이 든다. 그냥 일차원적인 감각에 그동안 했던 무거운 생각들이 짐짝처럼 느껴진다. 무엇이 해결되는 것은 아닌데 무거운 짐짝을 그냥 치워버리게 된다. 짐짝은 짐짝대로 놔두고 나는 물을 마시고 샤워를 하고 개운해진다. 참 신기한 일.


그리고 글감이 생각나지 않을 때 걸으면 글감이 딱! 떠오르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누군가가 생각이 나고 그 사람과의 일화나 앞으로 이어질 일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이건 글감이 없다는 근심만 있을 때 가능한 기능이긴 하다.


오늘 아침은 두 번째였다.

짧은 길을 걸어서 더 그랬다. 오랜만에 같이 일했던 팀장님께 안부 문자를 보냈고 뜻하지 않게 발령 소식을 들었다. 뜻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 그냥 복직에 대한 생각이 났고 그러니 인사팀장님께 연락을 했고 앞으로 내가 갈 자리가 궁금했던 것이 내 진짜 속내이니까. 내가 가고 싶었던 자리가 다 찼다. 순간 먹구름이 몰려왔다. 분명히 그 자리를 약속했으면서. 언제나 내 생각하고 있다고 연락 잘하고 있다가 상황을 보자고 했으면서 그런 말은 기억에도 없다는 듯이 무심하게 말했다.


 역시나 그럼 그렇지. 애초에 기대 반 포기 반이었다. 나의 휴직에 조금의 지분이 있으신 분이라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내면서도 완전히 믿지는 말아야지 했었다. 슬프게도 직장은 그런 곳이었다. 동호회가 아니니까, 신앙 공동체가 아니니까 나와 친하다고 더 기도해주고 더 아껴주고 뭐 그런 게 아니다.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아웃풋을 내야 하는 조직. 그것에 어떤 개인 사정이 개입한다면 비리 또는 특혜가 되는 것. 배신감을 느낄 이유도 팀장님이 내게 미안해할 일도 아닌데 나는 역시 그렇지 하는 체념과 왜 팀장님은 여전히 나에게 어떤 채무감도 느끼지 않지? 하는 원망이 뒤섞였다. 나의 아침이 이런 감정으로 시작되었다. 자 글감이 던져졌다.!


휴직을 원하는 시기에 한 것만으로 얼마나 좋은가.

복직을 원하는 시기에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또 얼마나 좋은가.(물론 더 쉬고 싶어도 쉴 수는 없지만)

그런데 원하는 자리까지 내놓으라 하는 건 내 욕심이잖아.

난 채권자가 아닌데 왜 자꾸 상대방의 채무감을 강요하는 건지. 


어쩌면 감정에도 정당한 주인이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화를 낼만한 상황, 행복감을 느껴야 할 상황, 울어도 되는 상황 그때그때 걸맞은 감정의 이름이 있으니 그것을 분출하는 것은 주인의 권리인가? 하는 생각. 한쪽면만 보면 그렇다. 화를 낼 만한 상황이니 화가 나는 것은 나의 감정이니 옳다. 하지만 그것을 어떤 장소에서 어떤 방법으로 분출하느냐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다시 정의되어야 할 문제이다. 나의 경우도 그렇다. 나는 화가 났고 실망을 했고 상대방에 대한 원망도 생겼다. 이것은 나의 정당한 감정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팀장님께 어쩜 그렇게 태연하게 말할 수 있냐고, 왜 약속을 안 지키냐고 따지는 것은 안 될이겠지. 게다가 휴직하고 집에서 놀고 있으면서 무슨 황당한 요구인가? 내가 생각해도 좀 과하다. 그런데 때로는 내 감정을 챙기고 상대방에게도 무례하지 않은 선에서 정당한 요구를 하는 멋진 여자가 되고 싶다. 나는 언제쯤 그런 멋진 언니가 될 수 있을까?


예전에 유행했던 화장품이 있다. 유분기가 많은 티존 부위의 로션, 건조한 유존 부위의 크림 이런 식으로 나뉜 화장품. 짜장면과 짬뽕의 고민 속에 태어난 짬짜면도 두 가지 선택이 결합된 최고의 상품이다. 나는 감정과 행동의 정당한 반응 사이에 이런 최고의 아이디어 상품은 없는가 고민한다. 웃으면서 내 감정을 이야기하고 정당한 대우를 요구하는 것. 그것이 서로가 서로에게 무례하지 않으면서 나이스 한 관계가 되도록 하는 그 기술!! 판매가 되는 것이라면 현금이 되는 대로 사재기하고 싶은 심정이다.


휴직을 하는 순간부터 복직을 염두에 두는 시기까지 나는 계속 동일한 기술을 갈구하고 터득하지 못한 처음 그대로이다. 아이고 이 못난아. 사람 바뀌기 참 쉽지 않다 하지만 내가 또 그런 전형적인 인간일 줄이야.



그래도 말이지.

나는 오늘 아침 먹구름이 드리운 감정에 지지 않았다.

이렇게 글 쓰면서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능력 정도는 생긴 것 같다.



p200. 행복하자고 떠나온 여행에서 불행해지고 마는 건, 날씨 때문이 아니라 마음 때문이었다. 운 나쁘게 비가 오니까 이 여행은 망쳤다고 생각하는 마음, 나는 역시 되는 게 없다고 좌절하는 마음, 엄마 아빠가 지금 몹시 속상할 거라고 지레짐작하는 마음. 나를 괴롭히고 있는 건 날씨가 아니라 그런 생각들이었다. [평일도 인생이니까/ 김신지]





내가 가고 싶은 보직은 사라졌지만, 그건 확정되지 않은 것이었다. 애초에 그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었다. 겨우 그런 가능성이 사라진 것으로 불행한 하루로 시작하고 싶지 않다. 비 오는 날, 여행에서 불행해지고 마는 건 날씨 때문이 아니라 여차저차 파생되는 마음의 줄기 때문이듯 오늘 나의 하루도 그렇다. 

나는 오늘을 행복하게 시작할 것이다! 


기분 나쁜 소식에 지지 않았어!!! 


오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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