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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지 Nov 03. 2019

감정의 하수구

독박육아 도치맘 에세이

“엄마 너 버리고 갈 거야. 너네 황 씨들 다 싫어서 버리고 갈 거야.”


오늘도 후회한다.

남편에게 화가 난 것을 또 아이에게 풀어버렸다.

남편은 종종 혼자 시가에 간다. 신혼 때는 시동생과 브로맨스를 찍으러 갔고, 아이가 어릴때는 이유를 모르겠는데 갔었고, 아이와 내가 아픈 지금은 일단 금방 다녀오겠다며 간다.


그때 마다 나는 힘들었다.

신혼에는 집의 치안이 불안해 무서웠고, 출산 후에는 아프고 우울했다. 남편에게 정신적으로 의존하는  부류의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힘들고 아플 때면 곁에 있어주기를 바랐다.

그때마다 남편은 금방 다녀온다 하고선 늘 함흥차사였다. ‘그래 좋겠지. 피붙이들 만났으니 얼마나 편하고 좋겠어.’ 나는 늘 이런 식이다.

‘그래 어쩔 수 없겠지. 마누라가 암이라는데, 혼자 항암하러 다니는 걸 알면서도 회사에서 일을 하는 그 속은 편하겠어.’ 그렇게 늘 그를 이해하려 들었다.


지난밤, 나는 너무나 아팠다.

독감 예방주사를 맞은 아이는 밥도 못 먹고 아빠를 찾으며 끙끙 앓았다. 온몸에 오한이 들고 코는 막히고 귀와 목도 아픈데 내게는 그럼에도 챙겨 먹이고 재워야 하는 어린애가 있네?

순간순간 ‘이 남자가 또 우리를 버리고 갔어.’라며 일그러진 감정이 마음속 한켠에서 치밀어 올랐다.

남편은 자정을 훌쩍 넘겨 집에 들어왔다.

선잠에 깬 내게 약은 챙겨 먹었느냐 물었던가.

아프면 병원에 가서 주사 맞으라는 말도 잊지 않았던가.


어제도 그는 나에게 주사를 맞으라고 했다.

하도 찔려서 혈관이 안 나오는데 무슨 링거냐는 내 대답은 또 어느 바람인가를 타고 사라져 버렸다.

“선생님. 주사도 같이 처방해주세요.”

진료실에 따라 들어온 그가 한 첫마디였다.

나는 차마 화도 내지 못하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 주사라는 게 장단점이 있는데, 환자분 상황에 지금은 안 쓰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의사 선생님의 의견으로 마무리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남편이 한껏 들뜬 얼굴로 우리 모녀 앞에 선물 꾸러미를 들이밀었다. 아이 원피스와 내 영양제라고 했다. 아픈 처자식을 집에 두고 시가에 다녀오신 이유를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만삭인 동서가 여행을 다녀오며 우리 선물을 사 왔으니 그걸 줄 겸 오라고 했다는 거지.


어차피 나는 못 먹는 영양제.

선물이 문제가 아니라, 그의 태도에 화가 났다.

선물 없어도 된다고.

내가 힘들 때 제발 곁에 있어달라고!


예쁜 것 좋아하는 우리 집 48개월 어린이가 꼬까옷이 생겼다며 방방 뛰었다.

아이와 나오는 길.

그 꼬까옷을 입어 기분이 좋은 아이가 내게 물었다.

“엄마는 이제 어디 갈 거야?”

응. 엄마 이제 너 버리고 갈 거야.

너네 황 씨들 싫어서 엄마는 갈 거야.


엄마와 헤어져 무언가 긴장한듯한 아이의 눈빛을 보고 눈물이 흘렀다. 입에서 뱉을 땐 통쾌한데 그 쾌감이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힌다.

다섯 살의 나도 그랬다.


“너네 엄마 찾아가.”

엄마의 이 말이 나는 너무나 무서웠다.

하루는 아빠 엄마와 차를 타고 유원지로 드라이브를 갔었다. 여기서 기다릴 테니 저기 가서 솜사탕 하나 사 오라는 아빠의 말에 나는 절대 차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며 엉엉 울었다.

그즈음 유원지나 놀이공원에서 실종되는 어린아이가 많다는 뉴스를 본 탔도 있었겠지만, 사실은 내가 솜사탕을 사러 차에서 내리면 아빠 엄마가 탄 자동차가 나를 버리고 슈웅 가버릴 것 같아서였다.


아빠는 참 훌륭한 분이셨다.

존경받는 사업가셨고 인자한 아버지셨고, 아낌없이 주는 형...이었다.

동생들을 공부시키겠다며 자신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군대를 선택했고 형제들의 살길을 도모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고 전쟁터에 가셨던 아빠는, 참으로 당신의 형제와 조카들을 끔찍이도 아끼셨다.

철마다 우리 집에는 우는 소리를 기본 옵션으로 돈 좀 융통해 달라던 그들이 있었다. 태생이 여장부인 엄마는 무슨 연유에서인지 아빠의 눈물 몇 방울에는 매번 고집을 꺾었고, 우린 버는 돈보다 더 많은 지출을 친척들을 위해 했으며, 사업가의 외동딸인 나는 늘 옷을 얻어 입거나 기워입으며 자랐다.

그들이 다녀가고 나면 엄마는 밤마다 울었다. 그리고 어린 내 눈에도 엄마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음이 눈에 보였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그 영화는 피해의식에 찌든 여자들이 몰려가서 보는 것이라는 친구의 의견을 반박하다가 문득 내 꼴이 눈에 들어왔다.


“근데 있잖아. 우리 자랄 때 엄마들이 너네 ㅇ씨 종자들 꼴도 보기 싫다는 말 했잖아. 난 그 말이 되게 싫었거든. 근데 내가 요즘 애한테 그러고 있더라고. 그러면서 그때 엄마가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되고 또 한편으로는 화가 나.”


대하사극에 꼭 나오는 조선 개국공신 집안의 장녀인 친구는 평생 연년생 남동생에 치이며 자랐다. 그럼에도 사람이 나고 자란 배경이라는 것은 무시 못하는지 내게 늘 “이 또라이야, 그래도 너 며느리 도리는 하고 살아야 한다.”라거나 “너 같은 또라이 성질머리 받아주는 너네 신랑이 착한 줄 알아.”라며 제법 시누이스러운 조언을 해주곤 한다.

내 최고의 절친인 그는, 비혼 주의자이다.

자기가 자라며 당한 것들을 끊어내지 못할 것 같다고 했던가. 내 친구는 내 아이를 참으로 예뻐해 주는 좋은 이모이지만, 자신은 결혼과 출산을 거부하기로 선택한 이 시대의 30대 여성이다.

그러니까 그럴 거면 왜 결혼을 하고 애를 낳냐고.

“나는 만약에 잘 키운 내 딸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겠다고 하면, 낳지 말라고 할 거야.” 딸이 나와 다른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그런 영화를 보러 가서 질질 짜고 올게 아니라 딸이 나와 다른 삶을 살게 하면 되는 거라며, 왜 딸의 더 나은 삶을 위해 딸 가진 죄인이 되어 노년의 삶까지 바치는 게 어떻게 사랑인지 친구 자신은 모르겠다 했던가.


내 푸념을 듣던 친구가 말을 던졌다.

“야, 그건 네가 스스로 해결하고 결혼을 하던지 애를 낳던지 했어야지. 그걸 왜 애먼 애한테 푸냐?”

언젠가 EBS에 나오는 육아상담 전문가의 강연에서 엄마가 아이에게 못된 말을 하는 심리의 기저에는 결혼과 육아로 인한 엄마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고 싶어하는  일종의 복수심이 자리한다는 말을 들었다.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때의 나처럼.

아이는 내 감정의 하수구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또 아이에게 모진 말을 던지고 이내 가슴을 치며 자책을 한다.


나 자신이 한없이 무력하고, 한심하고,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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