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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지 Oct 21. 2019

내 새끼 천재설

독박육아 도치맘 에세이

“애가 나한테 구짭 이라고 말했어. 그래서 내가 여러 번 물어봤거든? good job이 맞아.”


느닷없이 아이가 영어로 답단형 대답을 하던 저녁이었다. 그동안 엄마가 라디오를 들으며 혼자 중얼거리던걸 아이가 기억해뒀던 것이었을까.

그날도 야근으로 귀가가 늦었던 남편의 손에 웬일인지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이 들려있었다.

뭐 기분 좋은 일이 있었냐 물으려던 찰나, 남편이 아이에게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전부 영어로.


갑자기 평소와는 다른 행동을 하는 아빠를 가만히 보고 있던 딸이 입을 열었다.

“아빠. 못 알아듣겠어.”


우리 부부는 취학 전에는 인지교육을 시키지 않는 발도르프 교육을 선택했다. 요즘의 학교는 우리가 공부하던 시절과는 차원이 다르다 하던데, 어차피 우리를 닮았으면 공부를 잘할 확률은 아마도 반반일 테고, 나란 엄마는 아이를 의대에 보내기 위해 공부를 시키느니 내가 공부를 하는 게 더 빠르겠다고 여기는 류의 사람이니, 우리 부부에게는 아이가 몸과 마음의 토양이 건강하고 탄탄한 사람으로 자라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러니 놀 때엔 후회 없이 놀게 해 주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우리 집에는 그 흔한 티비도 없고 세이펜도 어린이용 학습교구도 없다. 인형과 나무통들과 아이가 주워 모은 돌과 열매와 책들이 내 아이의 주된 장난감이다. 이렇게 옛날 어린이처럼 키우면서도 사실 마음 한편은 늘 불안했다.

‘뒤처지진 않겠지? 내가 그랬던 것처럼 학교 들어가면 다 따라잡을 수 있겠지?’

그 불안함에 우리 부부는 또 낚인 거다.

그 흔한 “내 새끼 천재설”에 말이다.


남편의 자식사랑은 좀 유난하다.

아이가 태어난 지 하루였던가 이틀이었던가, 남편의 팔 절반 길이밖에 안 되는 신생아를 안아 들고 “우리 예쁜 따~알, 어느 별에서 왔어요?” 따위의 질문을 해 대곤 했는데, 아이가 “뀨뀨”라고 옹알이를 하자 신생아가 무려 대답을 했다고 호들갑을 떨었던 적이 있다. 신생아가 말을 알아듣고 대답을 했다 이거지.

그는 내가 교회에서 핸드벨 콰이어 연습을 할 때, 아이가 지휘자 선생님을 따라 손을 휘적이며 지휘를 한다며 매주마다 들떠있던 사람이었다. 어느 날엔가는 아이가 클래식 FM에서 나오는 음악에 맞춰 손과 고개를 흔들고 고음으로 소리를 내며 따라 한다고, 내 새끼가 음악 신동이라며 유럽권 유학을 알아봤던 적이 있었다.

훗날 말을 제법 하게 된 45개월에 그 날의 녹음파일을 들려주었더니, 심심하다고 엄마 아빠는 밥 좀 그만 먹고 나랑 놀아달라고 말한 거였다나 뭐하나.


그래도 그때는 마냥 신나고 들뜨기만 해도 충분했다.

언제부턴가 내 새끼가 천재인 것 같고 신동인 것 같은 느낌에 미안한 감정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너는 이미 45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보고 들은 것들을 머릿속에 다 저장해 두었을 텐데, 엄마 아빠는 그 시간을 또 무시해버렸구나.’ 같은 미안함 말이다.


아이가 시내의 지리와 상점들의 위치를 기억하는 것에,

몇 가지 중국어와 영어를 알아듣고 사용하는 것에,

꽃과 나무의 이름을 아는 것에 놀라고 감탄할 때마다 말이다.

인지교육을 시키지 않으니 더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 그런다고 마냥 대책 없이 놀리지도 않는데 말이다. 커리큘럼에 따라 리듬 생활을 하고 대근육과 소근육이 발달하며 아이의 눈빛이 달라져 가는걸 내 눈으로 봤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다섯 살 어린이를 갓 태어난 신생아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어머나 아가야. 이게 그건 걸 어떻게 알았어?”

“알아서. 나 알고 있었어.”


요즘 들어 우리 집 만 3세 11개월 언니는 “알아서”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말을 못 했을 뿐이지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다 보아와서 알고 있었다는 의미일까.


이제는 제법 사람을 키우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가끔, 내 새끼가 천재같이 느껴지는 순간이 올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그래, 네가 바보는 아니구나.’

그러면서도 여전히 기분은 구름 위 어딘가에 잠시 올라갔다 내려오곤 한다.

부모라는 존재가 이런 건가.

아직 초보 엄마인 나도 잘 모르겠다.


여하튼.

오늘도 우리는 또 이렇게 <내 새끼 천재설>에 낚인다.

낚여놓고도 행복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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