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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지 Oct 15. 2020

의심 많은 도마가 뭐 어때서 (모태신앙의 자기 독백)

모태신앙 반항기

"은혜 자매. 모태신앙의 믿음은 유산인가요? 자산인가요?"


나는 중학생이 되며 부모님이 다니시는 교회를 떠났다.
그 시기의 아이들이 친구 따라 교회를 옮겨 다니는 걸 나도 하고 싶었던 이유도 있었고, '헌금 많이 하는 누구의 딸'이라는 인식이 깔린 그 친절함이 너무 불편하고 싫었기도 했다.
그렇게, 과천이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르면서 시내버스를 타고 안양에서 과천까지 혼자 교회를 다녔다.  적당히 다니다가 다시 돌아오려니 여기셨던 부모님도 나중에는 포기를 하신듯했다.


20대, 청년부에서 임원을 하던 때였다.
부모님이 다니시는 교회에서 대심방이 있다고 했다.
부모님께는 연중 중요한 행사이기도 하고, 내가 태어나 유아세례를 받은 모교회인지라 시간을 맞춰 참석을 했다.
그날 그곳에서 처음 만난 목사님이 내게 질문을 했다.
모태신앙인 너의 믿음은 유산이냐고 자산이냐고.



내 아버지는 보훈병원에서 신앙을 가지셨다.
몇 대째 관악산에 있는 유명한 암자를 찾아가며 불공을 드리던 집안의 자손이 예수를 믿게 되다니.
그때는 수많은 젊은 청춘들이 전쟁에 나가 불구가 되어 돌아온 시기이기였다. 치유의 은사와 기적이 전국 팔도 유명하다는 기도원에서 왕왕 일어났다던 시절, 그때 그 보훈병원 교회에서 신앙을 갖게 된 청춘들이 많았다.
불구가 된 몸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실 거라는 기대는, 설령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믿는 신앙이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사람들과 마음을 맞춰 교회를 세웠다.
우리 같은 구루마들*도 눈치 보지 않고 다닐 수 있는 교회를 만들자는 마음이었다. 비산동 주공아파트 앞마당에 모여 첫 예배를 드린 게 시작이었다. 나는 그 교회에서 태어났다. 내 이름도 그 시절 담임목사님이 지어주셨다.

(*구루마들: 휠체어를 타는 이들을 칭하는 보훈가족들의 은어)
부모님의 말씀에 따르면 아이의 이름을 짓지 못해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심방을 오신 목사님과 권사님들이 교회에서 오는 사이에 생각을 하셨다며 제안한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그 시절 내 이름 후보는 에스더 한나 마리아였다. 성경에 나오는 여성들의 인생이 너무나 굴곡이 심해서 무엇 하나 탐탁지 않아 망설이던 찰나, 하나님께서 값 없이 주신 선물이라는 뜻의 이름을 받았으니 마음에 쏙 드셨을 수밖에. 그래서 내 이름은 은혜다.

흔해 빠진 내 이름.
상가에서 우리 집까지의 거리는 아무리 느리게 걸어도 10분이 걸리지 않았는데, 고민하는데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을 내 이름.
나는 내 이름이 참 싫었다.

나는 내 부모님 주변에 있는 목사들도 싫었다.
아빠가 처음으로 저분께 "임종 예배"를 받고 싶다 하신 그 한 분을 제외하고는 다 싫었다.
무슨 절절한 사정은 그리도 많은지 힘들 때마다 찾아와 울고 가는 사람들.
좋을 때는 연락 한 번 없는 사람들.
그중 최고는 우리 할머니의 병환을 낫게 했다는 목사였다.

엄마가 나를 낳은 이후로 우리 집에 오셔서 막내딸이 낳은 늦둥이 외동딸을 키워주셨던 할머니가 노환으로 병 져 누우신 적이 있었다. 그때 알게 된 그 목사님이 열심히 찾아와 기도를 해주셨고, 그 덕인지 할머니가 완쾌하신 일이 있었다. 부모님은 그 교회에 다니지는 않으셨지만, 종종 찾아가 헌금을 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도우셨다. 귀하고 고마운 인연이라고.

그 목사는 한자리에서 목회를 그리 길게 하지 못했다. 교회들이 폭발적인 성장을 하던 시절이었는데 유독 그 교회는 자주 망했다. 그 집 막내딸이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있었을 때는 면접기간 동안 아예 우리 집 작은방에서 기거를 했었고, 신림동 어디에 또 개척을 할 때는 내 용돈 보태 장만한 피아노를 빌려달라고도 했었다. 그때 거의 반강제로 빌려드렸던 내 피아노는 그 교회를 처분하면서 한데 묶어서 팔았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그 내외가 우리 집에 왔을 때는 경기 남부지역에서 요양원을 운영 중이었다. 신수가 훤해 보였다. 안부가 궁금해 왔다는데, 용건은 뻔했다.



개척자의 삶을 사셨던 아버지는 끝내 병원에서 숨을 거두셨다.
아빠의 손으로 돕고 개척한 교회가 한두 곳이 아닌데, 제대로 찾아온 곳은 버림받은 동료들이 남은 교회와 아빠가 그리 신뢰하셨던 목사님의 교회뿐이었다. 어디 교회뿐이랴. 아빠가 사시는 날 동안 돕고 구제해 살린 사람이 한 둘이 아닌데도, 딱 그 사람들만 연락 한 통이 없었다.
아빠는 내가 다니는 교회의 교구 목사님의 손에 임종 예배를 받으셨다. 숨만 붙어 있을 뿐 이미 모든 게 다 멈춰있는 상태임에도 마지막 기도를 마치자 목사님을 손을 잡고 몸을 끌어당겨 인사를 했던 사람, 그게 우리 아빠의 신앙이었다.
그랬다.
불같은 신앙. 바위보다 더 단단한 신앙. 그게 아빠의 믿음이었다.
그래서 수시로 의심하고 따지고 드는 나는 종종 아빠와 갈등을 빚곤 했다. 그때마다 아빠는 내게 교만하고 건방지다고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거라고 대들었다.
나는 지금도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틀리지 않았고, 아빠와 나는 달랐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다시 모교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주변의 말 많은 권사님들은 "아무래도 큰 교회가 좋겠지. 이런 중형교회가 눈에 차겠어?"라고들 했지만, 사실 보고 배울 어른이 없어서 가기 싫었다.

내가 기억하는 어릴 적 모교회의 사모님은 정말 사. 모. 님. 이었다. 아줌마들이 번갈아가며 집안일을 도와드리고 김장도 그 집에서 하고 있는데, 그 안에 꽃처럼 앉아계시던 분이었고, 그 시절에는 다들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 관습에 반기를 들었던 게 우리 부모님이셨다. 그럼에도 모두가 그런 목회자에게 신앙을 배웠으니 신앙생활이라는 것도 더 볼 것이 없었다. 꼰대력 만렙이었던 그 시절 장로교답게, 교회의 분위기는 꾸준히 그랬다.
교회는 안양의 중심부에 위치한 덕에 꾸준히 성장은 했는데, 초대 목사님 시절부터 꼰대스러운 신앙생활을 배운 (이른바) 창립멤버들의 행태가 참 볼만했다.
직분이 지위 고하를 의미하는 줄 아는 사람들.
사람 자체는 참 좋은데, 교회의 직분만 씌면 사람들이 변했다. 동네에서야 어쩔 수 없이 보고 사는 이모 삼촌들이라지만 사실 그들과 같이 신앙생활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 부모는 그렇게 행동을 하지 않는 분들이었어도, 그래도 그 안에 들어가 있고 싶지 않았다. 진심이었다.

그러던 언젠가, 아빠가 당신 앞으로 나오는 노령연금을 용돈으로 더 줄 테니 모교회로 돌아오라는 제안을 하셨다. 딸과 함께 본당 맨 앞에 앉아 예배를 드리고 싶으셨던 것 같기도 하고 그즈음 온 가족 불러오기 운동 같은 걸 했던 것 같기도 한데, 때마침 대심방이 잡혔던 것이다.
역시나 예상대로 처음으로 보는 새 목사님은 나를 보자마자 질문을 던졌다.
"은혜 자매. 모태신앙인 자매의 믿음은 유산인가요? 자산인가요?"
...

이런 것도 질문이라고.
유산이라 답하면 부모님의 유산이니 모교회로 오라고 할 것이고, 자산이라고 답하면 기본도 모른다며 모교회로 오라고 할게 뻔했다.
"모태신앙으로 받은 신앙은 유산이나, 그걸 받아 키우는 건 내 몫이니 자산입니다." 이게 내 대답이었다.
후로 더 이상 내게 모교회로 오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찬양에 은혜를 받는 것일까 그냥 분위기에 취한 것일까




나는 의심을 한다.
특히 교회에서는 더욱 가드를 올리고 의심을 한다.
이 집안에서 가장 먼저 교회에 다니고,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던 큰아빠가 무신론자가 되고 큰엄마가 불자가 된 이유도 교회 안에서 가드를 내리고 사람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사를 축소시켜놓은 게 교회인데 뭘 보고 덮어놓고 믿나.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귀하다고 가르쳐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하는 말이라면 덮어놓고 믿는다지만, 나는 의심을 하고 종종 입 밖으로 비판의 말을 쏟아낸다. 설교를 들어도 저 목회자가 어떤 의도로 이 절기에 저 설교를 하는지 분석하며 듣는다. 그래서 보지 않고 믿는 복된 믿음은 없을지 몰라도, "하나님 너 까불면 죽어-" 같은 소리를 듣고도 아멘을 외치는 짓은 하지 않는다.  


아빠의 장례는 결국 내가 섬기는 교회의 도움을 받아 치렀다.
식구도 없고 친척도 끊긴 집안에서 제법 빈틈없이 예를 차려 보내드리는 걸 보고 아빠의 동료들은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 물으셨다고 한다. 당신의 자식들은 부모의 바람과는 다르게 신앙생활은 하지 않아서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나. 말 많은 어느 권사님은 은혜가 대형교회에 다녀서 가능했다고 하셨다는데, 엄마는 이렇게 대답을 했다.
"은혜가 어릴 때 갔잖아. 가서 뿌리를 잘 내렸어."
그랬다. 나는 결국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정착을 했다.

의심이 많아서 겁도 없이 불신자인 남자와 결혼을 했고, 남편과 아이를 한데 묶어 유치부로 보내며 종종 남편과 절을 찾아 초 한 자루를 켜고 오곤 한다. 처음엔 성만찬 준비상을 보고 "저거 만두야?" 묻던 남자에게 차근차근 설명해 주는 걸로 시작했는데, 이제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과정을 두고 집단이기주의이고 상대 민족의 입장에서는 학살 아니냐는 질문에 난상토론을 하는 삶이 되었다.


내가 내 삶의 모양을 찾아가는 사이, 부모님의 모교회는 사라졌다.
일반 기업이라면 상장폐지라는 좋은 표현이 있는데, 교회면 뭐라고 해야 하려나.
지역 노회에까지 진정을 넣어가며 막으려 했지만, 결국 교회가 사라졌다. 내게 유산이냐 자산이냐를 물었던 목사와 추종자들이 교회의 재산을 다 들고 새 교회로 옮겼다고 했다. 그냥 돈이나 들고 갈 것이지, 교회의 뿌리까지 아예 없애버리고 가 버렸다나 뭐라나. 분명 말도 안 되는 일인데, 직분이 계급인 줄 아는 장로들이 뭔지도 모르는 서류에 호기롭게 서명을 한 덕에 악 소리 한 번 제대로 못 지르고 당했다고 했다.

그렇게 모교회가 사라졌다.

비산동 상가에 있던 교육관에서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다는 날, 휠체어에 탄 아저씨들을 밀쳐가며 그들은 떠났다고 했다. 그 교육관 자리가 예전 내가 어릴 적에는 본당이었다. 아저씨들이 내 나이보다 더 젊었던 시절, 벅찬 가슴 안고 모여 예배를 드렸던 그곳에서 버림을 받은 꼴이었다.
꼰대이즘이 신앙인 줄 아는 노인들을 보며 그 교회 교인들도 적잖이 싫었겠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목사라면 당신 눈에 거슬린다고 그렇게 버리고 가면 안 되는 것이었다 싶어 한동안 양가감정에 시달렸다. 어디 이것뿐이랴. 30대 젊은 나이에 의기투합해 시작한 당신들의 평생이 담긴 교회가 사라진 노인들의 모습이 짠하기도 하고, 오죽 꼰대 진상이었으면 저렇게 버림받았을까 짜증이 치솟기도 했다.


그래서, 내 아버지의 장례는 내가 다니는 교회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그렇게 상을 치르며 엄마는 신앙의 축이 내게로 넘어왔음을 느끼셨다고 했다. 교회를 지키겠다고 함께 지동도합하던 아빠와 효자 이모를 하늘로 떠나보내며 엄마의 마음도 정리가 되셨던 걸까, 결국 엄마가 내가 다니는 교회로 오셨다.

엄마가 등록하시던 날은 인원수를 제한하는 예배였다. 입장에 필요한 QR코드를 받으려면 미리 예약을 해야 했다.
그렇게 서둘러 준비해 참석한 자리.
엄마는 딸과 사위 사이에 앉아 한참을 펑펑 우셨다.
아빠를 만나 처음 읽었던 성경, 그때의 감동.
동료들과 개척을 했던 순간, 이후의 삶, 모든 게 다 스쳐 지나가셨으리라.
미리 연락을 해 놓은 교역자들 말고는 만나 인사할 사람도 없었던 그날의 예배에서, 펑펑 우는 엄마의 곁에 앉아 생각했다.

'의심 많은 도마가 뭐 어때서.'


사람들은 예수의 부활을 못 자국을 만지고서야 믿은 도마의 믿음을 낮춰 본다.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귀하다며 그러니 일단 믿고 복을 받으라고도 한다.

그래서인지 다들 덮어놓고 믿고, 그 믿음을 굳건히 하자니 점점 늘어나는 건 은혜롭기 그지없는 말 뿐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의심 많은 도마가 뭐 어때서?
도마는 의심이 많아서 표적이라도 한 번 더 만졌을 테다. 확인을 했으니 오히려 그 믿음에는 의심이 들어갈 틈 하나는 줄었을 것이다.

의심 좀 해 본 도마가 뭐 어때서?
의심이 있으면 적어도 덮어놓고 믿다가 뒤통수 맞지는 않을 텐데.
그게 뭐 어때서.
의심 많고 건방지면 좀 어때서.



개척자의 축복.

베푸는 자의 축복.

3대가 복을 받는 축복.
뭐 하면 복을 받는다는 그 복, 다 모르겠고.
청년부 시절 성가대 발표회에서 불렀던 찬양 가사가 나를 지켰다.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니리..(사 11:2)
...

이 말씀이 나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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