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상지 Jan 23. 2021

아주 무겁지만 아주 가벼운 말

모태신앙 반항기

"님의 사연을 읽으며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님을 위해 기도를 하는 중에 이 말씀은 꼭 전해드려야겠다는 마음을 주셔서 전합니다. 그분께서도 늘 함께하셨고 안타까워하셨고 더욱 그분을 찾기를 기다리셨다고 말입니다."


이때가 언제였는지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유튜브를 보다가 우연히 삶을 포기하려는 내용의 댓글을 읽었고, 그 댓글에 내 상황을 공유하며 힘들어도 버텨보라는 말을 전했던 것 같다. 타인에게 힘을 주기 위해 쓴 내 이야기에, 사람들은 나와 그에게 응원하라며 힘을 내라는 댓글을 달아줬다. 아마 젊은 나이에 암에 걸렸고, 항암중에 친정아버지가 뇌사에 빠지셨고, 아빠 병원과 내 병원과 아이 어린이집을 오가며 모두를 챙겨야 하는 시기를 살았던 내 경험이 타인들 보기에 많이 안타까웠던 것 같다.

지금 되돌아 생각해 봐도 어떻게 그런 시절을 살아냈는지 모르겠고, 어쩜 그렇게 무식하게 맨땅에 헤딩하며 버텼을까 싶기도 하지만, 사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뾰족한 묘안이 없을 시절이었다.
한참을 잊고 있던 댓글에 오랜만에 댓글이 달렸다. 내 사연을 읽고 마음이 아팠다고, 위해서 기도를 했다고, 그분께서 전하라는 마음을 주셨다는 내용이었다.


그분께서도 늘 함께하셨고 안타까워하셨고, 그분을 더욱 찾기를 기다리셨다고.


유방암 조직 검사 결과를 들었던 즈음, 친정아버지는 병원에 계셨다. 의료사고가 있었고, 언제 심정지가 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병원에서는 이틀을 못 넘기실 거라는 막말을 매일매일 했다. 아빠가 어느 순간에 떠나셔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매일 밤낮으로 울며 기도했다. 엄마가 홀로 아빠를 간호하시느라 전혀 쉬지 못하셔서, 아이를

재우고 밤마다 내가 가서 교대를 했다. 그렇게 밤마다 찬양을 부르고 기도를 했다. 아빠를 살려달라고. 나도 살려달라고.

첫 번째 심정지를 앞둔 어느 날, 아빠께 시편 전편을 읽어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아빠가 가장 좋아하셨던 성경 중 하나가 시편이었던 게 생각났던 것이다. 아니지, 의식이 있으셨을 때 내게 유언처럼 하셨던 말씀을 요약하자면 '시편' 이었으니까, 그래서 시편을 읽어야겠다는 결심이 들었을 테다.
밤마다, 그리고 아이를 등원시키고 또다시 낮에도 끊임없이 아빠 곁에 앉아 소리내어 시편을 읽었다.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께서, 여호와 라파의 그분께서 이 마음과 정성을 보시고 부디 고쳐주시기를 살려주시기를 바라고 바라고 또 바랐다. 설령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이게 내가 자식으로서 해드릴 수 있는 마지막 효도라고 생각했다.


시편 150편을 다 읽고 몇 시간 후, 첫 번째 심정지가 왔다. 그 후 또 한 번의 심정지가 왔었고, 세 번째 심정지에서는 뇌사를 얻으셨다. 그렇게 아빠는 9개월여를 버티시고 세상을 떠나셨다.
그 사이 나는 암 수술을 받았다. 암 수술을 받고 항암도 받았다. 아빠가 제대로 눈을 뜨시고 마지막으로 나와 내 아이의 얼굴을 보셨던 날, 나는 항암으로 머리가 다 빠진 모습을 보여드렸었다. 머리가 신기하게 다 빠졌는데 이상하게 흉하지 않아서 집에서는 비니도 벗고 지낸다는, 나름의 우스갯소리를 했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나 잘 지내요. 걱정하지 마세요.'였는데, 그날의 기억이 이제는 비수처럼 가슴에 남았다.



마지막 아드리아마이신 항암을 갓 마치고, 방사선치료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빠가 뇌사에 빠지셨다. 중환자실에서는 더 이상의 연명치료는 불가능하고 의미도 없다며, 연명치료 포기 동의 각서에 사인을 하라고 종용했다. 내가 무남독녀 외동이라 상주를 해야 하는데, 지금 암 수술을 받고 항암과 방사선치료를 병행해야 하는 상황이라 도저히 장례를 제대로 치를 수 없으니 제발 방사선치료가 끝날때까지만 봐주시면 안 되느냐고 사정을 했다. 무릎이라도 꿇을 각오를 하고 찾아갔던 2층 내과 중환자실 앞, 담당의는 내 이야기를 듣고 어려운 이야기해줘서 너무 고맙다는 말을 남겼고 끝까지 배려해줬다.


암 수술을 받고 퇴원해 집으로 가기 전에 가장 먼저 들른 곳이 아빠가 계신 병실이었다.
걱정하시지 말라고, 이렇게 잘 수술받고 퇴원했다고, 안심을 시켜드려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그날 아빠가 약속을 하셨다. 아무리 못해도 1년은 더 살겠다고. 너 치료 다 받는 거 보며 네 뒤에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가끔 그날들이 떠오른다.

아빠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셨지만, 나는 중환자실에서의 그 보름 넘는 시간들이 1년의 값어치를 넘겼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아쉽고 아프고 그립기는 마찬가지다.

아빠는 내가 방사선치료를 마친 바로 그 다음날 스스로 세상을 떠나셨다. 연명치료로도 안되는 한계점이라는 게 있다는걸, 그때 알았다. 아빠가 마지막 중환자실에 계실 동안 나는 아이를 등원시키고 아빠가 계신 중환자실 면회를 갔다가 방사선치료를 받으러 갔었는데, 그 즈음 아빠와 상태가 비슷한 노인 한 분이 이 병원 중환자실로 들어오신 적이 있었다. 중환자실 베드가 여기밖에 여유가 없어서 오신 것 같았고 아들이 종합병원 의사라고 했다. 의사 가족이라 그런지 뭔가 좀 달랐다. 며칠간 남은 가족들이 매일같이 찾아와 울고 또 울더니, 어느 좋다는 날 고통 없는 저세상으로 보내드렸다고 했다. 그 가족을 보며 생각했다. 내가 아프고 내가 못나서, 마지막까지 아빠를 고통스럽게 하는 죄인이구나라고.



매일 기도했고 순간순간 기도했다.
열심히 기도하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기도했다.
그땐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


아빠가 마지막 중환자실에 들어가신 후, 주변에서 여러 사람들이 걱정의 말을 전해주었다. 미련 없이 은혜롭고 편안하게 보내드리는 것에 대한 조언이 대부분이었다. 더 이상의 미련 같은 건 없었는데 말이다. 그 시기에 그나마 마음을 잡고 후회 없이 보낼 수 있었던 건, 나보다 10년 전에 아버지를 잃은 친구의 한 마디 때문이었다.

"그래도 넌 지금 아빠가 살아계시잖아. 기도고 뭐고 열심히 아빠 찾아가고 아빠 곁에 많이 있어. 그래도 난 네가 부럽다. 아빠가 살아계셔서."

친구는 20대 중반의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열심히 기도를 하고 매달리고 예배를 드리면 기적처럼 살려주실 거라 믿었다고 했다. 임종하시던 날도 공동체 사람들이 왔었고, 그분들을 대접하느라 병원 밖에 나가있어서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고 했던가. 친구는 그 젊은 날의 자신이 너무나 한스럽고 아프다고 했다.

​그날의 친구도, 그날의 나도, 우리는 열심히 신을 찾았다.
그리고 그 결과에 원망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 순간 최선이었다.
그거면 된다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말로 겨우 잔잔하게 만들어놓은 호수에 돌을 던진다.
더욱 찾기를 원하셨다고.
그 이상 더 어떻게 찾고 매달리나.


암 환자의 삶을 살며 깨달은 게 하나 있다.
바로, 사람들은 생각보다 위로와 공감의 말을 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무 가볍고 우습게 본인과 상대의 짐을 덜어주려 하다가 오히려 탈이 나기도 하고, 뭔가 묵직하고 진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사실은 알맹이가 없는 쭉정이 같은 위로를 전하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며칠만 더 버텨서 월초에 돌아가셨으면 마지막 연금은 전액 다 나오는건데 그 며칠을 일찍 가셔서 마지막 연금이 반토막이 났으니 어쩌냐는 말 같은 것 말이다. 실제로 엄마가 지인에서 들은 위로였다. 처음 이 이야기를 전해듣고 그것도 사람이 할 말이냐며 나는 길길이 날뛰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조금 이해가 되었던건, 당장 소득이 줄어들 것에 대한 걱정이 앞서 나온 불완전한 위로의 말 이었다는 점이었다.
이미 죽도록 힘을 내고 있는 사람에게 힘내라는 말을 하는 건, 할 줄 아는 위로의 말이 힘내 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도 내가 아프고서야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언제부턴가는 사람들의 말에 신경을 크게 쓰지 않게 되었다. 중요한 건 오가는 말이 아니라 마음이니까. 이렇게 여기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랬다. 한결 마음이 편했다.
저 댓글을 받기 전까지 말이다.


'뭘 더 어떻게 찾아야 했다는 말이야!'
짜증과 분노로 한참 예민하던 즈음, 엄마에게서 전화가 들어왔다.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다가 그 댓글을 전했다. 엄마가 한숨을 내쉬며 말씀하셨다. "신경 쓰지 마. 자기네들이 뭘 알아서 기도를 더 열심히 해야 했다는 거야. 너는 그런데 신경 쓰지 말고, 너와 아이와 황서방 위해 기도나 열심히 해. 시편 읽고."


아, 이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이것은 돌림노래인가.

오래도록 묵혀두고 있던 감정을 글로 쓰는 이 시간, 나는 생각한다.
분명 이 글을 발행하면 누군가는 신성모독이라 할 것이라고. 저렇게 입방정 아니 글방정을 떨어서 자기 받을 복을 차버리는 것이라고 분명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생각하는 게 죄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머리를 타고 태어나게 하신 게 신인데, 가진 달란트로 생각이라는 걸 하고 글이라는 걸 쓰는 게 죄인가. 왜 늘 감사하고 행복하고 은혜롭다며 사람들 반겨할만한 글만 써야 하는가.


전염병으로 1년 내내 온 나라가 난리였다. 아니, 아직도 난리다.
아빠가 마지막으로 계셨던 병원이 코로나 중점 병원으로 지정되며 아예 건물 하나를 통으로 비웠다고 한다. 그래서 한동안 병원에 장기입원 중이던 아빠의 지인들이 병원에 남느냐 쫓겨나느냐를 두고 마음고생이 심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이 상황을 두고 엄마는 신께서 아빠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더 고생하지 말라고 그때 데리고 가신 거라고 했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인명은 재천이고, 내 아빠는 히스기야 왕이 아니니까.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나는 아직 아빠가 그립다.
그래서 아직도 아빠 생각을 하면 눈물부터 난다.
그래서인지 나는, 아직도 내 기도가 부족했다는 묵직한 척 가벼운 말들을 들으면 미치도록 화가 난다.
그럼 내가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어떻게 뭐, 항암 중에 금식 기도라도 해야 했나.
본질은 그게 아닌데, 왜 사람들의 위로라는 건 다 저 모양일까.


너무나도 가볍고 너무나도 무겁다.  





더하는 글.

아빠는 관찰실과 1인실에만 계셨습니다.

저희 가족의 종교적 행위로 주변에 피해를 입히지 않았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 부처님이 돈 필요하시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